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칠곡 출신. 1895년 10월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격렬한 소를 올렸다. 1904년 일본이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무력으로 제1차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 노골적인 침략정책을 감행하자, 1905년 1월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를 설치하고 수좌(首座)가 되어 항일투쟁을 본격화하였다.
먼저 일본공사관에 내정 간섭과 침략정책의 부당성을 규탄하는 공개장을 보내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고, 만일 계속해서 내정을 간섭할 경우에는 우리 민족도 결사적으로 그에 맞서 싸울 결의를 통고하였다.
1905년 3월 일본 헌병대가 전판서 김학진(金鶴鎭), 전참판 최익현(崔益鉉), 비서승 허위(許蔿) 등 3인을 일본의 침략에 대한 규탄 격문을 돌렸다는 이유로 구속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일본군사령부에 항의공개장을 보내 일본의 불법을 힐문하고, 3인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하였다.
또한 대한십삼도유약소의 대표로서 동지를 모으고, 2000만 민족의 대표로 각국 공사관에 공한을 보내 일본의 야만성을 지적한 뒤, 3인에 대한 공개 담판을 개최할 것 등을 요청하였다.
운동의 결과로 3인은 석방되었으나, 강원형은 일본 헌병대에 잡혀 45일간 구속당하였다. 1905년 5월 석방된 뒤 계속하여 일본의 배신적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항의공개장을 여러 차례 일본공사관에 발송하였다.
그 해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해 「십삼도유생연명소(十三道儒生聯名疏)」의 소수(疏首)가 되어, 을사조약 파기, 을사오적(乙巳五賊) 처형, 일본공사의 횡포와 무례를 엄징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소를 올렸다.
동시에 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국내외에 공표, 국민들의 궐기와 국제 사회의 관심을 호소하였고, 그로 인해 1905년 11월 28일 일본 경찰에 잡혀 4개월간 투옥된 뒤 1906년 3월 20일 풀려났다.
1914년 9월 서울에서 동지들과 국권회복을 모의하던 중 분사(憤死)하였다.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동에 의사비(義士碑)가 있으며, 1968년 대통령표창,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