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1년(철종 12)에 문청공(文淸公) 남효온(南孝溫, 1454∼1492)·남진(南振)·남용익(南龍翼, 1628∼1692) 등을 제향하기 위해 의령남씨(宜寧南氏) 후손들이 세운 서원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으며, 해방 이후 구허(舊墟)에 복원하여 의양서당(宜陽書堂)이라 하였다.
1861년에 창건하였는데, 신석우(申錫愚, 1805∼1865)의 의양서원 봉안문(奉安文)과 상향축문(常享祝文)을 보면 남효온과 그의 재종질(再從姪)인 남진, 방계 후손인 남용익 등 세 분을 제향하였다. 그러나 1868년에 서원이 훼철되자 이를 애석하게 여긴 후손과 유림들이 이산(尼山) 남정찬(南廷瓚, 1850∼1900)을 중심으로 뜻을 모아 1894년(고종 31)에 남씨 종중의 재실인 경모재(敬慕齋)를 건립하였다.
그 뒤 1930년과 1931년 사이에 의양서원의 복원이 유림과 남진의 후손인 이천(夷川) 남창희(南昌熙, 1875∼1945)를 비롯한 많은 인사들의 공론을 형성하였지만 성사되지 못하였다. 해방 이후 남창희의 아우 남기희(南箕熙)를 비롯한 문중의 의논에 따라 의양서원 옛 터에 건물을 세우고 의양서당이라 명명하였다. 현재 향사는 지내지 않고 있다.
서원의 주향(主享)은 남효온으로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1513년 소릉 복위가 실현되자 신원되어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1782년(정조 6)에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세상에서는 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김시습(金時習)·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 등과 함께 생육신으로 불렀다.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 장흥의 예양서원(汭陽書院),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의령의 향사(鄕祠) 등에 제향되었다.
남진은 자가 성유(盛由), 호는 추계(秋溪)이다. 음관으로 선략장군이다. 재종숙 남효온에게 글을 배웠으며 도학과 청검으로 이름났다. 갑자사화 때 삼가 두심동으로 낙향하여 세상을 마쳤다.
남용익은 자가 운경(雲卿), 호는 호곡(壺谷)이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에 뛰어났으며, 효종·현종·숙종대에 걸쳐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문명을 날렸지만 늘 근신하고 근면하였다. 1689년 소의장씨(昭儀張氏)가 왕자를 낳아 숙종이 그를 원자로 삼으려 하자, 여기에 극언으로 반대하다가 명천으로 유배되어 3년 뒤 그곳에서 죽었다.
조선 후기 대대적인 서원 철폐령 이후 각 문중별로 사회·경제적 여건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서원들이 복설되었는데, 의양서원은 서당으로 변화된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