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는 인간의 공동생활을 위한 물적 기초가 되는 재화와 용역을 생산·분배·소비하는 활동과 그것을 통해 형성되는 사회관계의 총체를 가리키는 경제용어이다. 생산에서는 생산력이 핵심 요소인데, 생산수단의 질에 의해 좌우된다. 분배에서는 생산물을 누가 소유하느냐가 핵심 요소로, 보통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생산물의 소유자가 되며 이에 따라 생산관계가 결정된다. 사회관계의 총체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형태에 따라 변화하는데 이 두 요소가 결합된 방식을 생산양식이라 한다. 생산양식에 따라 생산·분배·소비하는 활동의 양상이 달라지며 경제생활의 방식도 달라지게 된다.
우리의 원시민족은 오랫동안 채집 · 어로 · 수렵 생활을 해오다가 차차 원시적 목축 혹은 저급한 농경생활을 시작하였다. 석기시대의 유물로 발견되는 여러 생산도구 및 생산물은 이러한 원시공동체의 생활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공동체생활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변화하였다.
씨족공동체 내부에서도 가족이 분화되자, 그 가족이 경제생활의 단위로서 나타나게 되고, 또 씨족공동체는 외부로 확장하여 공동체 사이의 연합체가 형성되어 부족 및 부족연맹체를 결성하게 되었다.
여러 씨족공동체를 거느린 부족이 만주의 동남부와 한반도의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져 살았고, 그들의 생활양식도 지역적 특성에 따라 다양하였다.
만주의 송화강(松花江) 이남의 지역을 점거하고 있던 여러 부족들이 연맹체를 형성하여 이루어진 부여는 일부 지역에서 농경을 하고 있었으나, 대다수의 부족들은 목축을 주업으로 생활하였다. 장백산맥을 끼고 남만주와 한반도의 북부에 자리잡고 있던 고구려는 수렵과 목축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옥저와 동예는 한반도 동북부의 해안지방을 점거하여 수렵과 어로 또는 목축을 주요 생업으로 삼아왔다. 한반도의 남부지방에 일찍이 정착한 여러 부족의 연맹체인 마한 · 진한 · 변한은 이미 농경문화를 개발하였고 일부 지방에서는 벼농사를 도입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여러 부족국가는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자연조건에 따라 거기에 적합한 생업을 가졌으며, 여러 부족끼리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으나, 그들의 사회경제생활의 기본구성체는 씨족공동체였다. 철기문화의 전파와 더불어 여러 부족의 통합운동은 급진전하여 1세기를 전후하여 고대국가가 태동되었다.
만주의 남부와 한반도의 북서부에서는 고구려, 남동부에서는 신라, 남서부에서는 백제가 인접부족을 통합하면서 고대국가적 지배체제를 형성하여갔다.
삼국이 정립하여 형성된 고대국가의 지배체제는 부족세력의 실권자를 국왕이 그의 정부의 지배기구에 편입시켜 국방과 행정을 담당하는 관료군(官僚群)으로 편성한 것이며, 일반백성은 그들 관료군에 의하여 통치되어 왔다.
그러한 지배체제 아래에서는 종래 부족 내에서 경제생활의 기본구성체로서 유지되었던 씨족공동체의 질서는 크게 변동되지 않았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고대국가를 형성하면서 한반도에 정착하게 되자 농경문화가 전지역에 보급되어, 삼국은 모두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농본사회로 발전하여간 것이다.
물론, 이 시기에도 일부 지역에서는 수렵 · 어로 · 목축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일반적으로 그들의 경제생활은 농업에 의존하였고, 국가재정도 농업생산물로 세입 · 세출을 충당하였던 것이다.
7세기 중엽에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고 삼국을 통일하니, 비록 국토는 옛 삼국의 강역을 전부 차지하지는 못하였으나, 한반도의 가장 비옥한 농경지대를 그 영토 안에 편입하는 민족통일국가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이때 고구려의 유민은 남만주와 한반도의 북부에 걸쳐 발해를 건설한 바 있다.
한반도의 중부 및 남부를 영역으로 했던 통일신라는 왕권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농업생산을 늘리고 국가재정을 보강하기 위해 제도의 개혁과 동시에 농업시설의 개선을 단행하였다.
당나라로부터 율령제(律令制)를 도입하여 중앙관서를 정비, 개편함으로써 귀족의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의 강화를 기도하는 한편 지방의 통치제도도 정비하였다.
즉, 지방에는 주 · 군 · 현의 행정구역을 두고 지방의 군소 부족장들을 국왕의 관료군에 포섭하여 배치함으로써 왕령(王令)의 지방 하달에 실효를 거두고자 하였다.
이러한 중앙집권체제로서의 개편으로 왕권은 강화되었으나 귀족이나 지방 부족장들의 세력기반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통일신라의 약 300년 동안 왕권을 중심으로 모여든 귀족군(貴族群)의 세력은 엄존하였고, 그들의 씨족적 혈통기반도 완전히 붕괴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한편, 국력의 강화를 위해 경제의 제도적 개선과 농업생산력의 증가를 위하여 많은 정책을 펴왔다. 정부는 백성의 호구(戶口)와 농경지를 조사하여 세수재원(稅收財源)의 실태를 파악하고 농민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했으며, 하천을 개수하고 저수지를 축조하여 수리관개시설을 정비하였다. 그리하여 통일신라시대에는 농업생산력이 크게 늘어났으며 벼농사도 성행하였다.
상업과 수공업은 특히 도시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고대의 농업경제는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였으므로, 농촌에서의 생산물은 유통되는 일이 별로 없었고 자가소비에 충당되었다. 정부는 농민으로부터 양곡과 더불어 포(布)를 조세로 징수하였으므로 농민의 직포업은 가내공업으로서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그러한 농촌과는 달리 수도에서는 상업과 수공업이 크게 발달했다.
수도에는 국왕과 귀족이 모여 살고 있었고, 그들의 가족과 그들을 호위하는 군인과 관료들로 수도의 인구는 크게 팽창되었다. 수도에는 농촌으로부터 다량의 물자가 조세로서 유입, 집적되었고 물자들은 수도 내에서 상호교환이 필요했으므로 조석으로 시장이 서고 상설시장인 시전(市廛)도 발달했다. 그리하여 정부는 수도의 시장과 시전을 관장하기 위하여 경시서(京市署)라는 관서까지 두고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당나라와 일본과의 내왕이 잦았으며, 특히 당나라와의 교통을 통해 당나라의 발달한 문물이 수입되어 왕실과 귀족의 사치생활을 조장했다.
당나라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이는 한편, 그 기술을 도입하여 수도에 공장을 세우고 수공업을 발전시켰다. 그러한 기술들은 국내에 들어와 더욱 개발되어 특히 금 · 은의 제련과 가공기술은 당나라의 기술을 뛰어넘었고, 저포(苧布) · 견포(絹布)의 직조술도 크게 발달하여 당나라와 일본에도 수출되었다.
그러한 공장들은 정부가 직접 건설하고 예속장인(隷屬匠人)을 두어 운영하는 궁정공업(宮廷工業) 또는 관영공업으로 발달하였다. 대외무역은 조공무역(朝貢貿易)으로 이루어졌고, 따라서 국가독점무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무역(私貿易)은 허용되지 않았으나, 대외무역은 이득이 컸으므로 상인들의 밀무역이 크게 성행하였다.
그러나 수도의 경제문화는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이와 같이 고도로 발달했으나 이것이 농촌에까지는 파급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농촌의 생산물은 교환을 통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력에 따라 조세의 형태로 수도에 집적될 뿐 수도의 문물이 농촌으로 흘러나갈 길은 막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시와 농촌의 경제생활의 격차는 우리 민족의 역사과정을 볼 때 고대사회에서 가장 심하였던 것 같다.
씨족적 혈통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되었던 신라왕조는 9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그 지배체제가 점차 동요되기 시작하였다.
왕권을 중심으로 구성된 신라의 귀족정치는 수도에 집결된 귀족을 위주로 정치 · 경제 · 문화 정책을 펴나가는 사이에 지방의 토호세력이 성장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9세기 말에는 지방토호들의 반란이 일어나 각각 나라를 표방하고 나서서 한때 후삼국의 정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 세워진 왕조가 고려였다.
고려는 우선 중앙집권체제를 재정비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고려왕조가 지방토호세력을 기반으로 성립한 만큼, 이 토호들을 새 왕조의 관료군으로 편입시키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와 동시에 토호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의 개편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광종 때 과거제도를 도입, 실시하고 관인등용을 씨족본위에서 인재본위로의 개편을 기도했고, 성종 때는 지방관제를 개편하고 지방호족의 세력을 회유하여 중앙집권체제에 편입시켰다.
이와 같은 중앙집권체제의 재정비와 더불어 976년(경종 1) 전시과(田柴科)를 창설하여 관료전(官僚田)의 기준을 세우고 집권봉건국가로서의 재정체계를 확립하였다.
전시과는 관료제의 정비와 함께 관료군의 위계에 따라서 녹전(祿田)을 분급한 것으로서, 신라시대의 식읍(食邑) · 녹읍(祿邑)과 같이 토지 및 백성의 지배권을 부여한 것은 아니었다.
전시과체제 아래에서는 모든 국가관료에게 토지와 시전(柴田)을 지급하였으며, 그것은 국가에서 수납하던 전세(田稅)의 징수권을 관료에게 이양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시과체제하에서도 왕조창건에 있어 공신들의 업적을 경시할 수는 없어서 977년 그들에게 따로 공훈전(功勳田)을 지급했다. 또, 그러한 체제하에서 모든 국가관아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각종 명목의 공해전(公廨田)을 창설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왕조의 전시과체제가 확립된 것이다.
고려의 전시과는 국정에 참여하는 관료군에 대한 물질적 보상으로서 지급되는 녹전이므로, 원칙적으로는 관직과 더불어 지급되고 관직의 이탈과 함께 국가에 반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중세의 관직은 신분제와 결부되어 있었으므로 일시적 관직의 이탈로 전시과에 따라 지급된 토지가 국가에 반환되는 일은 없었다.
≪송사 宋史≫ 열전의 고려조에 따르면 고려의 관리는 녹미(祿米) 대신 토지를 지급받았으며, 관직을 떠나면 그 반을 환납하고 사망하면 그 전부를 국가에 환납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단 지급된 토지는 관직의 이탈과 더불어 국가에 반납된 일은 없었다. 그리하여 전시과 체제하에서는 사전(私田)이 발생할 요인이 많았으며, 관료진의 교체와 수의 증대는 사전의 팽창을 초래하게 되었다.
전시과는 창설된 지 약 20년이 지난 998년(목종 1)에 개정되면서 전시과의 토지지급 표준결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전시과는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개정되었으며, 특히 1076년(문종 30)에 들어와서는 전지측량을 단행하고 전시과 지급의 기준액수를 더욱 감소시켰다.
일단 지급된 토지는 국가에 환납되는 일이 없었고, 새로 등용되는 관료에 대해서는 새로 토지를 지급해야 했으므로 전시과에 의한 토지팽창이 심해 국가공전의 감소를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전시과체제는 중앙의 집권력이 강하게 작용될 때에는 적절한 재정정책이 되고 있었으나, 왕권이 약화됨에 따라 각종 부작용이 드러났다.
고려 후기에 나타난 사전의 확대는 바로 그러한 현상이었다. 즉, 전시과에 따라 지급된 토지는 관직에서 벗어나서도 국가에 환납되지 않음으로써 사전화하였고, 처음부터 세습전으로 인정된 공훈전은 사전의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결국은 사전이 거점이 되면서 왕권이 약해졌고 더불어 사전은 팽창하고 공전을 잠식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전시과 체제하에 지급된 과전이나 공훈전은 서구의 영지(領地)와는 그 성격이 달라서 토지에 대한 조세수납권을 지급한 것이며, 농민에 대한 행정권을 이양한 것은 아니었다.
또, 그러한 토지에 대한 조세의 징수는 정부가 공전에 대해서 수납하고 있는 조세율을 적용한 것이며, 토지를 지급받은 자가 마음대로 조세율을 높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전에 대한 조세징수는 중앙왕권이 약화됨에 따라 국가에서 정한 조세율이 지켜지지 않았고, 전주(田主)에 의한 농민통제가 강화됨에 따라 그러한 사전은 점차 전주의 개인 전장(田莊)의 성격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는 실권을 장악하게 된 공양왕 3년 고려 후기에 성장한 무질서한 전제(田制)를 바로잡고자 공사전적(公私田籍)을 불사르고 새롭게 양전(量田)을 실시했으며 이어서 과전법(科田法)을 공포하였다.
태조가 조선을 창건하면서 제정, 실시한 과전법도 기본적으로는 고려의 전시과 체제를 본뜬 것이었다. 다만 고려 전시과 제도의 실시에서 체험한 운영상의 어려움을 보완하기 위하여 과전지급에서는 몇 가지 점에서 고려 전시과와는 다른 점을 보이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과전법은 처음부터 일대(一代)에 한하여 지급되었다.
그것은 고려시대의 전시과 제도하에서는 현직에서 물러나면 반을 환수한다고 정하였으나 그대로 실시된 일이 없었고, 당대는 물론, 그 자손에게까지 세습되면서 환수되는 일이 없었던 점을 감안하여 처음부터 일대한(一代限)으로 정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과전제도도 그 운영과정에서 일대한의 규정이 지켜지지 못하였다.
과전을 받은 자가 사망하더라도 그 자손의 생계를 위하여 수신전(守信田) · 휼양전(恤養田) 등의 명목으로 그 자손에게 세습되었다. 그리하여 과전제하에서도 한번 지급된 전지는 그 자손에 세습되는 사전이 되고 만 것이다.
조선시대의 과전제에서는 과전을 경기(京畿) 내에서만 지급하기로 하였다. 고려 전시과 제도하에서는 과전이 중앙집권력의 약화에 따른 사전팽창의 거점이 되었던 점을 감안해, 중앙에서의 감시의 눈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지역에서 지급하자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그 규정도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한 번 지급된 과전은 환수되지 않았고, 새로 제수되는 관료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경기 내의 토지만으로는 새로운 과전을 충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미 태종 때에 와서는 과전의 하삼도(下三道:경상도 · 충청도 · 전라도를 이름)지급을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과전이 거점이 되어 공전을 잠식하면서 사전이 팽창되어간 것은 고려의 경우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 과전은 사전 팽창의 거점이 되는 것이므로 세조 때에 와서는 과전제를 폐하고 직전제(職田制)를 채택하였다. 직전제는 현직관료에 한하여 전지를 지급하되 전지에서의 수조(收租)는 지급받은 관료가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수조하여 해당관료에게 현물로 지급하는 것으로서, 관수관급(官收官給)이었다.
고려의 전시과제나 조선 초기의 과전제하에서는 국가는 관료에게 과전을 지급하는 외에 현직관료에게는 따로 녹미를 지급하고 있었으므로 직전제란 결국 녹미지급의 중복이 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직전제도 결국 국가공전 중에서 지급되는 것이므로 국가재원의 감소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직전제도 명종 때에 와서는 폐지되고 말았다.
조선 태조의 전제개편에서도 공신전(功臣田)의 지급은 중단되지 않았다. 오히려 태조는 새 왕조를 창건함에 있어서 개국(開國) · 좌명(佐明) · 협찬(協贊) 등 다수의 공신을 만들어냈고, 그 뒤 왕권의 기초를 다지는 과정에서도 역대 왕은 수많은 공신을 창출하였으며, 이들에게는 당초부터 세습이 인정되는 막대한 양의 토지를 지급한 것이다. 이러한 공신전은 특히 하삼도지역에서 지급된 것으로서 그것을 거점으로 한 사전의 확대는 더욱 성행하였다.
태조가 단행한 전제개편은 구정권하의 귀족들의 물질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새 왕조의 집권체제를 확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조에서는 새 왕조를 둘러싼 새 권력층이 형성되었으며, 그들에게는 공신전과 과전을 지급함으로써 토지의 재분배가 실시되었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공신전은 역대 왕의 세력층의 교체가 있을 때마다 확대되었고, 그것이 거점이 되어 사전은 공전(公田)을 잠식하면서 팽창되어갔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의 토지제도도 결국 광대한 사전 위에 서 있었고, 국가재정은 사전화하지 않은 공전으로부터의 수조(收租)에 의존할 따름이었다.
중세사회의 토지제도의 형성과정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농민들이 농노(農奴)로 전락한 것이라 하겠다. 경작농민의 농노화는 통일신라 말기부터 싹터왔으나 고려왕조의 성립과 더불어 그 진행이 다소 둔화되었다가 무신의 난 이후 전제가 문란해지고 사장(私莊)이 팽창하면서 급격히 진전되었다.
고려 전시과 체제하에서는 과전 또는 공신전은 경작하는 농민으로부터 조세를 수납하여 그 수입으로 삼는 것이었으므로 농민은 농토에 얽매어 농토를 이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공신전은 물론이고 과전도 세습화됨에 따라 전주(田主)와 전부(田夫)의 예속관계는 강화되어갔다.
그러나 우리 나라와 같은 중앙집권제도하에 있어서의 전주와 전부간의 관계는 서구의 분권적 봉건제하의 영주와 농민과의 관계와는 달랐다.
서구의 영주지배하의 농민은 영주의 영민(領民)으로서 그들은 영주에 대하여 조세(현물조세 및 노동부역)를 납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주의 행정권 및 사법권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우리 나라 농민은 사전농민(私田農民)일지라도 그들은 전주의 사민(私民)이 아니고 공민(公民)이며, 전주에 대하여 조세의 부담은 지고 있었으나 행정적 또는 사법적 지배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사전의 농민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공전의 농민과 한 가지로 왕권의 대행자인 지방수령의 행정권하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전하의 농민이라 할지라도 국가에 대한 병역, 기타 부역이나 공물의 의무에서 면제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나라의 농민의 전주에 대한 농노관계는 서구의 영주체제하의 영민(領民)보다는 그 예속관계가 약하였다고도 하겠다.
우리 나라의 고대 및 중세에는 농노 이외에 노예가 있었다. 우리 나라의 노예는 귀족의 사노비(私奴婢)로서 국가의 행정권 밖에 있은 것이다. 즉, 귀족의 사유물로서 국가의 병역 · 부역 그밖의 공물의 부담에서는 제외되고 있었다.
고려 말기 이래 강화된 전주와 농민과의 예속관계는 조선시대에서도 해이되지 않았고, 조선 태조의 전제개편 때도 토지와 농민은 그 주인이 바뀌어도 전주 · 전부의 관계는 허물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착되어갔다.
사전하의 전주와 전부의 관계가 정착됨에 따라 공전하의 농민도 토지에 결박되면서 국가에 대하여 농노관계가 성립되게 되었던 것이다. 농민이 토지와 분리되어 한낱 소작인으로 되면서 지주와 새로운 계약농(契約農)의 관계에 서게 되는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부터의 일이다.
우리 나라 중세사회에서는 상업과 수공업이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그것은 국가의 재정이 현물조세에 의존하였고, 수요는 관영공업으로 충당하였으며 농민경제는 자급자족의 자연경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대외무역도 국가의 엄격한 통제하에 있었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수도였던 개경과 한성에는 많은 인구와 물자가 모여드는 곳이었으므로 상업이 활기를 띠고 있었다.
수도에서는 정부가 시전공랑(市廛公廊)을 건립하고 상인을 유치하여 상업에 종사시키면서 정부에서 필요한 물품의 조달을 부과하고 상업의 특권을 주었다.
고려 태조는 수도를 개경에 정함과 동시에 시전을 건립하여 상인들에게 임대하였다. 고려시대의 시전 규모에 대하여 ≪고려도경 高麗圖經≫의 기록에 의하면 경시전(京市廛)은 광화문에서 부민관(府民館)에 이르기까지 공랑을 건립하였고, 공랑 사이에는 통로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한성이 수도로 정해지자 946년(정종 1)에 혜정교(惠政橋)에서 창덕궁에 이르기까지 좌우행랑 800여 칸의 점포를 건설하고 상인에게 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에서는 대여한 공랑에 대한 공랑세를 징수하며 그밖에 국역(國役)의 부담을 명하였다. 국역이라 함은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상납시키며, 또 국가의 잉여물자를 판매함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각 시전은 취급하는 물품종류에 따라 영업규모가 달랐으며, 국역은 그 취급물품과 영업규모에 따라서 응역의 비율을 달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비교적 많은 비율의 국역을 담당하는 상전으로 6개시전이 있었는데 그것을 육의전(六矣廛) 또는 육주비전(六注比廛)이라고 하였다.
≪만기요람 萬機要覽≫ 재용편에는 육의전으로 선전(線廛) · 면포전(綿布廛) · 면주전(綿紬廛) · 내외어물전(內外魚物廛) · 지전(紙廛) · 저포(苧布) 및 포전(布廛)의 6개 전을 열거하고 있다.
조선 중기에는 국역을 담당하는 상전으로는 31개가 있었으며, 그 밖에 또 소소전(小小廛)과 49개의 무분전(無分廛)이 있었다. 소소전과 무분전이라 할지라도 국가로부터 직접 국역의 배당은 없었으나, 육의전의 지시에 따라 수시 국역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었다.
국가는 그와같이 육의전을 비롯한 경중시전에는 국역부담의 의무를 지우는 동시에 각종 특권을 주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금난전권(禁亂廛權)으로 표현되는 상품독점권이다.
이상의 각 전은 모두 국가의 전적(廛籍)에 등록되었으며, 만일에 그에 속하지 않는 상인으로서 이상 각 전에서 취급하는 물품을 판매하는 경우에는, 그것을 금지하고 상품을 몰수하며 상행위를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 금난전권의 내용이다. 국가는 이러한 권한을 육의전에 부여하였는데 이러한 금난전권은 서구의 상인 길드(guild)가 행사한 길드금제권과 같은 내용이었다.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지방에도 여러 관아(官衙)가 설치되었고, 그 주변에 인구가 모여들면서 지방도읍이 발달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향시(鄕市)가 열리게 되었다.
향시에서는 주변 농민의 생산물이 서로 교환되었다. 그러나 농민경제가 자연경제에 머물러 있는 한에 있어서는 향시의 발달은 크게 기대될 수 없었다.
중세의 대외무역은 신라시대와 같이 조공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조공선에는 조공품만이 아니라 순수교역을 위한 상품도 적재되었고, 조공품의 헌상(獻上)이 끝난 뒤에는 그 나라 상인과의 교역이 있었던 것으로, 조공선에는 상인단이 함께 뒤따르고 있었다.
이러한 상인단은 궁원(宮院)의 어용상인이나 국가로부터 특허받은 특권상인들로 구성되었으며, 따라서 대외무역은 독점무역에 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공업은 고려와 조선 초에 있어서도 관장(官匠)에 의한 관영공업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국내의 모든 장인(匠人), 즉 수도의 경공장(京工匠), 지방의 외공장(外工匠)은 장적(匠籍)에 등록되고 국가공역에 종사하였다.
따라서 자유수공업자인 사공장의 활동영역은 크게 제한되고 있었다. 한편, 농민의 가내공업은 자가수요를 위한 의료생산(衣料生産)과 국가에 바칠 세포(稅布)의 생산에 집중되고 있어서, 농민수공업제품은 종류에 있어서나 기술적 수준에 있어서 보잘것없는 제품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경제상태하에서 화폐의 발달은 기대할 수가 없었다. 금속화폐는 고려 숙종 때 이래 주조, 통용시킨 일이 있으나, 화폐의 유통은 원활하지 못하였다.
또, 고려시대에는 은병화(銀甁貨)를 제작하여 통용을 시도한 바 있으나, 역시 금속화폐는 일반적인 통용을 보지 못하였다. 정부의 모든 조세가 현물로 수납되었고, 농민경제가 자급자족의 자연경제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화폐의 유통이 원활할 리가 없었다.
조선 초기에서도 그러한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태조의 집권시 금속화폐인 조선통보(朝鮮通寶)를 주조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널리 유통되지는 못한 것 같고, 그 뒤 태종 때는 저화(楮貨)를 만들어 통용시킨 바 있고, 세조 때는 전폐(箭幣)를 주조했으나 일반적으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화폐가 일반백성의 경제생활에서 유통수단으로서 중요성을 가지게 된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상공업이 발달할 때부터였다.
즉, 인조 때 정부는 금속화폐를 주조하여 일반상거래에 통용시킨 바 있고, 숙종 때 이후에는 주화를 대량적으로 주조하였으며, 일반백성들 사이에도 점차 교환의 매개수단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당시에 주조된 화폐는 상평통보(常平通寶)였다.
조선의 전통적인 중세경제체제는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부터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변화의 특징은 정부경제운영의 방법과 백성의 경제활동 및 생활양상이 달라지면서 경제의식에도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한 변화의 싹은 임진왜란 · 병자호란을 겪은 뒤부터 전통사회의 내부에서 서서히 움트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의 전통적 생산업은 농업이었으며, 농업은 대지주제(국가 거족 · 관료 · 양반 · 귀족 소유)하에서 영세소작경영을 주축으로 해왔다. 일반경작농민은 토지와 더불어 지주의 예농(隷農)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걸친 대전란으로 많은 농민이 죽거나 토지를 떠나 각처로 이산하였으므로, 지주들은 새로이 경작민을 모집하여 소작경영을 하거나 농업노동자를 고용하여 농지를 자영하는 경영방법이 점차 성행하게 되었다.
한편, 노동여력이 있고 근면한 농민들은 지주의 토지를 빌려서 소작료 또는 지대를 지불하는 병작반수제(並作半收制)도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한 경영적인 농민이나 자영지주들 중에서 중산농으로 성장하여 부(富)를 이룬 자도 나오게 되었다.
상업과 수공업도 조선 중기 이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대동법 실시 이후 수도를 비롯하여 지방의 향시도 번성하게 되어 사상(私商) · 사장(私匠)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농민이 사방으로 이산하여 농민가호에 부과하던 현물공납제는 실시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1608년(선조 41)부터 농민의 상공(常貢)을 폐하고 그 대신 농민의 경작지에 공미(貢米)를 부과했는데 그것이 대동미(大同米)였다.
그리고 정부는 필요한 물품을 시장에서 구입조달하게 된 것이다. 즉, 정부는 물품조달의 상인을 공인으로 정하고, 농민으로부터 징수한 공미를 상인에게 주어 그것으로 정부에서 필요한 물품을 경시(京市)와 향시에서 구입, 납품하도록 했다.
이후 한성에는 각종 생산물이 유입되었고, 지방향시에서도 물화교역이 활발해졌다. 지방시장이 발달함에 따라 농민의 생산물도 상품화되고 지방시장을 순회하는 전문적 행상인 보부상(褓負商)의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한성 주변의 농촌에서는 자가수요 충족을 위한 농업에서부터 경시에서 판매하기 위한 상품농업이 발달하기도 했다.
그에 대응하여 특권시전의 지배영역 밖에서 자유사업, 즉 난전(亂廛)이 성행하게 되자, 18세기 말에는 육의전 특권만은 유지시키고 그 밖의 상행위에 대해서는 상업자유화를 선언했는데 이것이 ‘신해통공령(辛亥通共令)’이다. 상업의 발달은 정부의 관영수공업제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정부는 필요한 공산품도 시장에서 조달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관영수공업장을 계속 유지, 운영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그 결과 민간에게 맡기기 어려운 특수공업을 제외하고는 관영공장제를 폐지했다.
그것을 계기로 종래 경공장 · 외공장에 편입되고 있던 장인들은 스스로 수공업장을 차리고 생산품을 시장에서 판매하는 자영수공업도 등장하게 되었다.
상업의 발달은 또 화폐경제의 발달을 촉진했다. 금속화폐를 주조, 통용하기 시작한 정책은 고려 초에도 있었고, 조선 초에도 실시한 바 있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정부의 모든 공납이 현물로 이루어졌고, 상업이 발달하지 못하여 농업경제가 자연경제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서는 화폐의 유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인조 때 금속화폐를 주조하였고, 숙종 이후 금속화폐를 대량으로 주조, 유통시켰다. 그 뒤부터 화폐는 물화교환의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으며, 정부에서도 조세의 일부를 화폐로 수납하게 되었다. 이로써 화폐경제는 국민의 경제생활에서 확고하게 정착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 분야에서의 여러 변화는 전통적 계층질서에도 동요를 가져왔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양반의 수가 크게 늘었고, 그들 중에는 관계(官界)에 등용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사람도 많이 생겼다.
그러한 몰락양반들은 재화를 축적한 상공업자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반면 치부한 상공업자들 중에는 곡물을 납입하여 관명을 얻어 신분의 상승을 꾀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현상은 그들 상공업자들이 상공업자로서의 인간적 각성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세 초 서구사회에서 시민계층이 성장함에 따라 자아의 각성이 일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도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부를 이룬 서민계층이 늘어나 점차 사회기반을 형성하여 주목의 대상이 되었고, 문학이나 예술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이 문학과 예술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8세기 말에 자주 나타나는 시정잡사(市井雜事)를 소재로 한 여항문학(閭巷文學)과 예술은 그러한 사회상의 변화를 표현한 것이며, 작자 미상의 민화나 민요 등은 바로 그러한 서민층의 자아의식의 발로였다고 하겠다. 그리고 경제 및 사회적 변화는 사람들의 가치관 및 경제의식에도 전환을 가져오게 하였다.
재출어농(財出於農)이라 하여 농업만이 가치창조의 생산업이며 상공업은 가치를 이전하거나 형태를 바꾸어 놓은 데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 경시하던 사상이 점차 바뀌면서 상공업의 중요성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도 상공업을 중요한 산업으로 삼게 되었다. 또한 지식인들의 학풍이나 사회를 보는 안목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17세기에 싹터서 18세기에 성행하였던 실학(實學)은 전환기의 시대상을 대변하는 신사조(新思潮)로 등장하였으며, 이는 개신유학자(改新儒學者)들의 실용주의의 표현이었다.
강인하고 경직되었던 봉건적 지배체제 안에서 나타난 이러한 변화는 당시로서는 큰 충격이었다고 할만하다. 폐쇄된 조선사회 내부에서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받지 않고도 자체적으로 근대로의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오기까지는 조선 후기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래의 오랜 준비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18세기에 상업과 수공업 및 농업면에 있어서 근대지향적인 발전상을 보여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근대기업으로 성장하지 못했고, 또 사회 · 문화면에서도 새로운 풍조가 나타났음에도 전통사회를 붕괴하고 근대시민사회 및 시민문화를 이룩하지 못한 것은, 당시의 여건이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제적 발전을 제약한 첫째의 여건으로는 조세 등 공과금납제(公課金納制)를 전면적으로 실시하지 못한 국가재정정책을 들 수 있다. 조선 전기에는 현물조세를 원칙으로 하여왔으며, 조선 후기에 와서 일부공과에 금납을 허락한 일이 있었으나, 당시의 조세총량에 비하면 금납지조(金納地租)의 비중은 보잘 것 없을 정도였다.
조세금납제가 전면 제도화한 것은 갑오경장 때였으나 그 뒤에도 지주에 대한 소작지대는 여전히 현물조세였으며, 금납제로 대체되지는 못했다. 그러한 상황하에서는 기업적 영농 및 농업의 근대적 발전을 크게 기대할 수 없었다.
둘째로는 폐쇄적인 해외무역정책을 들 수가 있다. 조선시대의 대외무역은 관영무역이 독점하였고, 또 조공무역의 성질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공무역에서는 중국으로부터 무역품에 대한 부당한 요구로 말미암아 우리 나라의 광공업이 입게 된 피해가 컸다.
국내의 금광이 정책적으로 폐광당한 것은 중국으로부터 부당하게 금의 조공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며, 국내의 제지업이 쇠퇴한 원인의 하나도 과다한 지물조공(紙物朝貢)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관영독점무역에도 특권상인이 뒤따른 일이 있었고, 밀무역도 성행했으나 자유로운 국제무역이 전면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한 국내시장이 확대, 발전될 수는 없었다.
18세기 및 19세기에 들어와서도 수공업의 기술적 분화는 낮은 수준에 머물렀고, 또 농촌수공업의 활발한 전개를 보지 못한 것은 수요면에서 자극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조선의 정부구조를 들 수 있다. 조선정부는 상호견제조직이 잘 되어 있어서 당쟁이 심하여 정계는 매우 불안한 것 같아도, 조정은 비교적 안정된 기반을 갖고 있었다고 지적한 학자도 있다.
조선의 중앙집권력은 강하였고, 영조 · 정조 시대와 같이 왕권이 강화된 시기나 세도정치가 발호한 시기에도 조정은 동요되지 않았으며, 전통적 질서 외의 제3계급의 정치참여는 어려운 상태였다.
시민계층이 대두한 것은 18세기였으나 그들이 재화를 축적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정권에 침투하거나 구정권을 붕괴시키고, 그에 대응하는 새 정권을 수립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시민의식이 성숙되지 못한 까닭도 있었으나, 그와 함께 정부 조직의 강인성도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될 수 있다.
18세기부터 시작된 발전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둔화되고 말았다. 1801년 순조가 등극하면서부터 정계는 난국에 부닥쳤다. 외세의 내침이 점차 빈번해짐에 따라 민심은 불안해지고 정부의 실권을 담당한 집권세력의 세도정치는 보수주의를 고수할 뿐, 새로운 정세에 대처할 만한 식견과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방수비를 위한 재정지출의 증대는 조세부담을 가중시켰고, 세도치하의 관료는 부패하여 백성에 대한 가렴주구(苛斂誅求)가 더욱 심해졌다.
이러한 여건의 변동으로 18세기에 성장의 추세를 보였던 경제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오히려 위축현상까지 나타내고 있었다.
농업 부문에서는 지주경영이나 소농경영을 막론하고 18세기의 경영규모를 크게 확대시키지 못했고, 기술 분야도 새로운 자극을 받지 못해 18세기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농민에 대한 과중한 조세부담으로 농민의 이농현상이 심하게 나타나서 농업생산이 감소되고 있었다.
상공업 부문에서도 정부의 통제가 심해 발전은 침체되었다. 선대자본(先貸資本)에 예속되었던 수공업의 경영관계는 19세기에 와서는 별로 개선되지 못했고, 청나라에 대한 무역이 줄어들면서 시장이 협소해졌으므로, 수공업자는 생산의 확대 및 기술개량의 자극을 받지 못했고, 따라서 자본축적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국가의 독점이 강화되면서 군소상인의 자유로운 활동도 크게 저지되었다.
이렇듯 19세기 전반기에는 사회 · 경제 및 문화면에서 침체의 경향이 더 뚜렷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우리는 순조부터 철종에 이르는 약 60년 간을 봉건적 반동기(封建的反動期)라고 해야 할 것이다.
18세기 말의 근대지향적인 경제적 발전추세는 스스로 기술혁명이나 조직적 혁신을 단행하여 근대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성립시키지 못하고 있다가 개항을 맞게 되었기 때문이다.
개항 당시 우리 나라의 지식계층 및 상공인계층이 서구자본주의문화를 이질적인 문화로밖에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그때까지 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항 후 서구의 공장제 상품이나 상사(商社) 및 회사조직은 당시의 토착상공인에게는 전혀 생소한 것이었다. 근대적 의미의 기업인은 그러한 서구자본주의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개항 후에 비로소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서구제국의 상선이 우리 나라에 나타나 통상을 요청한 것은 19세기 초부터이다. 1822년(순조 22) 영국상선이 충청남도 해상에 나타나 통상을 요청한 것을 비롯해, 그 뒤 프랑스 · 미국 · 독일 · 러시아의 상선이나 군함이 여러 차례 우리 연안에 나타났다.
그러나 당시 우리 나라는 세도정치 아래에서 내정이 문란하고 민심도 불안하여 정부가 뚜렷한 정책으로 이에 대처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서구의 통상요청에 대해서도 거부로만 일관했으며 문을 열어 그들의 문명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1863년 정치의 실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내정개혁에는 크게 힘을 기울였으나 대외정책은 여전히 쇄국을 견지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서구의 기술문명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기선과 무기의 우수성을 높이 찬양하여 국내의 기술자에 명하여 그 제조를 종용한 적은 있으나, 적극적인 문호개방은 단행하지 않고 쇄국정책을 엄중히 지켜왔다.
한편, 일본은 1854년 미일화친조약(美日和親條約)을 체결하고, 1868년 절대왕권인 메이지정권(明治政權)을 세우면서 서구제국과의 교역에서 입은 손실을 한국에서 보상하려고 일찍부터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해 왔다.
1873년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고 흥선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이 시기를 틈타 일본의 한국침략은 더욱 고조되었다.
그리하여 1876년 한국은 일본과 수호조약을 체결했고, 일본상인들에게 부산항을 개항했으며, 1880년대 초 미국 · 영국 · 독일 · 이탈리아 · 프랑스 · 러시아 등 서구제국과도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리하여 수도 한성에 외국공관이 상설되었으며, 부산 · 인천 · 원산 · 목포 · 군산 · 진남포 등 국내 주요 항구가 외상(外商)에 개방되었다. 서구문화는 개항장을 통해 물밀듯이 흘러들어왔고, 한국의 전통적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는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서구의 근대공장제 상품은 일본상인과 청나라상인의 중계무역으로 대량 유입되었으며, 개항장에는 일본과 청나라상인의 상사가 설치되었다. 특히, 인천항에는 미국 · 영국 · 독일 등 서구상인이 진출하여 상사를 개설하고 있었다.
그들의 경제활동은 조직면에서나 상거래방법에 있어서 한국의 전통적인 상업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따라서 서구자본주의의 유입은 한국인의 생활환경과 경제활동에 큰 변화를 주었다.
개항 후 서구자본주의문화의 유입을 맞아 개항장의 상인들은 개항 초기부터 그러한 서구문화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로 그것을 수용하였다. 그들은 외상으로부터 수입한 공장제 상품을 큰 저항 없이 받아들여 교역을 했고, 또 그들로부터 서구식 상업조직과 방법을 도입해 자신들의 혁신을 기도하였다.
한편, 서구자본주의문화의 유입에 대응해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혁신운동의 하나로는 우선 상회의소(商會議所)의 결성을 들 수 있다.
이 상회의소는 개항장에 진출한 일본인 상회의소에 대응하여 결성되어 일본상인의 상권침탈을 방어하는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었으나, 일본상인을 무조건 배격하지는 않았다.
우선, 정치적 강세와 때로는 무력의 배경 밑에서 부당한 상권확장을 기도하는 일본상인들의 횡포를 민족상인들이 단결된 힘으로 막아내려 하였고, 대자본력을 갖고 침투하는 일본상인들과 경쟁하기 위해 자본을 모아 회사를 조직하여 그에 맞서야 했다.
그들은 서구회사를 본떠 상업조직을 혁신하고 영업방법을 개선하며 상업정보를 교환함으로써 변화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도록 상호 협조하였다.
그리고 민족상계(民族商系)의 열세는 자본력이 약한 데 있다고 하여 민족계 금융기관의 설립을 촉구했고, 또 수출입상품을 외국무역업자에게 의존하기 보다, 민족상인이 외국선박을 구입 또는 임대하여 해외시장에 직접 진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또 기술을 도입하여 국내에 생산공장을 건설할 것을 종용하면서 그에 대한 참여를 적극 장려하였다.
이와 같이, 개항 후에 조직된 민족상인의 조합은 서구자본주의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선도적 구실을 하였다. 이러한 상회의소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1880년대 초부터 각지 개항장에서 결성되었다.
1882년 원산항에서 조직된 원산상의소는 문헌으로는 최초의 민족상업회의소이나, 다른 지역에서도 그와 때를 전후하여 상인조합이 결성되었으리라고 추측된다.
부산의 객주조합(客主組合), 인천의 신상협회(紳商協會), 한성의 상업회의소, 목포의 사상회(士商會) 등은 모두 1880년대에서 189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상인단체였고, 그 밖에 전국 각 군 · 읍에서도 한국인상업회의소가 결성되어 일본인상업회의소와 경쟁하였다.
서구자본주의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전개된 혁신운동의 또 하나의 모습으로는 상업회사의 설립을 들 수 있다. 상업회사설립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1882년 유길준(兪吉濬)의 <상회규칙 商會規則>에서 촉구된 바 있고, 또 1883년 ≪한성순보 漢城旬報≫의 사설에서도 역설되었다.
한편, 상인측에서도 청나라와 일본상인에 의한 상권침투가 격심해지자, 하루속히 서구의 발달된 상업조직과 방법을 도입해 외상과의 경쟁에 이겨야 하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한 것 같다. 그리하여 1880년대초 이미 상업계에서는 상사회사의 설립운동이 활발해졌다.
1884년 4월 19일자 ≪한성순보≫에는 당시 국내에 설립되고 있는 회사로서 서울에 장통회사(長通會社) 등 16개사, 인천에 공흥회사(共興會社) 등 6개사, 부산에 해산회사(海産會社) 등 6개사 등 모두 28개사를 소개하고 있다.
초기의 상사회사는 그 명칭에 부합되는 근대적 주식회사 조직을 가진 것이 적었다고 하더라도, 개항 후 몇 년만에 그러한 회사 및 상회의소의 설립을 본 것은, 상인들의 의식이 근대지향적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뜻한다.
개항장의 객주 · 여각(旅閣) 및 보부상들이 서구자본주의문화에 접하여 ‘변화에 대한 창조적 반응’을 보이면서 혁신을 기도한 것은 근대적 기업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민족상인의 회사설립은 1890년대에 들어와 더욱 활발해졌다. 당시의 회사조직이나 운영은 근대기업회사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업종도 상사회사와 더불어 산업의 각 부문에 걸쳐 회사가 설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서구자본주의문화의 유입은 정치 및 행정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혁신파 인사들이 다수 행정관료로 등용되면서 식산흥업정책(殖産興業政策)이 추진되었고, 관제도 개편되어 상공부가 독립된 관서로 승격되었다.
상공인 중에서도 유능한 사람은 실무관료에 채용되는가 하면, 관료출신이 회사를 설립하고 공장을 건설함으로써 상공업계에 진출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정부는 개항 후 1880년대 초부터 정부 내의 관서를 개편하고 근대공장건설을 추진해왔다. 1883년 정부는 기기국(機器局)과 전환국(典圜局)을 설치하고, 1885년 직조국(織造局)을, 1887년 조지국(造紙局) 및 광무국(鑛務局)을 신설하여 그 산하에 정부직속공장을 설립했다.
우리 나라에서도 근대무기의 위력은 이미 체험해온 바 있어, 흥선대원군섭정 때의 쇄국정책에서도 서구식 근대무기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제조를 시도한 바 있었다. 개항 후 서구문화의 도입이 허용되자 제일 먼저 무기공장건설에 힘을 기울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정부는 개항 후 제1차 수신사를 일본으로 파견하였을 때도 일본의 무기공장과 조선소를 특별히 돌아보았고, 1881년 영선사(領選使)를 청나라로 파견하였을 때는 당시 영선사 김윤식(金允植)이 국내청년 69명을 대동하고 톈진(天津) 기기창(機器廠)에서 신무기제조기술을 습득하게 하였다.
그 때 톈진에서 기술을 수련한 청년기술자가 근간이 되어 1883년 서울 삼청동 북창(北倉)에 기기창을 건립했으며, 그 공장에서는 소총 등을 제조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부는 또 1883년 전환국을 신설하고 그 관장하에 서구식 조폐공장이 건립되었다.
이 조폐공장은 처음에 서울 원동(苑洞)에 설립하였다가 그 곳이 좁아 뒤에 남대문 서편으로 옮겨 거기서 최초로 서구식 화폐를 주조하였다.
당시 이 전환국에는 독일인 묄렌도르프(Möllendorf,P.G.von)를 총감독으로 영입했고, 독일의 기계를 도입하면서 독일기술자 2명을 초청해 기술지도를 담당하게 하였다. 전환국은 1890년 인천에 공장을 건설한 바 있었고, 1896년 인천공장을 폐쇄하고 서울 남대문에 있던 공장은 용산으로 옮겼다.
용산공장은 분석소(分析所) · 금속용해소 · 조각소 · 철공소 · 기계소 등을 설비한 근대식 화폐주조공장으로는 손색이 없었으나 을사조약 이후 폐쇄되었다.
1883년 박문국(博文局)을 설립하고 일본에서 인쇄기를 도입해 정부의 간행물을 인쇄하는 한편 ≪한성순보≫를 발간하였으며, 또 직조국을 두고 그 관장하에 모범 직조공장을 세웠으며, 조지국을 설치하고 제지공장을 건립하였다.
1887년 광무국을 두고, 미국 광산기술자 3명을 초빙하여 전국의 광산을 조사하는 한편, 역시 미국으로부터 광산기계를 수입해 채광작업의 혁신을 기도한 바 있었다.
그 밖에도 정부는 권연국(捲烟局) · 양춘국(釀春局) · 철도국(鐵道局) 등을 설립하고 제도와 기술면에서 서구문화를 도입해 정부직영으로 운영한 바 있다. 이상과 같은 정부의 식산흥업정책은 당시 창의성이 높은 다수의 경제관료들에 의하여 발의되고 실천에 옮겨졌다.
한편, 갑오경장 후 서울에서는 여러 은행이 설립되었다. 1896년 조선은행(朝鮮銀行)이 설립되고, 다음 해 한성은행(漢城銀行), 1899년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 그리고 1906년 한일은행(韓一銀行)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은행들은 모두 성공적으로 영업을 계속하였던 것은 아니나, 그 중 한성은행 · 대한천일은행 · 한일은행의 3개 은행은 경영주가 여러 차례 바뀌기는 했으나, 민족계 기업체로서의 계보는 이어져왔다.
이러한 은행의 창립은 관료와 상인자본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은행에 따라서는 상인이 설립을 주도하면서 관료 및 귀족을 참여시키거나 관료가 중심이 되어 상인자본을 규합한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이, 개항 후 서구문화의 유입에 자극을 받아 한국사회에서는 개화운동을 활발하게 펼쳐나갔으나, 당시의 근대화작업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그 중 몇 가지 중요한 것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부의 혁신정책이 봉건적 한계성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1890년대부터 정부는 국정개혁을 시도하였고, 특히 식산흥업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으나, 정책으로는 서구의 기술은 적극 도입하면서도 경제적 자유민주질서의 도입은 의식적으로 기피하였다. 그것은 당시 비교적 혁신적이라 불리던 관료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둘째, 개화기의 상공인들이 근대기업의 경영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였다는 점이다. 1890년대부터 한성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읍에서는 근대적 기업회사 및 생산공장이 다수 건립되었고, 회사나 공장들의 조직은 서구기업을 본떴으나 경영은 전통적 방법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근대서구식 부기(簿記)가 기업회사에 도입된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1903년에 개편된 한성은행에서 비롯된다.
셋째, 일본군국주의의 거센 침략행위에 있다. 청일전쟁 후 일본의 내정간섭은 심화되고 대자본이 적극 진출하였으며, 러일전쟁 후 한국의 정치 · 경제의 대권은 사실상 일제의 수중에 들어갔다.
1905년의 일본인 재정고문의 지휘로 단행된 화폐개혁과 그 뒤를 이은 일본통감부 주도하의 각종 경제개혁과정에서 민족자본은 몰락하였고, 극소수의 잔명을 유지하던 민족기업도 결국 일본인 대자본에 예속되고 말았다.
1910년 우리 나라가 일본의 강압으로 병합된 뒤 우리 민족의 근대적 발전은 크게 제약받았다. 조선총독부는 합병 직후 <조선토지조사령 朝鮮土地調査令>과 <조선회사령 朝鮮會社令>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경제법령을 발표했다. 1912년에 공포된 <조선토지조사령>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8년여에 걸쳐 전국토의 세부측량을 단행했다.
이 조사사업에서 일제는 토지소유권이 분명하지 않다는 구실로 전체 경작지의 12.3%인 35만7000여 정보, 전체 임야의 58%인 294만 정보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편입시켰다.
이러한 방대한 조선총독부 소유의 토지와 산림은 일본의 우리 나라 통치에 있어 주요 재원이 되었고, 또한 우리 나라에 진출하는 일본인에게 그 일부를 헐값으로 불하하여 그들의 경제활동 기반을 닦아주었다.
일제는 또 한국농촌에 대해서는 봉건적 현물고율소작료(現物高率小作料)를 근간으로 하는 소작농체제를 그대로 유지 강화함으로써 농민경제의 향상을 억제하였고 농촌의 근대적 발전을 저해하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인구의 75%는 농업을 주업으로 하였다. 그 가운데 1933년부터 1937년까지의 상황을 보면 55.2%는 순소작인이며, 25.6%는 자작 겸 소작인으로서 그들의 경작규모는 1호당 1정보 미만의 영세농이었다.
1910년 12월에 공포된 <조선회사령>은 일제의 조선상공업정책을 집약적으로 표명한 것으로서, 이 법령이 목적한 것은 조선에 근대공업을 건설하지 않겠다는 데 있었다.
즉, 조선은 일본공업에 대한 원료제공지요, 상품판매지로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법령이 실시된 1910년대에는 조선 내에 진출한 일본인기업의 절대다수는 상사회사였고, 그 밖에 광공업 분야에서는 광산개발과 수출원석을 처리하는 제련공장, 수출면화를 위한 조면공장(繰綿工場)이거나 또는 수출미곡을 위한 정미회사(精米會社)가 고작이었다.
이 <조선회사령>은 1920년에 철폐되었으나 당시 그 철폐의 경제적 배경은 제1차세계대전 후 일본의 경제적 불황을 타개하는 방법으로, 일본 내의 유휴자본을 조선에 옮겨놓고자 한 것이다. <조선회사령>이 철폐되었어도 조선의 공업건설은 활발하지는 않았다.
조선에 진출한 일본의 유휴자본은 군소자본이었고, 그들은 고율소작지대가 보장되고 있는 토지투자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당시 조선의 근대공장공업의 건설은 부진하였다.
1929년 말 조선의 공업노동자수가 10만1900여 명이었다는 점에서도 당시의 근대공업의 실태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밖에 당시 조선 내 근대공업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제지표를 들 수 있다.
즉, 1929년 말 조선의 산업생산액 중 농림 · 수산업은 전체의 78.6%, 광공업은 겨우 21. 4%였다. 그리고 당시 제조회사의 업종비율은 염직공업(染織工業) 4.7%, 화학공업 15.6%, 기계공업 7.1%, 식품공업 43.7%, 기타 잡공업 28.9%였다.
이와 같이 <조선회사령>이 철폐된 뒤에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정책에는 큰 변동이 없었으며, 조선은 여전히 일본의 식량기지와 상품판매지로 개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경제정책에 변화가 온 것은 일본의 만주침략 이후였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의 동북방을 장악하게 되자, 조선은 대륙전진기지로의 새로운 전략적 시각으로 재검토되었으며, 그때부터 조선의 공업화가 진전되었다. 1937년 일본은 중국본토침략전을 개시하였고, 그에 따라 조선 내의 경제체제도 더욱 강화되었다.
전시물자생산을 위한 정책으로서 당시 조선총독부는 식량증산계획의 재실시와 산금(産金)5개년계획(五個年計劃) 및 조선의 중화학공업기지화계획이라는 세 부문에 걸쳐 집중적 개발을 단행하였다.
식량 특히 미곡증산정책은 일본의 식민지조선건설의 기본정책이었고, 따라서 병합 직후부터 조선총독부의 중점사업으로 진행되어왔으나, 1930년대 초 일본농민이 조선미 수입을 심하게 반대하자 조선산미증산정책은 일단 중지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본토침략을 개시하면서 대륙에 진출한 일본군대의 군량충당을 위해 조선미의 필요가 절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총독부는 1938년 다시 산미증식10개년계획을 세우고 강력히 추진시켰으나, 당시는 전시중이어서 화학비료생산의 부진, 농민징용에 따른 농업노동력의 부족 등으로 미곡증산계획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따라서 농민보유미곡의 징발을 강화하여 군량미를 보충했다.
산금정책(産金政策)은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킨 이후 팽창되는 국가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1938년 조선 내에 산금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그 개발을 감행해나갔다. 중화학공업기지화정책은 일본 대재벌의 진출에 따라 1930년대 후기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1936년 삼척개발주식회사를 창설하고 영월과 삼척탄전 개발에 착수했고, 1937년 이래 종래의 일본제철주식회사 · 겸이포제철회사 외에 미쓰비시(三菱)광업주식회사 청진제철소 · 일본고주파중공업주식회사 성진공장 ·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 흥남공장 · 조선이연금속주식회사(朝鮮理硏金屬株式會社) 인천공장에서 제철공업이 착수되었다. 조선마그네사이트개발주식회사도 창설되었다.
이와 같은 국방자원개발과 아울러 금속공업 · 조선공업 · 철도차량공업 · 무수주정공업(無水酒精工業) · 화약공업 · 인조섬유공업 등 중공업이 전력자원과 지하자원과의 연결하에 북조선 일대에 건설되었다.
그 뒤 전쟁이 제2차세계대전으로 확대되어가자, 일본은 소위 결전체제(決戰體制)로서 경제운영의 근본을 규제한 국가계획을 수립하고 모든 국력을 이에 경주할 태세를 갖추었다.
위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일본의 식민지치하에서 우리 나라는 하나의 국민경제단위로서 발전할 수 없었다. 따라서, 우리의 경제활동도 크게 제약을 받았다. 이러한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한민족의 근대적 경제의식은 점차 높아졌고, 또 대중 속으로 확대되었다.
3 · 1운동 이후 민중의 경제참여운동은 여러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한민족의 근대적 경제의식의 발로였다. 1920년 <조선회사령>이 철폐되고 일본의 군소자본이 조선에 진출하여 각종 산업 분야에서 기업활동을 전개할 무렵, 우리 민족은 대중운동으로서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을 전국적 규모로 펼쳤다.
이 운동은 단순한 일화배척(日貨排斥)이 목적이 아니라 민족경제의 자립을 위한 근대기업활동에의 참여를 촉구한 운동이었다.
한편, 당시에 민중의 경제저항투쟁도 활발하였다. 농촌에서는 농민의 협동조합운동이 전개되는가 하면 소작인의 소작쟁의가 일어나 봉건적 고율소작료에 반대하였고, 광산 · 부두 및 공장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투쟁도 치열하였다.
1920년대 초에서 193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우리 민족은 근대기업계로 활발하게 진출했는데, 그것은 3 · 1운동 이후 민중의 경제의식이 높아진 까닭이다.
1938년말 현재 우리 나라 기업회사 총수는 5,413개 사였고, 그 중 민족계 회사수는 2, 278개 사로서 전체 회사수의 40%였다.
이것은 1920년말 현재 한국인 소유회사수 비율이 18.2%에 비하면 그 동안 민족계 회사의 증가는 상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계 기업회사의 성장은 극소수의 회사를 제외하고는 영세기업회사의 수가 증가한 데 따른 것이다.
당시의 민족계 회사 2,278개 사 중 공칭자본금 50만 원 이상의 회사는 50여개 사에 불과하였고, 나머지 대부분의 회사는 자본금 10만 원 미만의 중소기업회사였다.
1938년 말 현재 우리 나라의 일본인 소유 1개 회사당 평균자본액은 30만5000여 원이었으나 한국인소유회사의 평균자본액은 5만3000여 원이었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중엽에 이르는 시기에 한국인의 근대기업계 진출이 활발해졌던 것은, 영세자본에 의한 중소기업 분야에서 겨우 그 활로를 개척해나갔음을 말해 준다.
1937년 일본이 중국본토 침략전쟁을 감행하였고, 다시 태평양전쟁으로 확대함에 따라 일본의 전시경제체제는 강화되었고, 기업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40년대에 접어들어 전세가 불리해지자 국책회사를 설립하고 민간기업체를 그에 통합하는 정책을 단행하였다. 1942년의 <중소기업정리령 中小企業整理令>은 특히 조선인기업체가 정리대상이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민족기업의 몰락은 현저하게 나타났다.
한국사회의 근대적 발전과정에서 세번째의 전환기는 광복에서 시작되었다. 광복 후 우리 민족은 일제지배에서 벗어나 서구제국과 직접 교류하게 됨으로써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의 각 분야에서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광복 후 한국자본주의의 발전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그 전기는 미군정과 자유당집권(제1 공화국), 그리고 극히 짧은 기간의 민주당집권(제2 공화국)의 약 17년간이며, 그 후기는 5 · 16군사정변 후 공화당집권(제3 · 4 공화국)과 그뒤를 이은 제5 공화국의 25년간이 된다.
전기에 해당되는 기간 중 그 초기에는 미군정이 있었고 또 좌우의 사상적 대립이 심했으며, 6 · 25전쟁이라는 혼란과 격동을 겪었으나 거시적인 안목에서 보면 자유민주주의를 도입해 국민경제건설을 시도한 시기였다고 하겠다.
후기에 해당하는 공화당집권 및 제5 공화국의 기간은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의 체제 안에서 정치적인 안정과 경제성장이 모색되어온 시기였다.
광복 직후 한국이 처해 있던 내외정세는 민주국가건설에 결코 유리한 여건이 아니었다. 정치적으로는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어 미국군과 소련군이 각각 남과 북에 주둔하고 있어 국민이 바라는 통일정부가 바로 수립될 수 없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일제가 남기고 간 경제적 유산이 국민경제건설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과거에 한반도 내에 건설된 주요 산업은 대부분 일본인의 자본과 기술에 의하여 건설된 것이었으며, 또 그러한 산업은 일본 내의 산업과 계열화되어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남북한의 분단은 양지역간의 생산체계의 혼란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리하여 광복 직후 남한에 잔존한 공장은 거의 모두 가동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으며, 따라서 비축물자가 바닥이 난 때부터 국민의 일상생활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생산활동은 마비되고 따라서 생활필수품의 품귀현상이 심화되고 있을 때, 그것을 타개하는 긴급대책은 해외로부터 물자를 도입하는 일이었으나, 군정 초기에는 경제행정부서가 정비되지 못해 정상적인 무역의 길도 열리지 않았다. 이러한 실정하에서는 밀무역으로 속칭되는 무허가 사무역(私貿易)이 성행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사무역의 가장 유리한 대상국은 일본이었다. 대일사무역은 주로 연안 어민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그들은 국내에서 물자가 부족하고 품귀물자의 가격이 급등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소형발동선으로 일본을 내왕하며 교역을 했다.
또 하나 특기할만한 것은 중국 정크선(junk船)의 내항이다. 1945년 겨울부터 시작되어 1946년 봄 인천항에 들어온 정크선은 하루에 30∼40척에 달했다.
이러한 초기의 정크무역선은 톈진 · 다롄(大連) · 칭다오(靑島) 등지의 군소상인들이 이끌고 왔으나, 1947년 이후 상해(上海) 등지에서 거상들이 진출하여 양국간의 물자교역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따라서 무역선은 과거의 정크선과 같은 소형선박이 아니고 2000t급 이상의 대형상선이었으며, 교역량도 격증하였다. 또, 상선의 출항지도 마카오 및 홍콩으로 바뀌었으며, 한국에서의 입항지도 인천항과 더불어 부산항에 대거 진출하였다.
이 마카오 및 홍콩무역에서 우리 나라 무역선도 처음으로 등장하였으며, 우리 나라 무역업자는 이 때 처음으로 해외시장진출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광복 직후에는 남한과 북한과의 교역도 있었다. 남북한은 38선을 경계로 양분되어 주민의 내왕은 자유롭지 못했으나, 양지역간의 민간인의 물자교역은 6 · 25전쟁 직전까지 이루어졌다.
남북한의 교역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은 1947∼1948년이며 이때 교역액은 17억 원에 달하였다. 당시 북한으로부터 남한으로 반입된 물자는 명태 · 비료 · 카바이드 · 시멘트 등이었고, 남한에서 북한으로 반출된 물자는 면직물 · 생고무 · 의약품 등이었다.
광복 직후에 남한의 경제생활난을 타개해 준 또 하나의 요인은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원조였다. 미군정 3년 동안 우리 나라는 미국으로부터 약 4억6034만 달러의 원조를 제공받았으며, 이 원조는 점령지역구호계획(GARIOA) 자금에 의한 것으로서, 민생안정을 위한 긴급구호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따라서, 이 원조에 따라 도입된 물자는 식량 · 피복 · 직물 등 가계와 직결되는 생활필수품이 전체금액의 49.2%였고, 그 다음이 농업용품으로 17. 7%로서 비교적 많은 금액이 책정되었다. 그 밖의 물자로는 석유 등의 연료와 철도 · 해운 · 자동차 · 통신용기재 · 의료약품 · 건축자재 등이 도입되었다.
미군정의 기본목표는 당면한 민생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었고, 국민경제건설이라는 긴 안목의 정책은 없었다. 미국이 점령지역의 산업시설을 재건하고 항구적인 민생안정을 기하는 것이 전후 세계경제질서를 회복하는 길이 된다는 시각을 가지게 된 것은 1947년 경부터이며, 이에 따라 점령지역경제재건을 목적으로 경제조정법(ECA)이 제정된 것은 1948년이었다. 그리고 한국이 이 법에 의한 경제원조를 받게 된 것은 1949년 이후였다.
민생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국민경제건설의 개발정책은 정부수립 후에 시작되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같은 해 9월 30일 대통령은 국회에서의 연설에서 신정부의 경제건설은 국민 각 계층을 위한 정책이 될 것이라는 기본방향을 제시하였다.
즉, 정부는 농가경제의 자주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소작제도를 철폐하고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따른 농지개혁을 할 것이라는 것과, 기업활동은 개인의 창의와 경영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 그리고 근로자는 이익균점의 권리를 향유한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이러한 정책방향은 국민을 의식하고 국민의 여론을 반영하고 수립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정부수립 직후에는 이 정책방향에 따라 국민경제건설이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 정부수립에서 6 · 25전쟁에 이르는 불과 2년 여의 단기간에 일부 산업 분야는 신속히 재건되어 광복 전의 생산수준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비교적 일찍 재건된 공업으로는 면방직공업을 들 수 있다. 면방직공업은 정부의 특별한 지원을 얻어서 시설을 복구, 개선하여 1950년 초 방적기 31만6572추(錘), 직포기 9,075기(機)가 모두 가동하게 되고, 새로이 시설을 확장함으로써 일제 말기의 생산수준을 능가할 수 있었다.
이 공업 분야는 광복 전부터 민족계자본의 진출이 활발하였던 것이어서, 타공업 분야에 비해 경험 있는 경영인 · 기술자 및 기능노동력이 풍부하였기 때문이다.
전력 부문에서는 남한은 전적으로 북한으로부터의 송전에 의존하고 있었으나, 1948년 북한이 갑자기 단전하면서부터 남한의 전력사정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발전함(發電艦)을 도입하여 긴급한 사태에 대처하는 한편, 수력과 화력발전소를 건설함으로써 1948년 말 27만2825㎾의 전력을 개발할 수 있었다.
석탄생산의 경우 남한지역의 석탄자원조사를 실시하는 한편, 정부의 재정금융지원으로 개발사업이 진전되었다. 그 결과 1946년 연간생산력이 22만7000여 톤에 불과하던 것이 1949년 말 113만 톤의 증산을 볼 수 있었다.
그 밖의 광업 분야에서는 중석 · 흑연 등이 수출과 관련하여 괄목할 만한 생산성과를 올렸다. 중석은 1946년 겨우 376M/T에 불과하였으나 1949년 말 1,405M/T를 생산하게 되어 주요 수출품의 하나로 등장하였고, 흑연 역시 같은 기간중 204M/T에서 1만5958M/T으로 생산증대를 나타냈다.
6 · 25전쟁으로 인해 남한이 입은 경제적 피해는 생산시설 42%, 공장건물 46%에 달하는 막대한 것이었다. 특히, 격심한 피해를 입은 공업 부문은 경인지방에 밀집해 있었던 섬유공업이었다.
6 · 25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는 생산시설의 파괴만이 아니었다. 전비조달을 위한 막대한 재정지출은 인플레이션을 가속화시켰다. 이 때문에 물가상승은 폭발적이었으며, 1947년을 기준으로 한 도매물가지수는 1950년 6월 348%, 1951년 말 2,294%, 1952년 4,721%, 1953년 말 5,446%로 치솟아올랐다.
이러한 경제적 여건하에서는 기업인의 관심은 장기적 생산활동보다는 단기간 내에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유통 부문에 집중되기 마련이었으며, 전시하의 모험을 수반하는 투기가 성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6 · 25전쟁은 생산시설 및 인적 자원의 파괴, 재정금융기능의 파탄, 불건전한 경제풍토의 조장이라는 악조건을 조성하여 경제건설을 어렵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52년 휴전설이 대두되면서부터 전후복구작업이 시작되었다. 당시 정부는 전재를 복구하고 나아가서는 경제부흥을 기하기 위해서는 빈약한 국내자원에만 의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외국원조를 적극 도입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다수의 전문가를 초청하여 정부와의 협동하에 전쟁으로 입은 재해의 실태를 조사하고 재건계획을 수립하였다.
1952년 2월 한미간에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고, 그 해 12월 경제재건과 재정안정계획에 관한 ‘합동경제위원회협정’이 이루어졌다.
1953∼1961년에 이르는 전후경제복구기간중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은 원조액은 약 22억8000만 달러에 달하였다. 정부는 이러한 외국원조와 더불어 내자조달로서는 산업복구국채 및 산업금융채권 등을 발행하여 경제재건자금에 충당하였다. 이리하여 한국경제는 1954∼1960년에 이르는 기간중 연평균 4.7%의 성장률을 보였고, 특히 공업 부문에서는 12.2%의 높은 성장을 달성하였다.
그 결과 산업구조도 개선되어 제2차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1954년의 14.0%에서 1960년에는 20.5%로 상승하게 되었다. 휴전 후 비교적 급속한 발전을 이룬 공업으로는 역시 섬유공업 분야를 들 수 있다.
섬유공업은 종래의 면방직 및 모방직이 크게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일론 등 신제품의 생산시설도 도입, 건설되어 1957년 이미 국내수요를 자급할 수 있었다.
섬유공업 다음으로 활발한 건설이 이루어진 분야는 화학공업이었다. 충주비료 · 나주비료 등 대규모공장이 건설되었고, 시멘트공업도 삼척공장이 보수된 외에 문경에 신규대규모공장이 건설되었다.
제지공업에서는 새로운 시설이 도입됨으로써 신문용지 등 주요 지물의 국내수요를 자급할 수 있게 되었으며, 고무공업은 종래의 고무신 중심의 생산에서 자동차타이어 · 고무호스 등 신종산업자재 생산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유리공업 부문에서는 1953년 인천에 판유리공장을 건설하였다. 이 밖에 합성수지 · 화학가성소다 및 일반화학공업약품 등 신규제품의 생산시설도 이 시기에 도입, 건설되었다.
그런 반면 1950년대 후반기에 이상비대(異常肥大)한 공업 분야로는 제분 · 제당업을 들 수 있다. 제분업은 1950년대 이래 급속한 발달을 보았으며, 7개 공장이 경합, 건설되어 1960년대 초에는 생산과잉현상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소비재공업 부문이 이 기간에 급속한 발전을 보인 반면, 제철 · 제강 및 기계공업 등 생산재공업 부문에서는 이렇다 할 발전을 보지 못하였다.
제철업에서는 대한중공업에서의 아연광철판 및 철선 등의 생산과 삼화제철공장에서의 고로(高爐) 2기가 보수되어 가동이 시작되었다.
기계공업에서는 한국조선회사의 기존시설이 보수되고 상공부관하의 한국기계제작소가 가동됨으로써 각종 자동차부속품 · 원동기 · 자전거 · 방직기 · 각종 철선 및 공작기계 등 소규모기계공업이 건설, 가동될 정도였다.
이와 같이 휴전 후, 즉 1950년대 후반기의 한국경제는 이전에 비하여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루었으나, 이 시기에 건설된 한국의 공업화는 국민경제라는 시각으로 보아, 그 기틀이 건전한 발전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는 문제점도 많이 드러내고 있다.
즉, 소비재 위주의 공업건설의 치중과 기간산업 부문 건설의 경시, 그리고 원료의 90% 이상을 해외로부터의 도입에 의존함으로써 국내조달이 가능한 원자재의 개발이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는 점 등이다.
휴전 후 경제재건에서 가장 발전이 뒤떨어진 산업 분야는 농업이었다. 공업 부문의 높은 성장에 비해 농업 부문의 성장률은 연 2.3%에 불과하였다.
정부는 1950년 3월 농지개혁을 단행하여 우리 나라 농촌의 고질적인 병폐였던 소작관계를 철폐한 바 있었으나, 불과 3개월 뒤 6 · 25전쟁이 일어나 국토의 3분의 2 이상이 초토화되면서 개혁의 효과는 무산되고 말았다.
농업부진을 초래한 또 다른 요인은 미국으로부터 잉여농산물을 대량 도입한 데에 있었다. 정부는 1955년 5월 한미간에 ‘미잉여농산물도입협정’을 체결하였고, 이 협정에 따라 연평균 60만 톤의 양곡을 도입했다.
이 시기에 도입된 잉여농산물의 대종을 이루는 것은 미곡과 소맥이었으나 원면 · 우지(牛脂) 등도 다량으로 도입되었다. 이와 같은 다량의 양곡도입은 국내곡물가격의 하락을 초래하였고, 농업생산의 수지를 악화시켰다.
이와 같이 광복 후의 경제개발정책은 많은 취약점을 안고 있었으나, 거시적인 안목에서 보면 미군정 3년간에는 민족항일 말기의 전시통제체제를 철폐하고 자유경제체제를 확립하였으며, 그러한 체제하에서 자유당집권 12년간 미국을 비롯한 우방으로부터 경제원조를 얻어 6 · 25전쟁중의 전재를 복구하고 국민경제건설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성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5 · 16군사정변으로 들어선 군사정부가 내세운 통치의 기본방향은 정치 및 경제의 혁신을 단행한다는 데 있었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구정권과 결탁하여 성장한 경제세력을 거세하고, 양심적인 경제인을 육성하여 한국경제건설을 맡게 한다는 것이었다. 군사정부 및 그 뒤를 이은 공화당정부(제3 공화국)가 역점을 둔 정책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성장이었다.
경제성장을 위해 정부주도하의 개발정책이 계획되었으며, 이 정책에서는 정부가 국민경제전반에 적극 개입, 간섭하여 계획된 성장목표를 달성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제운영의 기본방침에 따라 공화당정부는 1962년부터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 실시하였다.
1962년부터 1981년에 이르는 4차에 걸친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1950년대의 경제재건정책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은 정책적 전환이 있었다.
첫째, 1950년대의 경제재건의 중점은 미약하나마 수입대체산업 건설에 두었으나, 1960년대 이후의 개발계획에서는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을 펴나간 것이다. 한국과 같은 협소한 지역과 국내의 빈약한 자원 및 시장으로는 공업화에 한계가 있으므로, 대외지향적인 개발전략을 펴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농업과 공업과의 균형을 이루는 건설보다는 공업 부문을 집중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공업의 발전이 농업에 파급되도록 하고, 공업 부문 안에서도 특정산업을 전략산업으로 선정하여 지원, 육성함으로써 그 밖의 산업의 발전을 유도하는 불균형 성장전략을 펴나간 것이다.
그리하여 1960년대의 제1차 및 제2차 계획기간에는 경공업 부문이, 1970년대의 제3차 및 제4차 계획기간에는 중화학공업 부문이 전략산업이 되었다.
셋째, 1950년대에는 자유경제체제가 추구되어 경제건설은 민간주도형으로 이루어져왔으나, 1960년대 이후 개발전략에서는 정부가 적극 간여하는 정부주도형으로 산업건설을 추진시켜나갔다.
넷째, 1950년대의 경제재건은 미국으로부터의 무상경제원조를 주재원으로 하여 추진시켜왔으나, 1960년대 이후의 개발계획에서는 외자도입을 적극화하여 이를 주재원으로 하는 경제건설을 기도하였다.
미국의 경제원조정책이 1958년경부터 무상원조에서 차관정책으로 바뀐 데 대한 대응책이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해외로부터 차관을 도입하여 전략산업을 건설하였고, 또 외자진출에 대해서도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와 더불어 1965년 오랫동안 현안이 되었던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이룩하여 경제교류의 길을 터놓았다. 이와 같이, 정부는 외자도입을 주재원으로 하는 개발정책을 추진시킴으로써 네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계획에서는 막대한 액수의 차관을 도입하게 된 것이다.
4차에 걸친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성과는 정부가 추구해 왔던 성장목표달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큰 성과가 있었다. 계획기간 동안의 국민총생산의 성장률은 연평균 9.3%라는 놀라운 성장세를 나타냈고, 수출신장률 또한 연평균 39.9%를 보였다.
1978년도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41달러에 이르렀고, 수출은 1961년 5480만 달러에 불과하던 것이 1978년 151억4390만 달러로서 급격한 신장을 달성하였다. 수출의 신장은 이러한 물량증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출상품구성의 다양화, 수출대상지역의 다변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수출상품은 경제재건기였던 1950년대만 하더라도 고령토 · 중석 등 광석류와 한천 · 해태 등 해산물, 그 밖에 식품류가 대종을 이루었으나, 제1차 및 제2차 경제개발기간인 1960년 중반기에 와서는 의류 · 신발 · 합판 등 경공업제품이 점차 수출품으로서 각광을 받게 되었고, 196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전기 · 기계 · 동판 · 합성섬유제품 등이 유망수출상품으로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전략산업이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옮겨짐에 따라 중화학공업제품의 수출상품화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978년 말 현재 우리 나라의 수출상품구성을 보면 경공업제품이 전체의 53.6%, 중화학공업제품이 35.1%, 식료품 및 원료품이 2.9%, 기타 상품이 8.4%로서 중화학공업제품의 수출이 점차 높은 비율로 증대하고 있다.
경제성장면에서는 계획기간중 제2차산업이 연평균 19.1%로서 가장 높고, 그 다음이 제3차 산업으로서 13.6%였다. 그러나 농업을 위주로 한 제1차 산업은 3%도 미치지 못했다.
이와 같이 경제개발계획 기간중 한국의 경제성장은 공업 부문의 성장이 주도해왔고, 공업화의 과정도 경공업 부문에서 점차 중화학공업 부문으로 이동했다.
정부의 수출주도형 공업화전략으로 산업구조도 점차 고도화하고 이를 통하여 확대재생산과 고용증대를 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급격한 성장은 그 과정에서 많은 취약점을 노정시켰다.
첫째, 수출제일주의적 정책은 수출기업에 과도한 지원을 계속하여 기업은 생산확대를 부차적 목적으로 하고, 오히려 정부의 제반지원특혜를 얻기 위한 수출이라는 풍토를 조장하였다.
둘째, 저임금정책에 기초를 둔 수출확대과정은 빈부의 격차를 더욱 확대시키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즉, 각 생산요소의 생산적 기여에 상응하는 대가의 지불이라는 배려가 제도적으로 무시된 채, 임금노동자 또는 농민 등과 같은 생산종사자들에게 일방적인 희생만을 강요한 결과가 되었다. 즉, 1960년대 이후 성장위주의 경제정책하에서는 소득재분배정책이 거의 실시되지 못했다.
셋째, 우리 나라의 농업이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정체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 상태는 미군정과 자유당집권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경제개발계획에서는 우선 농업정책의 일대전환이 필요하였으나 그렇지 못했고, 오히려 다른 산업 부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정부는 제1차 5개년계획에서부터 ‘농업생산력의 확대에 의한 농업소득의 증대’라든가, ‘식량의 자급’ 등을 목표로 세워왔으나, 이 목표달성을 위한 정책적 배려가 미흡하였다.
넷째, 외국자본의 비중이 너무 컸다. 대외지향적 개발전략이 추진됨에 따라 정부의 정책적 투자배분은 수출주도형 산업구조확립을 목표로 진행되었으며, 그 투자재원의 절대량은 해외 부문에서 도입된 것이었다.
다섯째, 1960년대 이후의 경제발달과정에서 우리 나라의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체하였다. 중소기업이 제조업 부문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1978년의 경우 사업체수 96.2%, 종업원수 47.4%인데 생산액에서는 32.7%에 불과하여 사업체수와 종업원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1978년의 경우 국민총여신에 대한 중소기업 대출률은 23.0%, 총정책금융 중 중소기업정책금융비율은 10.1%로서 극히 저조한 수준을 드러내어 중소기업자본의 부족현상을 보이고 있다.
즉, 중소기업정책금융비율이 10.1%에 불과하였다는 점은 중소기업이 정책적으로 소외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공화당정부의 공업화정책이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 없었던 이유는 이와 같은 기술적인 취약점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개발철학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공화당정부의 개발철학은 선성장 후분배(先成長後分配)에 있었다. 그러나 그 개발정책은 끊임없는 성장욕에 치우쳐 분배문제는 항상 뒤로 미뤄졌다.
1962년 이후 경제정책에서는 국민총생산은 크게 늘어났으나 국민의 보다 나은 삶에 대한 욕망은 소외되었던 것이다. 즉, 재원의 분배에서부터 기회균등이 무시되고 소득의 분배 역시 형평을 이루지 못해 사회계층간의 빈부의 격차를 심화시키게 되었다.
광복 이후 우리 국민이 원하던 것은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국가를 수립하는 것이고, 경제적으로는 대중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 국민경제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의 국민경제에서는 그것이 이룩되지 못했다.
우리 경제는 1970년대 말에 이르러 1960년대와 1970년대의 20년 동안 고도성장 과정에서 누적된 여러 문제점들이 일시에 드러났다.
특히, 양적인 경제성장에 치중한 나머지 인풀레이션이 고질화되어 저축을 줄이며 국제수지를 적자로 만들고 생산성향상을 위한 노력을 소흘히 하도록 하는 등의 부작용을 위한 잠재력마저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전반기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경제안정화정책을 실시하였다. 즉, 물가안정과 국제수지의 개선을 위하여 긴축적인 재정 · 금융정잭을 집행하였다.
그 결과 GNP 대비 통합 재정수지 적자는 1976∼1982년의 연평균 3.1%부터 1983∼1986년의 기간중에는 1%로 대폭 축소되었고, 1987∼1988년에는 0.8%의 흑자로 바뀌었다. 총통화(M2)의 증가율도 1976∼1982년의 기간중에는 연평균 30%나 되었으나 1983∼1986년에는 15%로 반감되었다.
이처럼 강력한 안정화정책의 집행으로 1980∼1981년의 기간중 연평균 25% 이상에 이르렀던 물가상승률(소비자물가 기준)이 1983∼1997년 중에는 2.8%로 급속히 안정되었다. 물가안정성으로 임금상승률과 금리도 크게 떨어졌다.
제조업 실질임금의 상승률을 보면 1976∼1979년에는 연평균 18%를 넘었으나 1980∼1987년에는 4.7%로 크게 떨어져서 같은 기간중 노동생산성의 연평균 증가율인 6.7%보다 낮았다.
3년만기 회사채의 수익률로 표시되는 금리도 1980년에는 30%나 되었으나 1986∼1987년에는 12% 수준으로 크게 떨어졌다.
1980년대 전반기에는 강력한 총수요억제정책으로 경제의 안정기반을 다진 한국경제는 1985년의 플라자 합의(Plaza Accord) 이후 전개된 저(低) 달러(즉, 円高), 저금리 및 저유가 등 이른바 3저현상의 도래로 높은 경제성장률과 큰 폭의 국제수지 흑자를 내게 되었다.
예를 들어 올림픽이 서울에서 개최된 1988년에는 GNP의 성장률이 11.3%나 되었고 경상수지의 흑자도 145억 달러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대규모 국제수지 흑자로 말미암아 해외 부분에 의한 총통화의 공급이 크게 늘어나 1988년에는 총통화의 증가율이 21.5%에 이름으로써 1980년대 전반기의 안정기조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
또한, 국제수지 흑자의 누적으로 선진국들의 원화절상 압력이 높아지자 1980년대 후반에는 원화가 큰 폭으로 절상되었다. 예로 1988년에는 원화가치가 달러에 비해 전년 연말 대비 15.8%나 절상되었다.
그 영향으로 수출의 증가율은 통관기준 1988년의 28.4%에서 1989년에는 2.8%로 급감하였다. 이와 더불어 1987년의 민주화 이후 임금상승률도 급속히 높아졌다. 한편, 1989년의 경제성장률은 수출의 급감 등으로 6.4% 수준으로 떨어 졌다.
정부는 1989년부터 주택 200만 호 건설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초과수요 압력이 팽배하여서 1990∼1991년중 물가상승률은 9%대로 뛰었고, 경상수지도 큰 폭의 적자를 내게되었다.
이에 다시 1992년 이후 안정화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기에 이르렀고 그 영향으로 1992∼1993년중 성장률은 둔화되었으나 물가는 다시 안정되었다.
1980년대 이후 경제안정화를 위한 재정 · 금융정책 이외에 금융자율화 · 수입자유화 및 자본자유화 등 각종의 경제자유화정책도 추진되었다.
즉, 지난 20년 동안의 고도 성장기중 정부가 민간의 경제활동에 과도하게 개입하여 각종의 규제를 가한 것이 여러 부작용을 초래하였으므로 이제는 시장기구에 더 많이 의존하는 방향으로 경제자유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첫째, 금융자유화는 고도성장기 동안 정부 주도로 정책금융 위주의 신용할당을 하던 것에서 탈피하기 위한 것이다. 주요 내용은 시중은행의 민영화, 정책금융의 축소, 금융규제의 완화 및 금리자유화 등이다.
금융이 산업정책의 시여(施與)로서 주로 산업지원금융의 성격을 가진 데서 벗어나 금융산업에 개방과 경쟁원리를 도입하여 그 효율성을 높이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각종 금융기관의 중소기업에 대한 의무대출비율의 상향조정 등의 실시로 중소기업에 대한 정책금융 지원이 대폭 확대되었으며, 1984∼1988년의 기간중에는 해외건설 · 해운 · 섬유 · 기계 · 목재업체 등에 대한 부실기업 정리과정에서 은행들이 인수기업에 원금탕감, 이자유예 및 감면, 장기저리의 신규대출 등 대규모의 산업합리화자금을 지원하게 되자 금융자율화는 크게 퇴색하였다.
따라서 1990년대 이후에야 금융자율화는 비로소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금융시장의 개방도 시작되어 외국의 은행 · 보험 · 증권회사의 국내 진출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한편, 1993년 8월에는 금융거래의 실명사용을 의무화하는 금융실명제가 도입됨으로써 획기적인 제도개선이 일어났다. 특히, 1996년부터는 금융소득이 4천만 원 이상인 경우 금융소득에 대한 종합과세가 부과되었다.
둘째, 국내산업의 과보호를 시정하고, 국내경쟁에의 노출로 국내기업의 기술개발 및 품질개선 노력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예시제를 사용하여 국제경쟁력이 있는 품목부터 단계적 · 점진적으로 수입자유화가 1980년대 이후 추진되었다.
특히, 1986년 이후 국제수지가 흑자로 전환되고 그 폭이 커짐에 따라서 1989년에는 한국이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11조 국으로 이행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수입자유화가 크게 진척되었다.
1983년의 수입자유화는 80%이었으나 1994년에는 99%로 늘어났다. 이와 더불어 평균 관세율도 1983년의 24%에서 1994년에는 8%로 크게 떨어졌다. 또한, 비관세장벽도 1980년대 후반 대미무역 흑자의 확대로 한미간 통상마찰이 심화되자 1989년부터 철폐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수입자유화조치로는 공산품에 한정되었고 농산품은 지극히 점진적으로 추진되었다. 비로소 1995년에 세계무역기구(WTO)체제가 새롭게 출범하면서 농산품에 대해서도 비관세장벽을 철폐하고 예외없는 관세화가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우리의 쌀 시장도 개방되었다.
셋째, 자본자유화도 추진되었다. 먼저 1980년대 말에 이르면 제조업 부분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가 전면 허용되어 개방이 완료되었다. 그 뒤에는 서비스 부분의 외국인 직접투자 허용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방조치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직접투자가 한국경제에서 점유하는 비중은 지극히 미미하였다. 외국인 직접투자와 더불어 금융시장과 자본시장의 개방도 시도되었다.
1981년에는 국내 투신사에게 외국인 전용수익증권의 발행을 허용함으로써 지극히 제한적이지만 외국인 증권투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984년에는 외국인 전용투자 펀드인 코리아 펀드(Korea Fund)가 설립되기도 하였으며, 1985년에는 국내기업의 해외전환사채(CD) 발행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를 통털어서 금융 · 자본시장의 개방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으며 엄격한 정부의 통제하에 있었다.
국제수지가 적자였던 1980년대 전반기에는 상업차관과 뱅크 론(Bank Loan)이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자금융통은 엄격히 규제되었다.
예를 들어 기업은 상업차관을 자본재와 원자재의 수입을 위해서만 도입할 수 있었다. 금융기관도 도입된 뱅크 론을 기업에게 외화표시대출로만 운용할 수가 있었다.
국제수지가 흑자인 1980년대 후반기에는 민간기업의 상업차관이나 금융기관의 뱅크 론 도입이 엄격하게 규제되었다. 1992년에는 국내 주식시장에 외국인들이 직접투자할 수 있게 됨으로써 자본자유화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 들었다.
특히, 1993년 이후 미국 등 선진국의 압력으로 금융 · 자본시장의 개방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가입을 위해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한국의 금융기관과 기업들은 해외에서 급속도로 차입을 늘렸다. 1994∼1996년의 기간중 순(純) 외자도입은 무려 523억 달러에 이르렀는데 그 대부분이 상환기간이 1년 미만인 단기 차입이었다.
1997년 중반에 이르면 민간 부분의 단기차입이 외한보유고를 훨씬 초과하게 되었다. 그 해 10월 홍콩의 증권시장이 폭락하면서 전염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외국투자가들에게 한국경제가 취약하게 보이기 시작했고, 이는 신뢰도의 상실을 가져와 갑자기 외자가 유출되면서 한국경제는 외환 위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지난 1980년대, 정부가 자본이동을 엄격하게 규제하였을 때는 갑작스런 단기 자본의 이동으로 인한 국내경제의 교란요인을 차단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1993년 이후 금융 · 자본시장을 자유화하고 개방하면서 일방적으로 자본이동에 대한 규제만 풀고 금융기관의 안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사려깊은 규제와 감독을 하지 않은 것이 외환위기를 일으킨 주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이었다.
1980년대 이후 안정기조의 정착을 위한 재정 · 금융정책과 각종의 경제자유화정책을 추진하는 이외에 산업구조조정정책도 실시하였다. 먼저 1970년대 중반 이후 강력하게 추진된 중화학공업화는 중복 · 과잉투자를 초래했는데 이를 시정하기 위해 투자조정을 단행하였다.
주요 내용을 보면 한전의 수요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업체가 참여한 발전설비 부분을 한국중공업으로 일원화하였다. 또한, 자동차산업의 경우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에 위해 차종별로 전문생산체제를 구축하였다.
디절 · 엔진 · 중전(重電)기기 · 전자교환기 및 동(銅)제련의 경우에도 투자조정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투자조정 조치는 중복 · 과잉 투자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으로 경제합리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흡수 · 합병으로 경제력집중이 늘어나고, 독과점적 시장구조가 심화되는 문제점도 있었다.
산업지원정책도 종전의 특정한 전략산업에 대한 개별적인 세제 · 금융면의 지원에서 탈피하여 불특정 다수기업의 인력개발 · 기술혁신 · 에너지절약 등을 촉진하기 위한 지원처럼 간접적 · 기능적인 지원방식으로 전환되었다.
그리하여 1986년에는 종래의 7개 특정산업(기계 · 전자 · 섬유 · 철강 · 비철금속 · 석유화학 · 조선 등)을 위한 산업별 지원법을 <공업발전법>으로 단일화하였다. 정부는 또한 중화학 투자조정 이후 산업합리화 조치를 실행하였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중반에 해운, 해외건설의 합리화가 단행되었는데 부실회사의 통폐합, 비업무용 부동산의 처분, 설비 감축 등이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각종의 조세 · 금융 지원이 주어졌다. 아울러 78개 부실기업의 정리도 추진되었다.
이 때에도 금융 · 세제면의 각종 지원이 뒤따랐다. <공업발전법>의 제정 이후에는 합리화 대상업종을 지정하여 신규 진입의 제한, 금융지원 등을 합리화지정업종에 대해 실시하였다.
1980년대 이후 추진된 산업합리화정책은 주로 불황산업이나 부실기업의 회생에만 중점을 둠으로써 시장기구의 산업구조조정과는 거리가 있었다.
또한, 부실기업의 정리에 있어서도 과도한 보호와 특혜, 각종 지원 등으로 기업 스스로의 자구 노력보다는 정부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부실기업을 재벌이 인수한 것도 경제력을 집중시켰다. 1980년대 이후에는 또한 농업 부분의 구조조정도 이루어졌다.
먼저 농업정책의 기조가 종래의 주곡 자급에서 농가소득 증대로 전환되었다. 또한 고미가정책이 수정되었으며, 농산품의 수입자유화도 시작되었다.
농가소득의 증대를 위해서는 농촌공업의 육성을 통한 농외소득 증대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를 위해 1984년부터 농공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하였으나 여기에 입주한 대부분의 업체들이 경영난에 봉착함으로써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탈농을 억제하기 위한 농어민후계자 육성도 실효를 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쌀에 대한 보조금 지급의 축소, 수입자유화 및 소 값 파동으로 농가 수지는 크게 악화되었고 이에 따라 부채도 급증하게 되었다. 정부는 1980년대 후반 농어가 부채경감조치를 잇따라 단행하였으나 이는 대응요법에 불리한 것이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으로 농산품의 시장개방 압력이 증대되는 등 농업구조 조정의 필요성이 높아지자 1990년에는 영농규모의 확대를 위한 <농어촌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농지소유의 상한제를 완화하고 임대차의 허용을 추진하였다.
이어서 1994년에는 <농지법>을 만들어 농지소유의 상한제를 철폐하였고 농지의 거래 이용에 관한 규제를 완화하였다.
또한, 1992∼2001년의 10년 동안 모두 42조 원을 농업 부분에 투자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농어촌구조 개선대책도 발표하였다. 이는 농축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농정의 주된 목표로 삼는 것으로서 개방화시대에 처하여 바람직한 방향설정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곡물의 자급률이 지난 1965년의 94%에서 1996년 말 현재에는 30% 수준도 못미치고 있는 현실을 상기 할 때 정확한 규모의 농업을 유지하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하겠다. 특히,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자국의 농업보호정책을 견지하고 있음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80년에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였다. 즉, 공정거래법을 제정하였다. 지난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화는 독과점적인 시장구조를 초래하여 경쟁적인 시장환경이 크게 위축되었는데 공정거래법은 바로 이를 시정하기 위한 것이다. 그 주요 내용은 시장지배적 지위의 남용금지, 경쟁제한적 기업결합의 제한, 공동행위와 불공정거래행위의 금지 등이다.
또한, 1986년에는 공정거래법을 개정하여 재벌의 경제력집중을 실질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장치인 지주회사의 설립금지, 계열사간 상호출자의 금지, 출자총액의 제한 등을 추가로 도입하였다.
아울러 재벌에 대한 편중여신의 억제도 별도의 예산관리제도를 이용하여 실천에 옮겨졌다. 1992년 다시 공정거래법을 개정하여 재벌계열사간 상호채무보증을 규제하였다.
아울러 주력업체제도도 도입하였다. 1994년에는 업종전문화를 유도하기 위해 주력업체 대신 2∼3개의 주력업종을 선정하여 여신관리를 완료하기도 하였다. 공정거래법의 실시에도 불구하고 공산품시장의 경우 지난 1990년 현재 독가점형 시장의 비중은 64%로서 선진국에 비해 매우 높다.
또한 30대 재벌 또한 대규모기업집단의 부가가치가 광공업 부분의 총부가가치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985년에는 33.1%이었으나 1992년에는 31.6%로서 다소 떨어졌으나 아직도 높은 편이다. 또한, 우리 나라 GNP의 약 5분의 1이 30대 재벌에 의하여 생산되고 있다.
이상 살펴본 것처럼 1980년대 이후에는 경제안정화를 위한 재정 · 금융 정책의 실시, 각종의 경제자유화정잭의 추진, 산업구조 조정정책의 실시 및 공정거래법의 제정 등을 추진하였다.
그 방향은 경제의 안정기조 아래서 정부의 개입을 줄이며 각종 규제를 완화하고 산업합리화를 이룩하여 시장개방과 경쟁요소를 증대시키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한국경제의 발전단계가 진보함에 따라 이러한 방향전환은 바람직한 것이다.
지난 1962년 공업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뒤 1997년 11월 외환 위기를 맞기까지 한국경제는 급속한 고도성장과 괄목할만한 구조적인 전환 및 형평의 증진을 동시에 달성한 성공사례의 하나였다. 동아시아의 기적을 이룬 여러 나라들 중에서도 선두주자에 속하였다.
1995년에는 경상가격 기준 1인당 GNP가 1만 달러를 넘어섰다. 또한, 1995년 현재 GNP규모로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으로 탈바꿈하였다. 같은 해 교역량은 세계 12위이며 1인당 GNP도 32위에 이르렀다.
1996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가입하였다. 지난 35년 동안의 급속한 선진국 따라잡기 과정에서 실수와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성장만을 추구하다 보니 물가안정을 소흘히 하였으며, 공업화에 역점을 두어 농업 부문이 개방화시대에 구조적으로 취약하였다.
조립 · 가공공업과 부품 · 소재공업이 균형적인 성장을 하지 못해 기계류와 부품의 해외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으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균형성장을 못하였다.
사치적이고 낭비적인 서비스 부분이 과잉 팽창했으며 기술력이 아직도 크게 뒤떨어져 있고 수도권에 경제활동이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으며, 생활의 질이 크게 훼손된 것 등이 몇 가지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부작용 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도성장을 이룩한 데 대해서는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특히 지난 반세기 동안 수많은 후진국들 가운데 동아시아의 극소수 국가들 만이 경제성장에 성공했음을 볼 때 더욱 그렇다.
한국이 성공한 요인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성실 · 근면 · 절약을 중시하는 정통적인 동양의 유교사상에 의해 지배되는 교육수준이 강하고 풍부한 인적자원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 밖에 우리의 여건에 맞는 수출촉진을 위주로 하는 대외지향적인 경제발전전략을 채택한 것도 성공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선진국의 문턱에서 불어닥친 외환위기는 한국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금융의 세계화가 몰라볼 정도로 이루어진 상황에서 동남아의 위기는 한국으로 급속히 전염되었다. 이는 현재의 국제금융제도가 지니고 있는 구조적인 취약점이다.
설령 어떤 나라의 경제적인 기초가 건실하다고 할지라도 다른 나라의 위기는 흡사 가축 떼 처럼 움직이는 외국 투자자들의 행태로 말미암아 건실한 나라로부터 급작스런 자본유출을 초래할 수 있고, 이는 그 나라를 위기에 빠뜨려 수많은 무고한 선량한시민들에게 실직 · 도산 · 소득감소 · 물가상승 등 엄청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다.
이러한 전염효가가 외환 위기를 초래한 대외 요인이라면 고비용 · 저효율 체제의 장기간 방치는 외환 위기의 내부요인이다. 특히, 지난 1987년의 민주화 이후는 10년 동안 임금 · 금리 · 물류비용 및 토지가격이 높아 고비용이 체질화된 반면에 정치 · 정부 · 기업 및 사회일반에 저효율은 만연하였다.
그 결과 국제경쟁력은 실추되었고 무역 수지적자는 쌓여갔으며 외채는 누적되어 외환보유고도 지극히 낮은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대만 · 홍콩 · 싱가포르 등 나머지 세 호랑이들이 전염효과에도 불구하고 우리보다 훨씬 덜 타격을 입은 이유는 바로 충분한 외환보유고의 축적에 힘입은 바 크다.
고비용 · 저효율이 문제임을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으나 이를 바로잡지 못한 이유는 엄청난 고통과 저항이 뒤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제 때에 스스로 고비용 · 저효율 체제를 개혁하지 못함으로써 외환위기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이제 IMF는 거시적인 경제안정화정책 이외에 금융 · 기업 · 노동 부분에 대한 강도높은 미시적인 구조조정을 요구하게 된다. 대부분의 개혁안은 원래 우리가 실행하였고 했던 것들이 반대와 저항에 부딪쳐서 유보되었던 것이다.
외환 위기 이후 1년여 동안 상당한 개혁이 이루어졌다. 금융 부분에서는 부실 금융기관의 폐쇄, 금융기관간의 인수 · 합병, 제일 · 서울은행의 해외매각, 부실채권의 정리, 건전 금융기관의 증자, 고용조정 등이 실천에 옮겨졌다. 이를 위해 64조 원의 재정지원이 집행되었다.
한편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 정리해고제가 도입되었다. 재벌개혁에서는 부실기업의 정리, 생존가능한 대기업의 검정, 투명성의 확보를 위한 결합재무제표의 작성, 상호채무보증의 금지, 부채 자본비율의 축소, 소액주주의 권한 강화, 책임경영체제의 확립, 외국인에 의한 적대적 인수 합병(M&A)의 허용, 책임역량을 지닌 분야에의 집중 등이 추진되고 있다.
이러한 개혁조치는 지난 35년의 관행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으로서 평상시에는 실천에 옮기기가 지극히 어려운 것들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한국경제의 국제경쟁력을 높이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외환 위기 이후 1년이 지나면서 외환율 · 금리 · 주가지수가 나타내듯이 금융시장은 급속도로 안정을 회복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경제가 입은 타격의 강도에 비추어 완전한 회복에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