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대야성은 합천군 합천읍에 있는 해발 90m의 취적산 쌍봉의 정상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자리한다. 5세기 말~6세기 초에 초축되고, 6~7세기에 증축된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이다.
대야성의 평면 형태는 해발 50∼60m의 능선을 기준으로 자연 지세에 따라 북서-남동 방향으로 길게 부정형으로 축조되었다. 서쪽은 황강에 연해 있는 급경사 단애지역으로 자연성벽을 이루고 있고, 남·동·북쪽으로는 능선을 따라 성벽이 축조되었다. 성의 둘레는 인접한 충혼탑 구역까지 2,000m 내외로 추정된다. 성의 북쪽을 제외한 삼면으로는 황강이 흐르고 있어 자연적인 해자를 이루고 있으며, 남서쪽으로는 천연단애절벽이 형성되어 있어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데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또한 성내 정상부에서는 고령·대구 방면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삼가·진주 방면 도로, 대병·거창 방면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동쪽으로는 황강을 따라 초계방면을 조망할 수 있다. 1993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대야성이 위치한 합천읍은 시굴조사에서 출토된 무문토기편과 수혈유구 등을 통해서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인간의 생활터전이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삼국시대에는 대가야의 세력범위에 포함되었지만, 562년에 멸망된 이후에는 신라가 565년 이 지역에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하였다. 특히 642년에 백제의 침입으로 대야성이 함락되고 성주(城主) 김품석(金品釋)이 그 처자와 함께 죽음을 맞으면서 백제에게 빼앗겼다.
대야성이 다시 등장하게 된 시기는 신라 후기로, 후백제 견훤(甄萱)과 고려 왕건(王建)의 치열한 다툼이 일어나면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927년 후백제가 차지하고 있었던 대야성을 고려가 함락시키고 파괴한 이후 군사거점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면서 이때 완전히 폐성(廢城)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야성은 2003년, 2004년, 2009년에 3차에 걸친 시굴조사를 실시하여 체성(體城) 및 부대시설, 추정 문지(門址), 건물지, 고분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대야성의 체성부는 대부분 훼손되어 성벽의 축조수법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다만 동쪽과 남쪽에 양호하게 남은 성벽이 일부 있고, 동북쪽은 대부분 붕괴되어 잔존 1~2단의 기단석이 남아 있다. 체성부의 잔존 높이는 1.5m 내외, 폭은 2.5m 내외이다.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체성부의 높이를 추정하면 약 4m 정도이다.
시굴조사 결과 문지와 배수시설로 추정되는 석축시설이 확인되었고, 체성부의 경우는 기단부만 1∼2단 정도 남아 있으며 내벽 쪽으로 70㎝ 내외로 적석되었다. 배수시설은 주먹크기의 할석과 자갈이 깔려 있으며, 그 주변에 건물지로 추정되는 석열이 확인되었다. 또한 성 내부에서는 용도미상의 적석군과 주거지, 수혈들이 조사되었다. 건물지는 서쪽 구릉 8~9부 능선상의 평탄면에서 확인되었는데, 기단석축이나 배수로 및 소토의 흔적 등으로 미루어 성내 군사들의 주둔과 관계되는 시설로 판단된다. 또한 고분군은 체성부 외부 해발 60~70m 선상에서 확인되었으며, 수혈식석곽묘와 횡구식석실묘로 이루어졌다.
합천대야성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던 군사적인 요충지였다. 신라의 서남쪽 방어와 대백제 공격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신라·가야·백제의 낙동강유역을 사이에 둔 공방과 당시 사회상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