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수경(水鏡). 아버지는 사역원 판관(司譯院判官) 홍만재(洪萬載)이며, 지중추부사 홍희남(洪喜男)의 증손이다. 그는 왜학(倭學: 일본어) 전공의 역관으로서 교회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일본어 수석 역관으로서 20여 년간 현업에 종사하였으며, 일본어 어휘집인 『왜어유해(倭語類解)』를 자술하여 왜학의 교과서로 사용하게 하였다.
홍순명은 1677년(숙종 3)에 출생하였고, 1705년(숙종 31) 왜학 전공으로 역과(譯科)에 급제하였다. 이후 왜학 교회(敎誨)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이 분야의 수석 역관으로서 20여 년간 현업에 종사하였으며, 최종 관품이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그는 일찍이 영조로부터 “그가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가상하다. 이제 또 이와 같은 사람을 얻어 일을 맡길 수 있겠는가!” 하는 칭찬을 받았다. 영조 때 좌의정을 지낸 조현명(趙顯命)이 그의 묘표(墓表)를 쓰면서 “그는 왜인의 정세에 익숙하여 남쪽 변방이 일이 생기면 반드시 그에게 물어 결정하였다.”고 하였고, 또 “효우(孝友)의 행실이 있고 선하지 않은 것을 보면 자기가 더렵혀지는 듯 여겼으며, 재물을 경시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역관이면서도 선비 군자와 같았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 일본과의 외교를 중계하던 대마도주(對馬島主)의 가신 중에 예전부터 관례적으로 재신(宰臣)이라고 칭하면서 독자적인 외교 문서를 행사하는 자가 있었다. 1701년(숙종 27) 조정의 명으로 대마도에 파견된 홍순명은 그를 책망하고 타일러 그의 독자적인 외교 문서 행사를 중지하게 하였다. 1709년(숙종 35)에는 조정에 건의하여 부산의 초량 왜관(倭館) 주위에 있는 민가를 철거하고 성을 쌓아 왜인들과 조선인의 접촉을 금하였다. 이후로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사고들이 없어지게 되었다.
일찍이 일본 에도시대의 유학자이며 조선방좌역(朝鮮方佐役)인 아메노모리 호슈[우삼방주(雨森芳洲)]와 교류하면서 난해한 왜어를 자세히 자문하였다. 그것을 바탕으로 그는 『장어(長語)』『유해(類解)』 등의 일본어 어휘집을 편찬하여 왜학 교육의 교과서로 사용하였다. 현전하는 『왜어유해』가 그의 『유해』로 간주되고 있으며, 간행된 시기는 1789년(정조 13) 이전으로 추측되고 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에는 많은 어휘 「음식(飮食)」, 「화곡(禾穀)」, 「소채(蔬菜)」, 「기구(器具)」, 「비금(飛禽)」, 「곤충(昆蟲)」과 같이 분류되어 수록되어 있다. 각 항목의 표제어는 한자로 쓰고, 그 아래에 각주 형식으로 우리말과 일본어 발음을 한글로 표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