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경상남도 진주 출생.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되었으며, 1921년에도 사회주의운동에 관계하여 체포되어 재류금지처분(在留禁止處分)을 받았다.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1923년에는 만주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27년 9월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관련하여 간도에서 체포되었다.
1933년 이후에는 중국 난징(南京) 등지에서 민족통일전선 결성에 주력하다가 1935년 7월의열단·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 등을 집결하여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을 창당하였으며, 민족통일전선이 형성되자 거기에 참여하였다.
또한, 1943년 충칭(重慶)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연합내각을 결성하고 민족통일전선 노선에 합류하자 대한민국임시의정원에 의원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 후인 1946년 5월 귀국하였으며, 당시 미소공동위원회와 함께 추진되던 좌우합작위원회가 우익측의 8원칙과 좌익측의 5원칙으로 합작원칙을 두고 교착상태에 빠지자, 9월 온건한 좌익대표로 교체된 좌우합작위원회 준비회담에 참여하여 절충안으로서 좌우합작 7원칙의 성안에 힘써 민족통일전선 형성노선을 지속하였다.
1946년 11월에는 황한철(黃漢喆)·이지탁(李智鐸) 등과 함께 근로대중당을 창당하여 위원장에 취임하고, 같은 해 12월에는 근로인민당 대표 자격으로 탁창혁(卓昌赫)과 함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관선의원으로 선임되었다.
단독정부수립노선이 굳어지자 1948년 4월에는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세칭 남북협상)에 참여하여 북한에 남아 있다가 그 해 8월에 북한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1962년 10월에 최고인민회의 제3기 대의원 및 상임위원을 역임하였으나,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