한일협력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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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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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정치 · 경제 ·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협력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발족한 민간기구.
내용 요약

한일협력위원회는 1969년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정치·경제·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협력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발족한 민간기구이다.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두 나라의 현안문제를 논의하는 강력한 협력체제의 필요성에 따라 설립되었다. 창립총회와 제1회 합동위원회는 도쿄에서 개최되었는데, 정계·재계·학계·문화계의 유력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현안문제를 구체적으로 시정하거나 방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1970년 중국 저우언라이의 ‘4원칙’이 발표된 것을 계기로 점차 그 존재가 약화되었다.

목차
정의
1969년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정치 · 경제 ·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협력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발족한 민간기구.
내용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정부와 민간에서는 한일경제협력 논의가 다양한 형태로 추진되었다. 정부 차원에서 각료회의가 진행되었고, 민간 차원에서는 민간합동경제위원회가 구성되어 의견교환이 있었으며, 여러 경제회의들이 조직되어 한일 양국 사이에 가로놓인 문제를 협의하는 기구로 기능했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논의기구는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 했다.

한일 두 나라는 현안문제를 논의하는 강력한 협력체제가 필요하다고 인식했으며, 1968년 11월 13일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서울을 방문해 김성곤, 장기영 등 한국의 주요 인사들을 만나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기구 설립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69년 2월 12일에서 15일까지 도쿄에서 창립총회와 제1회 합동위원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이 위원회는 일본과 대만의 정치·경제인이 양국의 협력 촉진을 위해 마련한 일화(日華)협력위원회를 모델로 한 것으로, 정치·경제·문화 등 광범위한 문제를 논의할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또한 한일협정 체결 과정에서 영향력을 발휘한 친일, 친한 인맥의 활용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조직되었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창립총회 겸 제1회 합동위원회에 한국 측 백두진(전 국무총리), 일본 측 기시 노부스케(전 수상)가 두 나라의 회장 자격으로 정계·재계·학계·문화계의 중진들로 구성된 대표단(한국대표단 50여 명, 일본대표단 50여 명)을 이끌고 참석했다. 3일 동안 정치·경제·문화 등 3개 분과위원회를 구성해 각 분과별로 현안문제를 광범하게 토의했다.

협력위원회는 양측 10여 명씩으로 구성되는 상임위원회를 3개월마다 연 4회 정기적으로 개최하기로 결의했다. 이로써 한일협력위원회는 한일 간의 민간기구로서는 가장 격이 높은 대화의 통로로 기능하게 되었다.

회의를 마친 후 발표된 공동성명서와 정치·경제·문화 등 각 분과위원회가 마련한 보고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일본의 대한(對韓) 인식, 한국의 대일(對日) 인식을 정상화하기 위해 인사교류를 촉진한다.

② 한일 양국이 월남문제에 관해 적극 협력한다.

③ 한국, 일본, 대만 세 나라가 아시아에서 긴밀히 협력한다.

④ 재일교포의 지위 향상을 위해 양국은 계속 노력한다.

⑤ 한일 간의 무역불균형 시정과 한일경제협력문제 해결을 위해 계속 노력한다.

⑥ 문화교류를 촉진하기 위해 유학생의 교환, TV프로 교환, 문학작품의 상호 번역 출판, 언론인의 상호 방문, 과학기술의 정보 교환, 과학기술자의 공동연구, 숙련기술자의 교류를 촉진한다.

이상에서 드러나듯 한일협력위원회는 양국의 현안문제를 구체적으로 시정하거나 방안을 마련하는 데까지는 도달하지 못하고 ‘촉진한다’, ‘적극 협력한다’, ‘계속 노력한다’라는 식으로 결말을 맺었다.

한일협력위원회에 정·재계 유력인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기대되었지만 지금까지 있었던 한일 두 나라 사이의 각료회담이나 민간협력회의 등 여타의 한일회담과 비슷한 수준에서 논의가 이루어졌다는 한계를 보였다.

창립 직후 제1차 합동상임위원회(1969년 5월 20일~21일)가 도쿄에서 개최되어 극동안보문제와 한일경제협력문제 등 총회 때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토의했다. 이어 제2차 합동상임위원회(1969년 11월 27일~28일)가 서울에서 열려 오키나와 반환에 따른 극동안보문제, 포항종합제철 건설을 위한 지원문제, 재일교포의 영주권·경제활동·교육문제, 한일무역불균형문제 등 양국의 정치·경제에 대한 광범위한문제를 협의했다.

제2회 한일협력위원회 총회는 1970년 4월 20일부터 3일간 열렸다. 그러나 한일협력위원회는 1970년 4월 저우언라이[周恩來] 수상의 ‘4원칙’이 발표된 것을 계기로 점차 그 존재가 약화되었다.

참고문헌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경제협력 논의구조의 변화양상: 정·재계 경제협력회의의 위상과 역할을 중심으로」(이현진, 『한국민족운동사연구』74, 2013)
「한일관계와 ‘비정식접촉자’: 국교정상화 성립 전후로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안소영, 『한국정치외교사논총』33-1, 2011)
「극동안보 등 검토」(『경향신문』, 1970.4.20.)
「기술교류 토의」(『매일경제』, 1969.11.26.)
「한·일 선린자세의 모색」(『동아일보』, 1969.5.20.)
「이해 높여 현안 해결」(『경향신문』, 1969.2.17.)
「한일협력위 발족」(『경향신문』, 1969.2.11.)
「12일에 창립총회」(『매일경제』, 1969.2.10.)
집필자
임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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