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동동약 ()

부인동 동약
부인동 동약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 후기 경상도 대구부(大丘府) 해북촌면(解北村面) 부인동에서 실시된 동약.
이칭
이칭
부인동약(夫仁洞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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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 경상도 대구부(大丘府) 해북촌면(解北村面) 부인동에서 실시된 동약.
개설

조선시대 양반들은 그들이 거주하는 마을에서 동계(洞契) 또는 동약 등을 실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구의 부인동동약은 1739년(영조 15)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源)에 의해 실시되었다. 부인동동약의 약속 조항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예안향입약조(禮安鄕立約條)를 향약(鄕約)으로 완성시킨 김기 향약(金圻鄕約)을 그대로 따랐다. 따라서 그 주된 내용은 덕업상권(德業相勸), 예속상교(禮俗相敎), 과실상규(過失相規), 환난상휼(患難相恤) 등 향약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부인동동약은 단순히 향약만을 실시한 것이 아니라, 선공고(先公庫)와 휼빈고(卹貧庫)를 함께 설치하여 농민들의 삶을 안정시킨 바탕 위에 향약을 실시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동약이나 향약과는 크게 다르다. 물론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부인동동약은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실시되었다.

내용

최흥원은 1739년에 부인동에서 동민들 가운데 부유한 자들과 함께 동약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크게 효과가 없었다. 토지가 있는 농민들은 무거운 세금 부담에 토지가 없는 농민들은 굶주림에 허덕였기 때문이다. 이에 기금을 만들어 1753년(영조 29)에 이르러서는 선공고(先公庫)와 휼빈고(卹貧庫)를 설치하였다.

선공고에서는 공세(公稅) 곧 토지세를 대납하였고, 휼빈고에서는 토지가 없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여 모두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였다. 이때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대구 판관(大丘判官)이나 경상 감사 등 많은 지방관들로부터 칭찬을 받거나 부세(賦稅)의 감면 조치가 뒤따르기도 하였다. 마침내 조정에 알려지게 되었고, 정조(正祖)가 이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후 최흥원은 그의 나이 74세에 경모궁 수봉관을 시작으로 장악원 주부(78세), 공조 좌랑(79세), 익위사 익찬(80세) 등을 거쳐 마침내 정3품의 통정대부(82세)에 올랐고, 사후에는 효행으로 정려와 함께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참찬관의 증직(贈職)이 내려졌다.

변천과 현황

조선시대 대부분의 동계·동약은 마을 거주 양반들에 의해 실시되었다. 그러나 부인동동약을 실시하였던 최흥원은 부인동에 살지 않았다. 부인동은 그의 5대조 최동집(崔東㠍)이 은거하던 곳이었고, 또 많은 토지가 소재한 지역이었다. 물론 최흥원은 한때 부인동에 호적을 옮겨두기도 하였지만, 거주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웃 해동촌면(解東村面) 칠계(漆溪)에 거주하고 있었다. 최흥원이 거주지가 아닌 부인동에서 동약을 실시한 것은 이곳의 토지와 농민들을 적절하게 지배하기 위함이었다.

부인동동약은 19세기에 들어와 큰 문제에 봉착하였다. 그것은 부인동 거주 일부 동민들이 동약의 운영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그 핵심 인물은 최씨 가문의 서얼(庶孼)출신이었다. 이들은 동약 실시 이후에 새로 이주해온 농민들이나 이웃동민과 연합하거나 면임(面任) 나아가 대구판관(大丘判官) 등의 지원을 받아 대구부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동답(洞畓)을 나누어 분계(分契)하자거나 이제까지 토지세만을 부담하던 선공고에 군역(軍役)을 담당하게 하고, 나아가 부인동에 입적되어 있는 최씨가의 호적을 거주마을로 옮겨가라는 것 등이었다. 말하자면 동약의 파기를 주장한 것이었다.

부인동동약을 주도하고 있던 최흥원 후손 곧 최씨 본가(本家)에서는 여기에 적극 대응하였지만, 부인동은 분동(分洞)되고 최씨가의 호적은 이적(移籍)됨으로써 결국 동약은 파괴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고을의 선비들과 경상도의 700여 유림(儒林)이 전후 3차에 걸쳐 대구부와 경상감영에 동약의 유지를 청원하였다. 이러한 경상도 유림의 노력에 의해 부인동동약은 파괴되는 상황을 겨우 면할 수 있었지만, 분쟁은 1839년(헌종 5)에 이르러야 겨우 일단락되었다. 이후 1854년(철종 5)에 이르러서도 다시 분쟁이 일어났다. 이때에는 대구부와 감영에서 동약의 계속적인 유지를 천명하는 완문(完文)을 작성함으로써 곧 일단락되었다.

부인동동약에 대한 분쟁은 부인동 내부의 여러 계층 간, 주위 이웃 동민, 수령을 중심으로 한 동임(洞任)·면임, 경상도의 유림과 감사(監司) 등 여러 집단 간의 이해관계에서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고 봉건적 신분제가 해체되어 가는 현실에서 부인동동약이 계속 유지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본래의 기능을 다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의의와 평가

부인동동약은 대부분의 동계·동약이 그 약조문(約條文)으로만 전해지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 구체적인 운영을 파악할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100여 년이 넘는 오랜 기간 실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층민의 저항으로 분쟁이 발생함으로써 이를 둘러싼 다양한 자료들도 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조선 후기의 동계·동약의 구체적인 운영 실태와 이를 둘러싼 신분 계층 간의 갈등과 대립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또한 부인동동약이 실시되던 시기에 작성된 『대구호적(大丘戶籍)』을 통해 동약의 운영에 참여하거나 갈등·대립하였던 인물들의 구체적인 존재 형태를 파악할 수 있다. 부인동동약은 조선 후기의 동계·동약이나 향약 등 향촌사회의 모습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참고문헌

『조선시대영남향약자료집성』(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6)
「18, 19세기 사족의 촌락지배와 그 해체과정: 대구 부인동동약의 분쟁을 중심으로」(정진영, 『조선후기향약연구』, 민음사, 1990)
「조선후기 향약의 일고찰: 부인동동약을 중심으로」(정진영, 『민족문화논총』2·3합집,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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