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기독교는 한반도 전역에 걸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당시 정계의 3영수라 불린 이승만 · 김구 · 김규식은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전국적인 조직과 인력을 기반으로 하여 기독교는 건국의 주요 변수로 떠올랐다. 그런데 남북 분할 점령으로 말미암아 38선 이북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다. 즉 소련의 후원을 받는 김일성이 정권을 장악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 중의 하나가 바로 기독교 세력이었다. 기독교의 신학이 공산주의를 강하게 반대할 뿐만이 아니라 또한 북한 지역 자본가들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이었다. 게다가 기독교도들은 오히려 38선 이남을 점령한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
1946년 9월 5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북한 체제에 합법성을 부여하기 위한 계획서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선거를 통해 당시 존재하던 임시인민위원회를 항구적 인민위원회로 발전시키는 것이었는데, 이는 북한 정부 수립을 위한 과정의 마지막 단계였다. 이는 해방 이후 이루어진 첫 선거로서 당시 38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 군정과 임시인민위원회가 야심차게 추진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선거일은 11월 3일 일요일이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주일성수(主日聖守)란, 구약 주1의 안식일 개념을 현대의 일요일에 적용한 것으로, 그 날을 철저히 예배와 교회 봉사 그리고 휴식에만 사용하도록 하는 강력한 지침이자 문화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북한의 장로교를 대표했던 이북오도연합노회는 10월 20일 주일선거 문제에 대한 5개항의 결의문을 북한 당국에 통고하였다. 주일성수를 이유로 정치적 저항에 나섰던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에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은 장로교와 감리교의 유력한 목사 10여 명을 불러 인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것을 반대하는 행위를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이북오도연합노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주일설교를 통해 선거 불참 주장과 김일성에 대해 비판을 계속 이어갔다. 일부 교회들은 11월 4일 월요일 새벽 1시에 투표를 하게 해달라고 건의하였고, 주2의 기독교도들은 새벽 0시 5분에 투표하겠다고 선언을 하는 일도 있었다. 평원교회 이진호 목사는 이북오도연합노회의 주일선거를 반대하는 회의에 참석했다가 돌아온 후 주일선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20일간 감옥에 구류되었다. 그 밖에도 몇몇 교회의 성도들은 선거 당일날 교회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기독교인들 전체가 선거에 불참한 것은 아니었고, 어떤 목회자는 주일 주3를 마치고 신도들을 이끌고 투표장으로 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소련군정과 김일성이 계획했던 선거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이북오도연합노회의 주일선거 반대사건은 북한 당국으로 하여금 친정부적인 교회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였고, 이에 선거 직후 김일성은 강양욱에게 새로운 기독교 조직의 결성을 요청했다. 그 결과 1946년 11월 28일 평양에서 북조선기독교도련맹(조선그리스도교도연맹의 전신)이 조직되었다. 이로써 북한의 교회들은 친정부적인 교회와 반정부적인 교회로 갈라졌다. 북한 지역에서 생존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은 북조선기독교도련맹에 가입하지 않을 수 없었고, 1947년 여름까지 북한 기독교인의 3분의 1정도가 여기에 가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북한 지역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후 6·25전쟁 중에 대거 월남하였다.
일제 말기 주4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북한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은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감옥에서 죽기까지 하면서 우상 숭배를 거부하였다. 하지만 해방 후 소련군이 진주하고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된 북한 지역에서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양립할 수 없는 위치가 되었다. 주일선거 반대사건은 1946년 북한 지역의 기독교인들이 일요일에 실시된 선거에 대해 신앙의 자유를 주장했던 것으로, 이때까지만 해도 북한 지역 기독교인들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북조선기독교도련맹을 결성하여 기독교인들을 대거 가입시켰고, 결국 북한 지역에서 교회와 기독교인의 입지는 좁아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