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수전투는 삼국시대 평양성 인근 사수에서 662년 고구려군과 당 수군 사이에서, 그리고 668년 고구려군과 나당연합군 사이에서 벌어진 2차례 전투이다. 660년 나당동맹을 통해 백제를 멸망시킨 당은 661년 수군과 육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사수에서 당 수군을 물리쳤다. 668년 나당연합군이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사수에서 마지막 방어전이 전개되었다. 1차전과는 달리 연남건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패배하고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사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청천강과 대동강, 합장강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나당동맹군이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공격하며 발생한 2차례의 전투로써 고구려의 국운이 걸린 전투였다.
660년 나당동맹을 통해 백제를 멸망시킨 당은 661년 수군과 육군을 동원해 대대적인 고구려 침략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당 수군은 평양 직공책을 통해 평양성을 포위함으로써 고구려 지휘부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더구나 당 육군 주력이 압록강을 지키던 고구려군의 저지선을 뚫고 평양성으로 진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 육군이 갑자기 일어난 철륵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철수하자,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던 당 수군은 사기가 저하되고 설상가상으로 군량 부족과 추위에 시달리며 해를 넘긴다. 신라가 이들에게 어렵게 군량을 전해주자 당군은 철수 준비를 하는데, 이때 사수전투가 일어났다.
『신당서』 동이 고려전을 보면, “방효태가 영남병과 함께 사수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연)개소문이 그들을 공격하여 전군을 몰살시켰다. 정방이 포위를 풀고 귀국했다.”라고 한다. 같은 사건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좀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좌효위장군백주자사 옥저도총관 방효태가 개소문과 더불어 사수에서 싸워 전군이 죽고, 그 아들 13인과 더불어 모두 전사하였다. 소정방이 평양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큰 눈을 만나 풀고 물러났다. 무릇 전후의 원정이 모두 큰 공없이 끝났다.”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661년 평양성을 포위하며 기세등등했던 당에게 사수전의 패배는 큰 아픔이었다. 반면 사수전에서 압도적 승리를 이끈 연개소문의 명성은 더욱 확고해졌다. 사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음상사에 따라 살수(薩水)나 타수(陀水)로 여겨 청천강에 비정하거나 웅초산(熊草山)에서 흘러 패수로 합류하는 다하(茶河) 또는 대동강, 합장강에 비정하는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668년 나당은 고구려를 재침하였는데, 고구려는 왕권의 무력과 지배층의 분열 그리고 이에 따른 민심이반이 심하여 효과적인 대응이 불가했다. 이에 나당군은 큰 어려움없이 평양성의 동쪽 대성산 기슭까지 진격했다. 이에 대당항쟁을 주도하던 연남건이 군사를 내어 일전을 펼친다. 『삼국사기』에 실린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를 살펴보자. “이때 번한(蕃漢)의 군사들이 사수에 총집결하자, 남건이 군사를 내어 일전을 결하려 하였다. 신라의 병마가 홀로 선봉이 되어 먼저 대진(大陣)을 파하니, 평양성 병사들의 칼끝 날카로움이 꺾이고 기운이 줄었다. 후에 영공이 다시 신라의 날쌘 기병 500인을 이끌고 먼저 성문에 쳐들어가, 드디어 평양을 격파하여 큰 공을 이루었다.”라고 한다. 곧 668년 나당군의 평양성 공격이 시작되기 직전 고구려 지휘부가 마지막으로 방어전을 치른 곳이 사수였다.
그런데 668년 신라군이 북진하며 사천지원(蛇川之原)에서 고구려군을 대파한 전투가 있었다. 『삼국사기』의 관련 기사(문무왕 8년 7월 16일)를 보면, “왕이 한성주에 가서 여러 총관들에게 하교하여 (당)군과 만나게 하였다. 문정 등이 사천지원(蛇川之原)에서 고구려군과 만나 싸워 그들을 대파하였다.”라고 한다. 이 전투가 벌어진 사천을 음상사로 인해 평양성 인근에서 벌어진 사수전투와 동일시하거나, 사천원이 하천[사천]과 들[원]이 결합되었다는 지리적 특색과 신라군의 북진로를 감안해 서흥강과 배후의 봉산 사리원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고구려 말기인 662년과 668년 평양성 인근 사수에서 2차례의 전투가 있었다. 662년의 사수전의 경우 연개소문이 지휘하는 고구려군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며 당의 고구려 정복 야욕을 좌절시켰다. 그러나 668년의 사수전은 연남건의 고구려군이 패배하고 직후 평양성이 함락됨으로써 국가가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