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암일록(溪巖日錄)』은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직강(直講), 사헌부 지평(持平)을 지낸 김영이 인조반정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와 향리인 예안현(禮安縣) 오천(烏川)에 은거하면서 쓴 일기이다. 원서의 제목은 『일록(日錄)』이며, 1603년(선조 36)부터 1641년(인조 19)까지의 개인 일기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계암(溪巖) 김영(金坽, 1577∼1641)이 40여 년간의 관직 생활과 은거 생활을 친필 기록한 일기로서, 후대에 자손들이 필사본 15책으로 정리하였다. 이를 1944년에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가 조사·수집하였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탈초·정서하였다가 1997년에 상하 2권의 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이 책은 저자 김영이 친필로 기록한 일기로서, 원서의 표제는 『일록』이다. 1603년(선조 36) 7월 1일부터 1641년(인조 19) 3월 12일까지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각 책의 규격은 대체로 24.0㎝×22∼24㎝이다. 원본인 초서본은 경상북도 안동의 김영탁(金永倬)씨가 소장하고 있는데, 그는 김영의 14세손이다.
책의 내용은 김영이 27세였던 1603년(선조 36)부터 1641년(인조 19)까지 자신의 가정생활, 사회생활, 관직생활, 학문생활 등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여기에는 가족의 출생과 결혼, 사망, 가정 행사와 의례, 학습 과정과 스승들과의 관계, 과거, 관직 생활, 피난 생활, 은거 생활, 교우 관계 등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의 많은 부분은 관혼상제와 같은 가정의례 및 친척과 사우(師友) 빈객들과의 교류와 접대 기사이다. 여기서 지방 사족(士族) 사회의 일상적인 교유(交遊) 모습들이 잘 나타나고 있다.
정치 기사는 비교적 적지만, 당시의 정국 추이 및 왜란·호란·반정(反正) 등의 전반적인 상황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비판의식을 보이고 있다. 특히 광해군 대 대북(大北) 정권의 횡포와 폐모 살제(廢母殺弟), 인조반정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지방사회의 동향, 지방관들의 가렴주구, 민생의 피폐, 향시(鄕試)의 폐단 등도 잘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는 중앙 정치 무대보다 지방 사족 사회의 여러 모습들이 잘 기록되어 있고, 관혼상제와 같은 가정의례와 빈객들과의 교류 모습 및 지방사회의 여러 동향, 지방관들의 가렴주구, 민생의 피폐, 향시(鄕試)의 폐단 등이 잘 기록되어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