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천서원 ()

유적
대구광역시 수성구에 있는 조선후기 양희지를 제향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
이칭
이칭
오천리사(梧川里社), 오천사(梧川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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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에 있는 조선후기 양희지를 제향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
개설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에 따르면, 오천서원(梧川書院)은 조선 중기의 문신 양희지(楊熙止, 1439∼1504)를 제향하기 위해 1786년(정조 10)에 달성의 오천에 건립된 리사(里社)에서 출발하였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05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면서 당호를 무릉재라고 하였다. 1971년 유림총회의 의결로 사당을 신축하여 오천사(梧川祠)라 하고 당호도 오천서원으로 바꾸었다. 현재 매년 음력 3월 16일에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내용

양희지는 본관이 중화(中和), 자는 가행(可行), 호는 대봉(大峰)이다. 1474년(성종 5)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 충청도관찰사, 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대봉집(大峯集)』이 있다.

서원은 좌측으로 외삼문, 강당, 서재가 일곽을 이루고 있으며 강당 우측에 제향공간인 사당이 한단 높게 토장(土墻)으로 둘러싸여 일곽을 이루고 있다. 사당인 오천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전퇴(前退)가 없는 홑처마 맞배지붕의 3량 가구 건물이며, 사당 뒤편에는 양희지를 추모하는 비석 5기가 세워져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로 가운데에 2칸 마루를 두고 좌우에 방을 배치한 전형적인 강당 형식을 취하고 있다. 건물 앞쪽과 마루 뒤쪽에 퇴를 두었고 우측 온돌방은 마루와 4분합 들문을 두어 공간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 좌측 온돌방은 우측과 달리 쌍여닫이문을 설치하고 마루 앞쪽에 4분합 들문을 설치하여 폐쇄된 마루를 구성한 점은 남부지역 강당평면에서 보기 드문 사례이다.

경인년(庚寅年)에 강당과 서재를 다시 전통양식으로 중건하였다. 서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이다. 지붕의 경우 전통토기와 전통도리양식이다. 평면배치는 가운데 주칸에 마루를 설치하고, 양 끝에 방을 두었다.

서원에는 양희지 사후 1507년(중종 2)에 중종대왕이 내린 사제문(賜祭文)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또한 1786년 오천리사(梧川里社)에 양희지의 위패를 봉안할 때 봉안문은 이헌경(李獻慶), 축문은 안정복(安鼎福)이 지었으며 모두 『대봉집』에 수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중화양씨 문중 서원으로 조선시대 사우로 존재하다가 훼철된 이후 현대에 와서 서원으로 승격된 전형적인 사례이다.

참고문헌

『교남지(嶠南誌)』
『대봉집(大峯集)』
『순암집(順菴集)』
『경북서원지』(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실, 경상북도, 2007)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people.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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