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1책. 필사본.
이 책은 작자가 초년에 지은 시 중에서 아음(雅音)에 가까운 작품을 뽑아, 연경에 가는 이덕무(李德懋)에게 청나라의 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均) 등의 서문과 평설(評說)을 받아오게 한 뒤에 1778년(정조 2)에 재편집한 시집이다.
권두에 자서(自序)와 이조원·반정균·축덕린(祝德麟)의 서가 있고, 이어 4권의 시집이 있다. 권1에 51제(題), 권2에 54제, 권3에 37제, 권4에 48제가 각각 실려 있다.
권말에는 이정원(李鼎元)의 「제강산시집후(題薑山詩集後)」와 심심순(深心淳)의 「집중명구여이채입포준시화인제(集中名句余已采入匏尊詩話因題)」가 각기 오언율시·칠언절구의 형태로 붙어 있다
이서구는 「자서」에서 이 책에 실린 작품이 대부분 현실과 유리된 산수자연에 대한 흥취와 일찍이 고아가 된 자신의 고독함을 달래기 위해 쓴 것임을 말하였다. 이 작품들은 수년의 습작기간에 쓰여진 작품들이다. 그러므로 현실경험과 능숙한 시법의 구사에서 나온 노숙한 품격보다는 생기발랄하고 꾸밈없는 순수성이 시 전편에 스며있다.
이조원은 이서구의 시를 이책 「서」에서 “수식을 일삼지 않고 정의 올바름을 얻었다(不事琱琢而得乎情之正).”고 평하였다. 이조원이 이서구의 시를 사랑하였던 까닭은 이서구의 순수한 시작정신에 연유한 것이다. 이서구의 시는 이서구가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불리어지면서 1776년 막관(幕官)인 유금(柳琴)에 의하여 편집된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을 통해서 중국에 최초로 소개되었다.
『한객건연집』에 소개된 『강산초집』은 이덕무에 의하여 1776년에 개별적으로 청나라 명사들에게 소개된 것이다. 1777에 다시 펴낸 『강산초집』은 작품의 분량이 많고, 여러 사람의 서문과 평설이 보태졌다. 권3 말미의 몇 편과 권4의 이조원·반정균·축덕린 등의 시에서 차화(次和)했거나 기회(崎懷)한 시들과 축덕린의 평어(評語)는 『한객건연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권두에 있는 축덕린의 「논운학서(論韻學序)」는 중국인으로서 한국한시에 대한 음운론적 입장을 나타내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강산초집』에 수록된 작품들의 각 편 구말(句末)에 붙은 자주(自註)와 평어는 18세기 말엽의 우리 한시의 현황을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강산초집』은 서울대학교 고서본과 규장각도서에 전하고 있다. 규장각도서는 표제에 ‘석모산인미정초(席帽山人未定草)’로, 고서본은 ‘강산시집(薑山詩集)’으로 되어 있으나, 내면에는 모두 ‘강산초집’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