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팔용(崔八鏞)
송계백(宋繼白)·백관수(白寬洙)·김철수(金喆壽)·이광수(李光洙)·최근우(崔謹愚)·김도연(金度演)·윤창석(尹昌錫)·김상덕(金尙德)·이종근(李琮根)·서춘(徐椿) 등이 대표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은 이광수가 작성하되, 최팔용이 대표가 되어 영어와 일본어로 번역, 일본 조야와 외국 공관에 보내기로 하였다. 또한 이 운동을 국내에까지 파급시키기 위해 송계백을 국내로 보냈고, 거사를 하루 앞둔 2월 7일 저녁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유학생학우회총회라는 명목으로 400여 명의 남녀 유학생들이 동경 기독교청년회관에 모였다. 동경 경시청에서도 이미 눈치를 채고 정·사복 경찰을 그 곳에 파견하였다. 식이 진행되어 회장이 개회선언을 한 뒤 연단에 올라가 조선청년독립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