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24일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하게 되자 북한교회는 위기를 느꼈지만, 소련 군정과 김일성은 공식적으로는 신앙의 자유를 보장했다. 해방 전까지 북한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친미·반공적 태도를 갖고 있었으며, 많은 교인들이 북한의 사회주의 혁명 가운데 청산의 대상이 되었다.
해방 이후 북한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교회 지도자들이 정치단체와 정당을 결성하자,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한때 기독교계와 통일전선을 펼치기도 했지만, 신탁통치 문제가 불거지면서 교회 지도자들이 대거 월남하게 되자 통일전선적 성격은 사라지게 되었다.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위원장은 김일성, 서기장은 장로교 목사이며 김일성의 외종조부인 강양욱(姜良煜)이 맡았다. 1946년 2월 21일 서문밖교회에서 북한 지역 교회들이 모여 3·1절 기념예배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교회의 기념예배를 금지하고 기념행사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서 주관하고자 했다. 이에 교회가 반발하자 북한 정권은 2월 26일 평양 시내 교역자 60여 명을 검거하였다. 교회는 예정대로 3월 1일 장대현교회에서 수천 명 이상의 신도가 모여 3·1운동 기념예배를 강행하였고, 이 예배 중에 설교자가 체포되었지만 참석자들은 소련군 사령부를 향해 항의행진을 했다. 이처럼 북한 지역의 교회는 공산체제에 대한 반체제적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또한 인민위원회 선거일이 1946년 11월 3일 일요일로 정해지면서 북한 정권과 교회의 집단적인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946년 9월 5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에 대한 법령을 공포하고 두 달 후인 11월 3일 일요일을 인민위원 선거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동년 10월 20일 장로교의 5도연합노회는 주일 선거 문제에 대한 5개항의 결의문을 북한 당국에 통고하였다.
결의문의 내용에는 일요일에 행하는 선거에 참여할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가 표명되어 있었으며, 정계에 종사하는 교역자는 교직을 그만두도록 하는 것도 있었다. 당시 연합노회는 이 결의문을 발표함과 동시에 교인들에게 북한 정권은 ‘마귀’이며 선거용지는 ‘마귀표’라고 주지시켰다고 한다. 이에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은 장로교와 감리교의 유력한 목사 10여 명을 불러, 인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것을 반대하는 행위를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이와 같은 사실로 주일 선거에 대해 북한 지역 교회들의 반발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11월 3일 총선거에 반대하는 사람들 특히 평안남·북도의 많은 교인들은 하루 종일 교회 밖에 나오지 않았다. 당시 기독교인들 전체가 선거에 불참한 것은 아니었고, 어떤 목회자는 주일예배를 마치고 신도들을 이끌고 투표장으로 가기도 했다. 이것은 북한교회의 주류가 반체제적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지만, 한편에서는 친정부적 세력이 형성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5도연합노회의 주일 선거 반대 사건은 북한 당국으로 하여금 친정부적인 교회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였고, 이에 선거 직후 김일성은 강양욱에게 새로운 기독교 조직의 결성을 요청했다. 그 결과 1946년 11월 28일 평양에서 북조선기독교도련맹(조선기독교도연맹의 전신)이 조직되었다. 이로써 북한의 교회들은 친정부적인 교회와 반정부적인 교회로 양분되었다. 북한 지역에서 생존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은 북조선기독교도련맹에 가입하지 않을 수 없었고, 1947년 여름까지 북한 개신교인의 3분의 1 정도가 여기에 가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북한 지역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후 한국전쟁 중에 대거 월남하였다.
일제 말기 신사참배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북한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은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감옥에서 ‘순교’당하면서까지 우상숭배를 거부하였다. 하지만 해방 후 소련군이 진주하고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된 북한 지역에서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양립할 수 없는 위치가 되었다. 주일 선거 반대 사건은 1946년 북한 지역의 기독교인들이 일요일에 실시된 선거에 대해 신앙의 자유를 주장했던 것으로, 이때까지만 해도 북한 지역 기독교인들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북조선기독교도련맹을 결성하여 기독교인들을 대거 가입시켰고, 결국 북한 지역에서 교회와 기독교인의 입지는 좁아졌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기독교인들은 대거 월남하였다. 이후 북한 지역에서 교회는 자취를 감추었고, 가정교회의 형태로 잔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