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8년(숙종 14) 10월에 후궁 희빈 장씨(禧嬪張氏)가 아들을 낳자, 숙종은 극도로 기뻐하여 다음 해 1월 11일 그를 원자로 정하였다. 그러자 2월 1일 서인(西人)의 영수였던 송시열이 이를 부당한 처사로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격분한 숙종은 즉시 송시열과 서인들을 조정에서 축출하고 남인들을 등용하여 정국을 전환시켰다. 또 모든 화근이 서인 출신의 인현왕후에게 있다하여 왕비에서 폐하고 희빈을 왕비로 승격시켰다. 이를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고 하는데, 경종의 원자 정호 문제가 그 도화선이 되었다.
왕조 국가에서 원자(元子)는 국왕과 왕비 사이에 낳은 맏아들을 지칭하며, 그가 차기 왕위계승자인 세자(世子)에 책봉되었다. 그래서 세자를 원자로 지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궁 소생의 왕자는 맏아들이라도 원자로 부르지 못하였지만, 그가 세자에 책봉되면 역시 원자로 칭하였다. 조선 제19대 왕 숙종은 원비 인경왕후(仁敬王后),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와 2번이나 결혼하였으나, 20여 년간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1688년(숙종 14) 10월에 후궁 희빈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숙종은 극도로 기뻐하였고, 서인들은 불안에 젖게 되었다.
1689년(숙종 15) 1월 11일에 숙종은 후궁 소생 왕자의 호칭을 원자로 정하였다. 원자는 곧 차기 왕위계승자를 뜻하는 것이었으므로, 서인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2월 1일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이 이것은 시기상조이며, 인현왕후가 왕자를 출산할 경우 난처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상소하였다. 이에 격분한 숙종은 즉시 송시열과 서인들을 조정에서 축출하고 남인들을 대거 등용하여 정국을 변환시켰다. 또 모든 화근이 인현왕후(仁顯王后)에게 있다하여 왕비에서 폐하고 희빈을 왕비로 승격시켰다. 이를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고 하는데, 경종의 원자 정호 문제가 그 도화선이 된 것이다.
원자 정호 문제 때문에 일어난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고,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을 비롯한 많은 서인 관료들이 죽거나 유배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희빈 장씨가 왕비로 승격되었다. 이후 남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후궁 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호칭하는 것은 종법(宗法)의 원칙이나 조선왕조의 상규에 어긋난 일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송시열 등 서인들이 지나치게 강경하게 대응함으로써 잔혹한 기사환국이 일어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