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주의 주된 업무는 매매를 위탁하는 주선으로서, 현재의 〈상법〉에서는 주선행위에 속하는 ‘위탁매매인(委託賣買人)’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제도는 다른 나라에도 있으나, 우리 나라 고유의 객주제도는 그 주업무인 위탁매매 외에 위탁자를 위한 여숙·금융·창고 또는 운송 등 여러 가지 주선행위나, 일부의 부수 또는 전문 업무에 따라서 독립된 업종으로 그 유형이 나누어졌다.
객주는 중간상인으로서, 직접 자신을 위하여 물건을 매매하는 것이 아니고 위탁자와 그 상대방의 사이에서 간접매매를 하는 상인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고유의 상인인 거간(居間)과 같다. 객주는 또한 구전상인(口錢商人)으로서 위탁자를 위하여 매매를 하고 그 대가로 구전만을 받으므로 거간과 같다. 그러나 객주는 주선상인으로 자기 이름으로 위탁자의 계산하에서 매매 위탁물의 거래를 담당하기 때문에 그 행위는 주선이며, 그런 점에서 단순히 거래를 보조하는 거간과 다르다. 또한 객주는 좌상 또는 좌고(坐賈)로 일정한 장소에 영업의 본거지로 영업소를 정하여 좌정하고, 거기에 점포·상호·장부 등의 물적 시설과 또는 규모에 따라 상인을 보조하는 사환·서기 또는 차인(差人) 등의 인적 시설을 둔 형태를 가리킨다. 객주는 좌상 중 가장 대표적인 업종에 속하는 상인이다.
객주의 의무는 다음과 같다.
첫째, 매매주선의 의무이다. 판매를 위탁한 경우에는 맡은 물건을 상대방에게 판매하고 위탁자에게 그 대금을 인도하여야 하며, 매수를 위탁한 경우에는 소정의 물건을 매수하여 그것을 위탁자에게 인도하고 그 대금을 위탁자의 계산으로 지급할 의무가 있었다.
둘째, 부수업무의 주선의무로서, 객주는 부수업무인 금융·숙박 등의 주선을 할 의무가 있었다. 그에 관해서는 물산객주와 같이 그 부수업무 전반의 주선을 하는 경우와, 보행객주·환전객주 또는 경주인의 경우와 같이 어떤 특정된 업무만을 주선할 의무가 있는 등 객주의 종류에 따라 그 범위가 달랐다.
셋째, 자행 책임으로서, 객주가 위의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서 만일 상대방이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그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판매위탁의 경우 상대방이 그 물건의 대금을 지급하지 않거나, 매수위탁의 경우 상대방이 그 물건을 인도하지 아니할 때에는 객주 자신이 그 상대방을 대신하여 그 책임을 부담하여 위탁자를 보호하는 상관습이 형성되어 있었다.
넷째, 납세의무로서, 객주는 그들이 가진 독점권에 대한 전제조건으로 정부에 대한 상납대행기관(上納代行機關)을 겸하였다. 그것을 구문세 또는 구문(口文)이라 하며, 그것은 객주가 가진 공적 의무였다.
객주의 권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구문청구권으로서, 객주는 위탁자를 위하여 위탁매매를 해 준 대가로 수수료를 청구할 수 있었다. 그것을 구문 또는 구전이라 하였다. 그런데 구문에는 생산자로부터 판매위탁을 받은 경우의 구전인 내구(內口)와, 상인들로부터 매입위탁을 받은 경우의 구전인 외구(外口), 그리고 객주가 한번 위탁을 받았으나 매매가 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송된 경우에 받는 과구(過口), 매매물의 수량을 기준으로 하는 물건구문 또는 물구문(物口文), 매매가격을 기준으로 정한 전구전(錢口錢) 등이 있었다.
둘째는 개입권(介入權)으로서, 객주가 매매의 위탁을 받은 경우에 그 물건을 상대방에게 판매하든가, 상대방으로부터 매입하지 않고 객주 자신이 직접 매수인 또는 매도인이 될 수도 있는데, 그것을 객주의 ‘개입권’이라 하였다. 그런데 위탁자로부터 객주 자신이 모리(謀利)의 의혹을 받지 아니하기 위해서 개입권을 행사하지 않음이 원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객주의 기원에 관하여는 아직 정설이 없고, 신라 기원설과 고려 기원설 및 조선 기원설 등이 있는데, 그 중 고려설이 가장 유력하다. 신라설에 의하면, 신라시대에는 이미 항해술이 발달하여 국제거래와 내외상인의 왕래가 빈번함에 따라 여인숙까지 생긴 것에 비추어 객주제도도 발생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신라 기원설은 그것을 고증할 확실한 문헌자료가 부족하다. 고려 기원설은 객주의 일종인 여각에 해당하는 경주인(京主人) 또는 원우제(院宇制)가 문헌에 나오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때에 객주가 발생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조선시대에는 이미 객주가 성황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조선시대 발생설은 설득력이 희박하다. 조선시대, 특히 조선 후기에 유통경제는 주로 객주들의 활동에 의해 활성화되었다.
1876년 개항 이후에 객주는 외국무역의 담당자가 되어 개항지와 각 포구에는 객주회·박람회 등의 여러 명칭의 동업조합을 결성하여 독점권을 강화하였다. 이런 개항장 객주의 대다수는 새롭게 객주가 된 사람들이었다. 1889년에는 인천항 등지에 정부에서 지정한 25인의 독점적 객주인 25객주제 등을 실시하여 큰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 이후 객주는 관허제 폐지, 외국 상인과의 경쟁 등으로 큰 압박을 받았다. 이와 더불어, 객주를 규제하기 위한 구문(口文)이라는 영업세가 부과되고, 객주를 관리하기 위한 객주상회소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객주들은 지방 관청의 세금 압박 등에 집단적으로 대응하기도 하였다.
객주의 주요 업무는 위탁매매, 즉 매매의 주선이다. 그러나 매매의 주선 이외에 숙박·금융 등 다양한 주선을 겸하였고, 온갖 주선의 행위가 객주 자신에게 집중되어 상행위 미분화상태의 전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좁게는 행상, 넓게는 객지에서 장사하는 모든 상인을 뜻하는 객상에 대하여 모든 행위의 주인(주선인)이 된다.
여숙업무는 위탁자를 위하여 무상 또는 실비로 숙박을 제공하는 관습화된 업무이지만 숙박을 전업으로 하는 보행객주(步行客主)의 경우에는 유상으로 영업을 하였다. 금융업무는 위탁자를 위하여 금융의 편의를 도모해 주는 것이다. 은행 등의 금융기관이 생기기 전에는 객주의 금융업이 큰 기능을 하였다. 금융업의 내용으로는, 대금(貸金)·예금·어음거래(어음의 발행·할인 또는 인수 등) 등으로, 신용 있는 객주의 어음은 신용장의 구실을 하였다. 금융만을 전업으로 하는 환전객주(換錢客主)는 거금을 다루었다.
도매업무는 소매보다 큰 규모의 매매를 말한다. 속칭으로 위탁매매를 도매라고도 하는데, 때로는 소매까지도 객주가 겸한다. 미곡·과채·소금·시탄(柴炭) 등 부피가 있는 물화(物貨)를 다루는 여각에는 위탁자를 위하여 창고를 설치하고, 그런 물화들을 보통 무상으로 보관해 준다. 또한 화물의 운반을 위한 마차 내지 마방(馬房) 또는 선박을 소유하여 육로나 수로운반에 제공하였다.
물산객주(物産客主) 또는 물상객주(物商客主)는 객주의 원래의 유형으로서 일반적으로 객주라 하면 이것을 가리킨다. 물산객주의 업무는 주업인 위탁매매는 물론, 부업에 속하는 위탁자를 위한 숙박·금융·도매·창고·운반 등 모든 주선의 전반에 걸친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실제로는 영업에 관한 사무뿐만 아니라, 위탁자의 일신상의 사무에 이르기까지 돌봐 주어 마치 후견인과 같은 지위를 갖는 것이 통례였다. 그와 같은 신임관계는 여러 대를 계속하는 예가 흔하였다. 그러한 신임관계는 다른 종류의 객주에서도 근본적으로 다름이 없으나, 보행객주나 환전객주 등과 같이 그 업무의 범위가 좁은 경우에는 그 신임의 범위나 정도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여각은 여상(旅商)의 객주라는 뜻으로서, 객주와 대체로 비슷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원래의 여각은 물산객주와 구별되었다. 예컨대 서울 마포에 있었던 소금과 젓갈 등을 취급하던 자들은 객주라 하지 않고 ‘마포염해여각’(麻浦鹽疫旅閣)이라 하였다.
여각이 일반의 객주와 다루는 화물의 품목에서 차이를 보인다. 물산객주의 경우에는 제한이 없으나, 여각은 미곡·어물·소금·과채·시탄 등 부피와 무게가 큰 품목을 취급하고, 창고와 마방의 설비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여각이 다루는 화물의 부피가 크기 때문에 팔리기까지 그것을 보관할 시설이 필요하며, 영업소까지 운반하기 위해 우마차를 동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에 와서는 그와 같은 구별이 없어졌다.
만상객주(灣商客主)란 의주만(義州灣)의 상인으로, 중국 상인들을 상대로 하던 객주를 말한다. 당시 의주만은 중국과의 상거래에 있어서 유일한 관문이었다. 거래되는 상품은 주로 중국산의 직물 등 고급상품과 약재인 당재(唐材) 등 우리나라의 상류사회에서 수요가 컸던 것들로 추측된다. 그 뒤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에 와서는 중국과의 교통이 크게 늘어나 의주만 이외에 박천(博川) 등의 포구에도 중국선박이 들어와 거래를 하게 되었다. 그때 거래를 담당한 객주를 청선객주(淸船客主)라 하였다. 당시 탁지부(度支部)에서는 중국과의 거래는 오직 청선객주들에게만 특허를 주어 소정의 구문세(口文稅)를 징수하였으며, 청선에 대한 감독을 엄중히 하였다.
보상객주(褓商客主)는 보상을 상대로 하는 객주이다. 보상(봇짐장수)은 부상(등짐장수)과 더불어 각지의 장을 돌아다니는 행상으로, 장꾼 또는 보부상이라고도 하였다. 부상은 소금·옹기·목물·철물 등 부피와 무게가 큰 물건을 지게에 지고 다니지만 보상은 베·무명·모시·비단·금·은·인삼·돈피·수달피 등 부피가 작고 값진 특산물을 보자기에 싸서 들거나 질빵에 메고 팔러다녔다. 보상들은 각기 그 지방의 일정한 객주를 단골로 정하여 오랫동안 거래하였으므로 보상객주가 형성되었다. 보상은 주로 특산물을 취급하였으므로 특정의 보상객주를 중심으로 움직였고, 그 신임도 매우 두터웠다. 예컨대 충청도 한산의 모시, 전라도 구례의 베, 나주·남평의 무명 등을 취급하는 상인이 그러했다.
보행객주(步行客主)는 일반 보행자에 대한 숙박만을 본업으로 하였다. 이상의 여러 객주가 모두 위탁매매를 주업으로 하고, 기타의 주선을 부업으로 함에 비하여, 보행객주는 위탁매매는 하지 않고, 오직 여숙업만을 전업으로 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를 객주의 한 종류로 보는 이유는, 주선행위를 하는 자는 모두 객주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보행객주가 일반 객주와 다른 점은 일반객주는 숙박업무가 부업인 데 비하여 보행객주에게는 주업 내지 전업이란 점, 또 일반객주의 고객은 위탁자인 화주인 데 반해 보행객주의 경우는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었다는 점, 그리고 전자의 숙박은 호의에 의한 것이므로 무상으로, 그 뒤 구문에 포함됨에 비해서, 후자는 전업의 경비이므로 유상이었다는 점 등이다. 그리고 보행객주는 주막보다는 더 고급에 속하였다.
환전객주(換錢客主)는 금융업을 전업으로 하는 객주이다. 대금 등 금융업무는 일반 객주에 공통된 부업으로 되어 있음에 비하여, 환전객주는 대금 등 금융의 주선만을 전문으로 하는 유일한 주업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자본은 상당히 규모가 커 당시 개성의 환전객주들은 10만 원대의 거금까지 거래하였다고 하며, 수산물생산과 같은 경우 거액의 생산자금이 선용금조(先用金條)로 객주 금융에 의존하고 있었다.
무시객주(無時客主)는 언제나 무시로 사용되는 가정일용품을 다루는 객주이다. 취급품목은 조리·솔·바가지·수수비·삼태기·고무래·절구 등 당시 가정부인들의 일용품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물건을 다루던 상점을 ‘초물전(草物廛)’이라 하고, 그런 물건을 지게에 지고 다니며 파는 무시행상이 따로 있어서 무시객주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이 물건을 지게에 지고 “용수·채반·시루밑 사시오. 수수비·방비·빨랫줄도 있소…….” 하며 곡을 붙여 골목길을 누비던 것도 당시의 한 풍물이었다.
경주인(京主人)은 지방의 관리를 위하여 중앙과 지방의 연락과 숙박제공, 기타 여러 가지 주선을 하는 여각주인, 즉 넓은 뜻의 객주의 일종이다. 경주인의 신분이 지방관리, 즉 향리이고 그 위탁자도 관리이며 그 업무 또한 국가에 관한 업무이지만, 업무의 성질이 주선인 점에서 객주의 한 종류로 볼 수 있다.
원(院) 또는 원우(院宇)는 행상들의 숙박소이다. 국가의 기관으로 역(驛)과 원을 두고, 역은 군사상·정치상의 명령전달을 담당하였고, 원은 산업상·교역상의 편의를 위하여 행상인들의 숙박을 담당하던 곳이었다. 원의 업무가 숙박의 제공인 점에서 보행객주나 일반객주와 공통되지만, 원은 영업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국가의 공공기관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원은 뒤에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었다.
객주는 그들이 다루는 화물의 종류에 따라서도 여러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그 주요한 것으로는 청과객주(靑果客主)·수산물객주(水産物客主) 및 곡물객주(穀物客主) 등이다. 그밖에 약재·직물·지물 또는 피물(皮物) 등의 객주도 있었다.
청과객주는 채소와 과일을 다루는 객주로, 문헌상으로는 그들을 ‘소과여각(蔬果旅閣)’이라고 하였다. 청과물은 해산물·곡물 등과 같이 부피가 커서 그 운반과 보관상 창고나 마방이 설치된 여각에서 다루었기 때문이다. 청과객주는 서울에서 과물 또는 생과객주(生果客主)·채소객주 및 건과객주(乾果客主)가 나누어져 있었지만, 작은 도시에서는 같이 다루었다. 서울 등 대도시에는 채소 중 고추·버섯·취·고사리·더덕·마늘 등을 말려서 다루는 건채(乾菜) 내지 산채객주 등도 있었다. 건과객주가 취급한 것은 곶감·대추·황률 등과 단단한 껍질에 싸인 밤·호도·잣·은행 등의 견과(堅果)가 대부분이었다.
수산물객주 또는 해산물객주는 어류·해초 등 물에서 나는 산물을 다루는 객주이다. 각종 생선·건어물·미역·젓갈 및 소금 등을 다루는 객주는 여각이라고 하였다. 수산물객주는 도회지에서는 생선을 다루는 생선객주와 어물을 다루는 어물객주 또는 건어객주, 소금에 절인 어류를 취급하는 젓갈객주 또는 해물객주(海物客主)로 나뉘었다. 서울에서는 ‘동부채칠패어(東部菜七牌魚)’라 하여, 현재의 동대문시장부근의 배우개[梨峴〕는 육산물, 즉 채의 집산지였고, 남대문 밖 7가, 즉 지금의 남대문시장 부근은 수산물의 집산지로 유명하였다. 젓갈도 종류가 많으나 새우젓이 중심이었다. 이른 봄의 세하젓〔細蝦젓〕, 오월의 오사리젓, 유월의 육젓, 추석 후의 추젓, 겨울이 되면 동백하젓〔冬白蝦젓〕 등을 다루었다.
곡물객주는 곡물을 다루는 객주로서, 호남지방의 전라도여각 무미주인(貿米主人)은 1902, 1903년에 걸쳐 백미와 현미를 일본으로 수출한 위탁매매의 물량은 2만 석에 달하였고, 금액은 100만 원이 넘었다. 당시 전라도지방에서 곡물매매의 주선을 담당한 객주, 즉 여각주인은 국가의 특허를 얻은 37명에 국한되었다.
객주는 중간매매상으로써 유통경제를 활성화 시켰을 뿐만 아니라, 개항장에서의 이들의 활동은 외국 문물과의 접촉을 통하여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