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중일록(柵中日錄)』은 1619년(광해군 11) 강홍립의 종사관으로,후금과의 심하전쟁에 출정하였다가 패전하고 포로로 잡혀 있다가 1620년 7월에 귀환한 이민환이 『건주문견록(建州聞見錄)』과 함께 저술한 책이다. 출정부터 귀환까지 날짜순으로 거의 매일 기록한 종군 및 포로수용소 일기라고 할 수 있으나, 후에 재정리하여 편집한 흔적들이 보인다.
이민환(李民寏)은 1619년 2월, 명나라의 징병에 의해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후금(後金)에 출정하였다. 그러나 3월 4일 부차(富車) 들판에서 벌어진 심하전쟁(深河戰爭)에서 패전하여 포로가 되었다. 그는 1년 반 동안 포로수용소에서 고초를 겪은 뒤 1620년 7월에 풀려나 귀환하였으나, 패전 책임으로 장기간 탄핵을 받았다. 이 때문에 그는 서울에 오지 못하고 평안도에서 유랑하며 『책중일록』과 『건주문견록』을 저술하였다. 전자는 출정에서부터 귀환 때까지의 일기이며, 후자는 자신이 경험한 후금 지역의 정보 보고서 겸 군사 정책 건의서이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고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이 두 책을 조정에 올리려고 하였지만, 끝내 올리지 못하였다.
『책중일록』은 1권 분량(32장, 64면)의 책으로, 처음에는 필사본으로 전하다가 후에 그의 문집 『자암집(紫巖集)』이 간행되면서 제5권에 수록되었다. 이 책은 1619년(광해군 11)~1620년(광해군 12) 종군과 포로수용소에서 기록한 것을 귀국 후에 재정리 편집한 것으로 보인다. 별책의 『건주문견록』은 이 책의 부록과도 같은 성격을 갖는 것으로, 일종의 지리지(地理誌)와도 같다.
1618년(광해군 10)에 명나라는 후금을 치기 위해 대규모의 원정군을 일으키면서 조선에 1만 여명의 지원군을 징발하였다. 이에 조선은 도원수 강홍립, 부원수 김경서(金景瑞)를 비롯한 1만 3,000명의 군사를 출정시켜 2월 말에 평안도 창성에서 압록강을 건너 후금의 심하 지역으로 진격시켰다. 조선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그들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민환은 도원수의 종사관으로 이 전쟁에 종군하였다. 그들은 군량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고생 끝에 3월 2일 심하(深河)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들은 소규모의 후금군과 접전하여 손쉽게 적을 제압하고 적장 두 명을 참살했다. 그러나 3월 4일 명나라 군대의 뒤를 따라 부차(富車) 들판에 도착하자, 후금 기병의 습격을 받아 순식간에 무너졌다. 조선군은 좌영장 김응하(金應河)를 비롯하여 7,000여 명의 장졸이 도륙되고, 강홍립·이민환 등 5천여 명은 강화 끝에 포로로 잡혀 후금의 수도 노성(奴城, 허투알라)로 압송되었다. 여기서 그들은 민가에 구금되어 엄중하게 감시를 받았다.
그해 7월에 누르하치는 후금의 수도를 120리 서쪽에 있는 자편성(者片城)으로 옮겼고, 조선군 포로도 그곳으로 이송했다. 이민환 등은 자편성의 목책(木柵) 속에 구속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다. 『책중일록(柵中日錄)』이라는 서명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한동안 후금과 조선의 관계가 악화되어 이민환 등은 여러 차례 참살될 위협을 느끼기도 하였다. 1620년 5월에 조선과 후금의 강화가 진척되자, 7월 4일 조선 포로 몇 명의 귀환이 허용되었는데 이민환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들은 7월 11일 귀환 길에 올라 7월 17일 만포에 도착하여 마침내 조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619년 3월의 심하전쟁은 후금이 명의 대군을 격파하고 명청 교체의 전기를 잡은 살러후 전쟁의 동로 국지전이었다. 『책중일록』은 명·조선 연합군과 후금군 사이에 있었던 이 전쟁의 전후 과정을 가장 자세하게 기록한 역사 자료이다. 이 책은 조선군 도원수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였던 이민환 자신의 종군 및 포로수용소 일기이기 때문에 그 사료적 가치가 크다. 아울러 이 책의 부록 격인 『건주견문록』과 함께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의 정치·군사·경제에 관한 많은 정보들과 여진족의 생활 모습을 수록하고 있어 청나라 역사의 귀중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