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8월 YMCA 관련자 이상재·윤치호·유성준·박승봉·최병헌 등과 3·1운동과 연관되어 투옥생활을 한 이승한·정노식·김세환·김창준·김백원 등의 주도로 전문 출판사 설립이 추진되었다. 이들은 우선 강연단을 조직하여 전국을 돌며 순수 한국인 자본으로 설립된 문서선교 기관이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주식을 모집했다.
1922년 1월 14일 서울 안동교회에서 윤치호·유성준·이상재·박승봉·윤명은 등 12명이 모여 조선광문사 창립발기인 대회를 개최했고, 위원장에는 윤치호가 선출되었으며, 창립 실무는 박용희·김석태·박붕서 등이 맡았다. 1923년 1월 31일 종로 명월관에서 창립총회를 열었고, 그동안 광문사로 준비하다가 창립과 함께 명칭을 조선기독교창문사로 바꾸었다. 그것은 일반 출판사 중에 ‘광문사’가 있어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창립총회 당시 주주가 1,257명에 달했고, 초대 사장에 이상재, 전무에 박붕서 이하 임원 20명이 선출되었다.
1923년 7월 창문사에서 처음으로 추진한 것은 정기 간행물 『新生命』의 창간이었다. 일제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발행인을 선교사 쿤스(E. W. Koons), 젠소(Genso) 등으로 등록했으나, 실질적인 편집과 발행은 한국인에게 있었다. 초대 주필 전영택을 이어 홍병선·송창근·방인근 등이 편집 실무를 담당하였다. 주요 필자로는 채필근·송창근·김지환·이관용·박동완·최태용·조민형·김창제·최상현·채성식·김인서·강매·고려위·강명석 등 민족의식이 강한 필자들이 주요 필진을 구성하고 있었다.
3·1운동 이후 대중계몽을 통한 민족의식 함양과 독립역량 축적이란 실력양성운동 노선을 대표할 만한 기독교 민족운동계 잡지였기 때문에 조선총독부의 감시와 간섭을 받았고, 1925년 4월 통권 21호로 폐간되었다. 창문사는 이외에도 다양한 단행본을 출판하였다.
창문사는 선교사와 선교부가 장악하고 있던 한국기독교 출판문화 풍토 속에서 민족주체적인 기독교 지성운동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