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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대동계
영암 대동계
촌락
개념
우리 나라에 보편적으로 존재하였던 협동단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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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우리 나라에 보편적으로 존재하였던 협동단체.
내용

한자로 ‘계(稧)’ 또는 드물게는 ‘계(禊)’라고도 쓰인다. 계는 농촌주민의 필요에 따라 예로부터 자생적으로 발생, 유지된 집단인데, 두레·품앗이보다 보편적이고 활발한 것이었다.

계는 그 기원이 불확실하고 종류가 다양하며 기능도 복잡하기 때문에 그 개념을 간단히 정의하기는 어렵다. 많은 주장들이 있지만, 계는 계원의 상호부조·친목·통합·공동이익 등을 목적으로 일정한 규약을 만들고, 그에 따라 운영된다는 점에 대체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계는 공동의 목적과 존립을 위하여 식리(殖利)를 하지만, 식리계를 제외하고는 식리 자체가 목적인 예는 드물었다. 계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계는 공동체라기보다는 이익집단 내지 기능집단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계는 촌락이나 도시와 같은 지역사회 자체가 아니라, 지역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특정한 이해 또는 여러 가지 이해를 공동으로 추구하기 위하여 조직된 하나의 집단인 기능집단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계의 종류는 ‘셀 수 없을 정도’라고 하였을 만큼 많았다. 1938년의 조사에 따르면 명칭이 다른 것만 하여도 480종류나 있었다. 계의 분류는 조직 목적, 외적 형태, 기능 등을 기준으로 하였다. 특히 기능에 따랐던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계가 동시에 여러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가 하면, 같은 명칭의 계가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계의 기능을 엄정하게 분류하는 것은 어렵다. 예를 들면 오락이나 친목 등을 목적으로 하는 계라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모두 경제적인 문제를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여러 분류를 종합하면, ① 생산·식리·공동구매 등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적 집단:농계(農契)·보계(洑契)·식리계·구우계(購牛契), ② 동리의 공공비용의 마련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 집단:동계(洞契)·보안계(保安契), ③ 계원의 복리 및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복지적 집단:혼상계(婚喪契)·혼구계(婚具契), ④ 조상의 제사 혹은 동제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 집단:종계(宗契)·문중계·동제계, ⑤ 계원 자제의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적 집단:학계(學契)·서당계, ⑥ 계원의 친목과 오락 등을 목적으로 하는 친목·오락 집단:시계(詩契)·문우계(文友契)·동갑계·유산계(遊山契)와 같이 경제·정치·복지·종교·교육·오락의 여섯 개 범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계의 기원을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학설이 여러 가지이고 현재까지 어떠한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계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19가지로 나누어보는 설이 있다.

① 원시공동체적 원생조직설(原生組織說), ② 원시공산체적 상호부조설, ③ 원시촌락공동체적 생산관계설, ④ 촌락공동체 부담의 공동해결조합설, ⑤ 고대촌락의회설, ⑥ 고대종교의례설, ⑦ 두레설, ⑧ 향도설(香徒說), ⑨ 가배설(嘉俳說), ⑩ 토지신의 제사와 결부된 지연적 촌락조직설.

⑪ 친목적 회연설(會宴說), ⑫ 조합설, ⑬ 길드설, ⑭향약설, ⑮ 고려 말 호포제설(戶布制說), ⑯ 조선시대 군포제설(軍布制說), ⑰을 합친 납세단체설, ⑱ 봉건적 악정에 대한 자위적 대항조직설, ⑲ 전자본주의적(前資本主義的) 고리대자본에의 대항조직설, ⑳ 자연발생설 등이다.

여기에 공동체설을 더하면 20가지나 된다. 이러한 분류만으로도 이제까지의 계에 대한 학설이 얼마나 혼란되어 있는가를 알기에는 충분하다.

계의 발생시기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삼국 이전에 성립하였다는 설, 신라시대 성립설, 고려시대 성립설, 조선시대 성립설 등 시대설정이 다양하게 주장되고 있어 추정하기 어렵다. 특히, 조선시대 이전의 자료는 드물기 때문에 계의 기원에 대한 학설이 더욱 분분하다.

조선시대의 계는 민족항일기에 들어 상당한 변화를 경험한다. 1926년과 1938년에 행해진 조사를 중심으로 이러한 변화의 양적인 여러 측면을 살펴보면, 우선 이 기간 동안에 계의 수가 2만에서 3만으로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각종 계의 전체 숫자에 대한 비율을 보면, 공공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계와 오락을 목적으로 하는 계는 그 비율이 증가한 반면, 다른 계들은 그 비율이 감소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계원수에서도 동일하다.

계의 약 60%가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계이고, 가입하고 있는 사람의 약 50%가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계에 가입하고 있음을 볼 때, 상호부조가 가장 중요한 계의 기능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능은 조선시대의 계에 있어서도 일차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1938년 계원수가 약 90만 명이고, 계당 평균인원은 약 30명으로 1926년보다 평균인원이 감소하였다.

또 조선시대와 비교하면, 금융을 목적으로 하는 계의 평균인원이 다른 계의 평균인원보다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계의 재산으로 보면,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계는 현금은 적었다.

그렇지만 토지가 많았기 때문에 여타 목적의 계보다 우월하였다. 평균인원에서는 금융을 목적으로 하는 계가 가장 많았고, 다음에 공공사업·산업·부조·오락을 목적으로 하는 계 등의 순이다.

계의 재산형태는 현금·토지·곡물·가축·혼상구·농구 등 매우 다양하였다. 일제는 직접·간접의 양면정책으로 계 활동에 간여하였다.

즉, 지방관청으로 하여금 계를 항상 감독, 감시하게 하였고, 특정 종류의 계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보호·조장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 계의 발달을 저지하였다.

즉, 일제는 하층계급의 금융개선을 꾀한 식리계·산통계(算筒契)·작파계(作罷契) 등을 금압하였다. 반면에 민족항일기에 가장 대표적인 계는 금융조합의 하부조직인 식산계(殖産契)가 있다. 식산계는 생산품의 판매, 필수품의 구매, 공동시설건설 등의 사업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정책이 전래의 후진적 생산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려는 것보다는 오로지 한국을 상품시장화 하는 데 치중하였으므로 전통적인 계는 식민지적 상업자본주의에 이용 당하도록 재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계의 식리적 기능은 전기적 고리대와 자본주의사회의 고리체계(高利體系)에 의지된 형태로 변질되어 우리 민족을 궁핍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의 계첩(契帖)을 보면 크게 나누어 서(序)·입의(立議)·좌목(座目)·발(跋)로 구성되어 있다. 서는 완의(完議)라고도 하는데, 계를 설립한 유래·목적·역사·효과 등을 적었다.

입의는 절목(節目)·계헌(稧憲)·범례·조약·규약 등으로도 불렸는데, 준수해야 할 항목들을 나열한 것이다. 이에는 감독 규정, 임원의 선출, 임원에의 예의 등이 포함되기도 하였다.

좌목은 계원의 명부로, 계원의 신분이 양반인 경우는 생년의 간지·호·본관 등을 기재하였다. 발은 계 성립의 전말 등을 기입한 것으로, 대개는 양반들의 계일 경우에 작성된다.

이 밖에도 계첩에는 계 재산의 수지(收支), 재산목록과 소유전답 등의 기록이 있는 것도 있다. 민족항일기에는 계의 규약이 ‘장(章)’과 ‘조(條)’로 나누어지고, 그 내용을 상세히 규정하는 등 근대적인 회칙 내지 정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현대의 규약도 이와 비슷하다.

이와 같은 계첩의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조선시대 계 조직의 범위는 대개 한 마을을 넘지 않지만, 그보다 넓은 범위의 거주자로 구성되는 경우도 있었다.

계원의 자격은 한정되는 경우와 한정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는데, 계원자격에 어떤 한정이 없는 경우는 대부분 주거지에 따라 계원이 되었던 것 같다.

계원의 수는 최하 2명부터 최고 수백 명까지 매우 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 대체로 송계·동계·학계 등은 구성원수가 크지만, 상호부조나 금융을 목적으로 하는 계는 그 구성원수가 적다.

한편 구성원수의 다소와는 상관없이 그 수가 한정·불변인 경우와 한정되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면 상계나 교유계는 계원수를 한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계에는 계장(契長)·유사 또는 도가(都家)·장재(掌財)·서기 등이 있었다.

계장은 계를 대표하여 내외에 업무상의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연장자로 재산과 신망이 있는 자가 선출되었고, 임기나 보수가 따로 정해지지는 않았다.

유사는 실제로 계의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으로, 역시 계원 중에서 뽑는다. 계의 업무는 대개 유사의 집에서 집행되며, 유사는 약간의 수당을 받고 1∼2년의 임기가 정해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계의 사무소를 도가라고 하였는데, 유사를 도가라고 부르는 일도 있었다. 장재는 재산의 보관과 현금의 출납에 종사하는 사람이고, 서기는 장부·문서 및 기타 잡무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계원이 선출하기도 하고 계장이나 유사가 촉탁하기도 하였으며, 대개는 유급(有給)이었다.

한편 계의 규모에 따라 유사가 장재와 서기를 겸하기도 하고, 장재와 서기를 따로 두기도 하며, 또는 장재가 서기를 겸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임원의 직무와 권한은 계 목적의 수행이나 기금의 대출에 그치지 않고, 규약상 벌칙을 범한 계원을 처벌하는 데까지 미쳤다.

계에의 가입에는 강제로 가입하게 하는 경우와 임의로 가입하는 경우가 있었다. 전자는 동계나 기타의 공공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계의 경우이고, 후자는 저축계나 오락계 등 보다 개인적인 목적의 계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계에의 추가가입인 신입(新入)이 허락되는 경우에 그 가입조건은 계에 따라서 여러 단계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계첩을 보면, 첫째 추가가입자의 인품을 문제로 하는 경우, 둘째 설립 당시의 가입과 조건이 같은 경우, 셋째 자제 등의 계입(繼入)을 무조건으로 우대하는 경우, 넷째 신입계원에 대하여 더 많은 부담을 요구하는 경우 등이 있었다.

한편, 계원의 탈퇴는 절대금지하는 경우와 허락하는 경우가 있다. 전자의 예로서는 1778년(추정)의 가좌동(可坐洞) 금송계(禁松契)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여기에서는 “추가가입은 되나 탈퇴는 안 됨.”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탈퇴를 금지하는 경우라도 계원이 사망하면 자연히 탈퇴되며, 계규약을 문란케 하여 출계(黜契) 또는 삭출(削出)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계의 존속기간과 해체는 일반적인 경우 그 존립의 연한을 특별히 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금융을 목적으로 하는 계는 존립기한을 정하기도 하였다.

존립연한을 정하지 않은 영구적인 계라도 계의 재산이 모두 없어질 때에는 자연히 소멸하게 되었는데, 공공사업계·부조계·오락계 등이 이에 속하였다. 금융계와 같이 존립연한을 정한 경우는 그 기간이 만기가 되면 해산하였다.

이러한 계는 재산이 모두 없어졌더라도 임의로 해산되지는 않았다. 다음은 일정한 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계가 그 사업이 이루어졌을 때 해산하는 경우로 우계(牛契)가 있었다.

이러한 유형 이외의 계들은 임의로 해산하였다. 오락계 등이 그러했다. 다만 계원 과반수의 동의를 요하였다. 일반적으로 종계·문중계가 가장 오래되었는데, 1926년 조사에서는 300∼400년 동안 존속된 경우가 보고되었다.

어떤 계에서나 계원의 출자(出資)가 있었다. 출자는 현금과 현물(곡류) 및 노동력으로 출자하는 것, 이 세 가지 중 2∼3종이 합쳐진 것 등이 있었다.

조선시대 계첩에서는 곡물이 제일 많고 현금이 그 다음인데, 후기로 올수록 현금출자가 증가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한편 출자형식으로는 대략 다섯 가지를 들 수 있다.

즉, 계를 창설할 때 한 번에 출자하는 일시출자, 매년 또는 매월 정기적으로 출자하는 분납출자, 길흉사 등 필요할 때 현금 또는 현물로 출자하는 수시출자, 일정기간 적립하는 적립형, 계의 창설 당시와 길흉사 등의 유사시에도 출자하는 복합형 등이 그것이다. 사교친목계와 같은 계의 경우 일시출자형이 가장 많았고, 창설시 출자와 유사시 출자의 복합형이 다음으로 많았다.

반면에 동계·송계 등의 계는 분납출자형이 많았다. 출자의 비율은 균일한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계의 성질상 차등출자의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모인 계의 재산은 계원의 공유이며, 유사·도가 등의 임원이 관리하고, 소유 혹은 소송은 계장의 명의로 한다. 재산의 보관·관리에 대한 감시는 일반계원들이 하였을 뿐, 따로 감독기관을 두지는 않았다.

이러한 계의 재산을 대여하여 획득한 이윤, 혹 그것이 모자랄 때는 원금의 일부가 계가 목적하는 사업에 충당되었다. 재산의 이용, 즉 대부는 계원에 한정하는 경우, 비계원에 전적으로 한정하는 경우, 비계원도 가능한 경우, 계원간에 윤번제로 받는 경우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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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미디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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