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서울의 성균관과 지방 향교에는 학적을 둔 유생들의 명단을 기록한 유적(儒籍: 청금록(靑衿錄)이라고도 함)이 있었다. 여기에 기록된 인물 중에서 범죄나 비행을 저지른 사람들이 있을 경우, 학생 총회인 재회(齋會)에서 다수결로 유적 삭제를 결정하였다. 이는 법령에 있는 제도는 아니었으나, 16세기 이후 조선 양반 사회에서 관행적으로 굳어진 전통이 되었다. 유적에서 삭제되면 유생들은 과거를 볼 수 없었고, 고위 관리들도 현직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성균관의 유적에는 생원·진사들의 명단을 기록하였고, 향교의 유적에는 학생들 중 양반 출신인 동재(東齋)의 유생들만을 기록하였다. 여기에 기록된 인물(졸업생 포함)들 중에서 범죄나 비행을 저지른 사람이 있을 경우, 재임인 장의(掌議)가 발의하여 재회(齋會)에서 다수결로 유적의 삭제를 결정하였다. 이를 ‘삭적(削籍)’ 또는 ‘손삭(損削)’이라 하였다. 그 죄악이나 비행이 특히 중대할 경우에는 재회의 결정으로 유적의 당사자 이름에 황색 쪽지를 붙였는데, 이를 ‘부황(付黃)’이라 하였다.
유적의 삭제는 원칙적으로 유생들의 자율적 결정으로 이루어졌지만, 때로는 국왕이나 고관들의 지시나 종용으로 재회에서 결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유적에서 삭제되면 과거를 관장하는 사관(四館: 승문원, 교서관, 성균관, 예문관)에 통지되어 자동적으로 과거의 자격이 상실되고, 전국의 교육 기관에도 통지되어 다시 등록될 수 없도록 하였다. 그러나 비행이 사실이 아니거나 억울한 것으로 판명되거나 국왕의 특명이 있을 경우 재회의 결정으로 복적 될 수도 있었다.
유적의 삭제나 부황은 16세기부터 관행화되어 조선 말기까지 시행되었다. 조정에서는 이를 유생들의 자치에 맡겨두고 간섭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큰 물의가 야기될 경우에는 삭적과 부황을 주동한 유생들을 처벌하기도 하였다.
17세기 이후 당쟁이 격화된 이후에는 각 당에 가까운 장의와 유생들이 편을 나누어 상대방 유생들을 삭적하는 등으로 정치적 혼란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청금록의 삭제가 큰 문제로 비화한 사례로는 1610년(광해군 2)에 정인홍(鄭仁弘)이 차자를 올려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비판하자, 이목(李楘) 등의 유생들이 그를 삭적한 일이 있었다. 또 1650년(효종 1)에는 유직(柳㮨)이 상소하여 율곡 이이(李珥)가 불교에 빠졌던 일을 비판하자, 역시 청금록에서 삭적되고 부황까지 당한 일이 있었다.
유적의 삭제는 조선 양반 사회에서 도덕적 기풍을 확립하고 유생들의 자체적인 정화를 위하여 관행적으로 정착된 제도였다. 이 제도는 조선 사대부 사회에서 도덕적 규범을 강제하는 기능을 하였지만, 17세기 이후 당쟁이 격화되면서 각 당파 간 분쟁의 도구가 되기도 하여 정치적 물의를 일으킨 일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