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중반 한국기독교의 사회적 표준을 마련하려는 노력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기독교계의 새로운 흐름, 즉 에큐메니컬 운동의 등장과 함께 그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에큐메니컬 운동의 화두였던 ‘사회복음’을 구체화하는 작업을 전개하던 YMCA를 중심으로 나타났다.
1925년 12월 28일부터 29일까지 국제선교대회 회장 모트(John R. Mott)의 내한과 함께 그의 제청으로 조선기독교봉역자회의가 서울 조선호텔에서 개최되었고, 이 회의에서 YMCA는 개최의 산파역할을 맡았다. 이 회의의 개최 목적은 1928년에 열릴 예정인 예루살렘 국제선교대회에 앞서 각국의 여론과 실정을 파악하는 것과, 한국교회를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에 가입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회의에는 윤치호를 의장으로 하여 한국교회의 각 교파 지도자 및 선교사를 포함하여 모두 62명(한국인 31명, 선교사 31명)이 참석하였다. 한국인 대표는 구자옥, 신흥우, 오화영, 유억겸, 윤치호, 이상재, 이건춘, 김활란, 변성옥, 양주삼, 오긍선, 홍병선, 김동원, 김득수, 장규명, 이순기, 최홍종, 길선주, 김유순, 남궁혁, 이승훈, 이익모, 이자익, 임택권, 차재명, 최제마태, 한석진, 김미리사, 김성연, 김애희, 김혜연, 유각경, 윤용희 등이었다.
회의 주제는 ‘조선에는 어떠한 문제가 당면되어 기독교세계의 지식과 경험으로써 원조키 원하나뇨’라는 것으로 전체 토의로 진행되었다. 이후 ‘현금 조선남녀 청년의 기독과 그의 경륜에 대한 태도’, ‘조선기독교 사업방침의 재조(再調)’, ‘영적 동력’,‘앞으로 개회 예정인 국제선교협의회와 조선 연합공의회와의 관계’ 등 총 4개 분과에서 토론을 실시하였다. 분과 토론을 통해 유물주의에 빠진 학생과 무산청년들의 도전에 대응할 당면한 사회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 정립, 시대의 변화와 우리의 실정에 맞는 선교방법의 모색, 선교사와 한국인 교역자 간의 관계 재설정,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국제선교연맹 가입 등 한국기독교 운동의 중요한 방향전환을 이끌어냈다.
특히 이 자리에서는 그동안 선교사들이 행했던 선교방식과 신학, 인종적 우월감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예컨대, 이 자리에서는 한국교회 개척자의 한 사람인 한석진 목사가 보수주의 신앙을 대표하며 당시 한국교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S. A. 마펫 선교사를 향해 “마 목사, 당신은 속히 떠나니 않으면 금후에는 유해무익한 존재가 됩니다. 마 목사는 처음부터 나와 함께 일한 친구요, 동지로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니 용서하시기 바랍니다.”고 하면서 선교사들의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회의는 사회주의자들의 반종교운동이 그리스도와 그의 경륜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현실 교회의 행태에 대한 반대로 인식하고, 또한 일제 지배하의 사회제도와 결부시켜 한국 대중의 경제적 어려움에 대해 기독교적 차원에서 그 원인을 찾고자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