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토지공사에서 택지개발사업을 진행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 경기역사문화유산원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유적은 발안천의 서쪽 충적대지에 분포한다. 화성발안리유적에서는 초기철기시대 목관묘 2기, 원삼국~삼국시대의 주거지 59기, 수혈(竪穴) 250기, 구(溝) 72기, 옹관묘 4기, 시기를 알 수 없는 굴립주(掘立柱) 39기, 야외 노지(爐址) 4기, 노적(爐跡) 7기 등이 조사되었다.
원삼국시대의 주거지는 22기이다. 중도식무문토기 외반구연옹이 표지적인 유물이다. 기본적인 형태는 평면이 장방형인 철자형(凸字形)주거지이며, 주축은 북서-남동향이 많다. 내부에는 취사, 난방, 조명을 위한 부뚜막과 노지, 쪽구들이 다양한 형태로 설치되었고 굴뚝과 외부로 향하는 출입구가 있다. 부뚜막과 연동된 쪽구들 시설과 노지가 같이 설치되는 것이 특징이다. 중도식무문토기만 출토되는 주거지에서는 노지만 설치되었는데 이것을 통해 노지만 설치되다가 노지와 부뚜막이 동시에 설치되는 것으로 변화한 것을 알 수 있다.
발안리유적의 부뚜막부 쪽구들은 동장벽에 위치한 부뚜막에서 동장벽을 따라 동남 모서리까지 연결되는 것이 전형적인 형태이다. 쪽구들은 대부분 점토를 이용해 만들었지만 17호 주거지와 같이 기본 골격을 판석을 이용하기도 했다. 부뚜막 내에서는 취사용으로 이용된 완형의 토기 외에도 복원되지 않는 토기편이 많이 확인되는데 부뚜막 측벽과 쪽구들 축조재료 즉 점토내부의 골조로 이용되었거나 솥걸이부분 조성용도, 쪽구들에서 확인된 벽체 보수용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래를 축조할 때는 투수와 습기 등의 영향을 고려하여 원래의 수혈 벽면에서 조금 떨어져 설치하였다. 고래와 수혈 벽면의 사이에는 기둥이 설치되고 점토로 고착화하였다고 한다.
삼국시대(백제) 주거지는 37기이다. 출토유물에서 중도식무문토기가 확인되지 않고, 장란형토기(長卵形土器)가 조리용기로 사용되며 심발형토기(深鉢形土器)나 완, 호, 병 등이 출토되는 점이 원삼국시대 주거지와 차이점이다. 또 원삼국시대 주거지에서 출토되는 철도자 이외에도 철촉, 주조철부, 철겸 등 다양한 철기가 출토된다. 평면형태는 철자형주거지도 확인되지만 전형적인 형태는 장방형과 방형이다. 주축방향은 남-북향이 많다. 기둥구조는 4주식이다. 부뚜막이 설치되었으며 수혈벽을 따라 벽주혈이 설치되기도 한다. 대부분 저장공이 있는 것이 원삼국시대 주거지와 차이점이다.
6기의 무덤 중 초기철기시대 무덤 2기는 목관묘이다. 목관은 잔존하지 않지만 토층상태로 볼 때 통나무관을 사용했던 것 같다. 흑도장경호, 원형점토대토기, 철도자가 출토되었다.
원삼국~삼국시대의 옹관묘 4기는 모두 토기 2점을 맞붙인 이음식이다. 1호 옹관묘는 중도식무문토기 옹 2점과 저부 1점, 타날문단경호 1점 등 모두 4점이 출토되었는데 2점은 매장주체부로 이용되었고 2점은 부장품일 가능성이 있다.
수혈유구는 평면형태가 원형, 장방형, 부정형 등 다양하다. 199호 수혈은 직경이 15m에 이를 정도로 대형인데 연못 혹은 중앙부에 무대를 둔 원형의 관람시설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그 외 저장시설로 추정되는 것도 있으며 일부는 주거시설일 가능성도 있다.
구상유구(溝狀遺構)는 마을의 내부를 동-서, 남-북으로 구획하는 듯한 구조이다. 주거의 부속시설, 마을의 배수시설, 의례와 관련된 시설로 추정된다.
굴립주는 1×1칸, 2×1칸, 2×2칸 등 다양하다. 이런 형태는 상면(床面)이 지면에서 뜬 형태도 있고, 9호・19호・22호 굴립주와 같이 상면이 지표면인 지상식건물도 있다. 창고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화성발안리유적에서 조사된 주거지는 원삼국시대에서 삼국시대로 주거형태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또한 백제 중앙부의 풍납토성이나 미사리유적과 비교되는 백제 지방의 마을양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