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성은 가야산의 정상인 해발 1,433m의 칠불봉 동남쪽으로 형성되어 있는 용기계곡(또는 백운리계곡)을 중심으로 좌우의 항아덤과 동성봉 능선을 따라 축성된 포곡식산성이다. 가야산성의 서쪽은 성주군과 합천군의 경계에 위치하고, 동쪽은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일대에 자리하고 있다. 성의 둘레는 7,156m이고 대부분의 성벽은 무너져 약간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일부에는 높이 1.5m 내외의 성벽이 남아있는 곳도 있으며, 면적은 2,059,939㎡이다. 성 안에는 10개의 샘[泉]과 6개의 계곡 및 동서남북의 4대 문지(門址)의 흔적이 남아 있고, 용기사지(龍起寺址) · 백운암지(白雲庵址) · 일요암지(日曜庵址) 등의 절터가 있다. 성 안에 용기사가 있었기 때문에 용기성(龍起城)이라고도 한다. 2003년에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가야산성이 초축된 시기는 기록이 없어 자세하게 알 수 없지만, 대가야(大加耶)의 전성기 때 쌓은 것으로 추측하고, 대가야의 이궁(離宮)으로 이용하였을 가능성도 상정하고 있다. 562년(진흥왕 23)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된 이후 가야산성은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인 1594년(선조 27)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조정의 명을 받아 승장(僧將) 신열(信悅)을 시켜 개축하여 인근 백성들의 피난처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이때 신열이 성의 남문을 건립하였는데, 후에 이항복(李恒福)이 문루(門樓)에 ‘액부초(扼拊醮)’라는 현판을 만들어 붙였지만 지금은 없어졌다.
가야산성은 2000년에 지표조사가 실시되어 성벽을 포함하여 문지, 암문(暗門), 장대지(將臺址) 등이 확인되었다. 가야산성의 조사에서 추정 4대 문지를 확인하였지만, 문지의 형태나 문루의 유무를 알 수 있는 석재나 기와편이 발견되지 않아 당시의 성문 형태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 중에서도 남문지(南門址)는 규모와 위치로 미루어 가야산성의 주 출입구로 사용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으며, 동문지(東門址)의 안쪽에는 평탄한 대지가 마련되어 있어 당시 주둔병의 건물지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 함께 암문 6개소, 치(雉) 9개소, 추정 망루지(望樓址) 2개소, 장대지 2개소가 확인되었다. 또한 샘은 산성의 각종 건물지에 부속된 7기와 우물 1개소가 확인되었으며, 건물지는 사지(寺址) 1개소, 암자(庵子)터 2개소를 포함하여 모두 7개소 정도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문지 주위의 평탄한 대지와 기와편 채집지역을 포함하면 실제적으로는 더 많은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야산성 주변의 전반적인 지형은 상왕봉과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해발 1,000m 이상의 산봉우리로 인하여 산세가 험준하고 암석이 노출된 급경사지가 많다. 가야산성의 성벽은 용기계곡을 둘러싸고 있는 능선을 따라 축성하였기 때문에 자연지형을 적절히 응용하면서 축조하였다.
가야산성 성벽의 축조방법은 자연석을 이용한 협축법이 대부분이며, 일부 구간에서는 솟아오른 자연 암괴를 이용하여 암괴와 암괴 사이에만 성돌을 쌓았고, 경사가 급한 구간은 자연 절벽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대가야는 가야산에서 발원한 지맥을 따라 가야산성-노고산성-예리산성-운라산성-본관리 옥산성 등으로 북쪽의 산성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따라서 가야산성은 성주-운수-고령읍으로 이어지는 대가야 도성 북쪽의 대가천 방면 방어망에서 전초성의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또한 가야산성 주변의 여러 봉우리 곳곳에 작은 규모의 테뫼식산성들이 보조적 구실을 하였던 흔적이 있어 성곽의 방어기능을 연구하는데 중요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