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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훈제(桂勳梯)

    사회구조인물

     해방 이후 민족수호협의회 운영위원,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등을 역임한 사회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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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해방 이후 민족수호협의회 운영위원,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등을 역임한 사회운동가.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본관은 수안(遂安). 평안북도 선천 출신. 아버지 계봉집(桂鳳集)과 어머니 이형저(李亨姐)의 5남매 중에 막내로 출생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선천신성(神聖)학교를 졸업한 뒤, 1943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하여, 1948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재학중에 학병징집을 거부하다 강제징용을 당해 노역하던 중, 비밀리에 ‘민족해방협동당’에 입당하여 독립운동을 벌인 것을 시발로 하여 평생을 자유와 평등의 실천가로 살았다.
    영역닫기영역열기활동사항
    해방 후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회장으로 백범 김구(金九)의 민족주의 노선에 서서 반탁운동, 남북협상의지지 등 우익학생운동을 주도하였다. 4·19혁명 후 한국교원노동조합 총연합회 서울지구 중앙위원으로서 교원노조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5·16군사정변 후 군사독재와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였고, 함석헌(咸錫憲)·장준하(張俊河) 등과 함께 자유언론수호협회를 결성하여 언론의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였다.
    1970년 함석헌이 ‘씨ᄋᆞᆯ의 소리’를 창간하는데 참여하여 1979년 폐간될 때까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1969년 박정희정권에 대항하여 3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 상임운영위원을 역임하였고, 1970년 박정희정권이 종신집권을 기도할 때 함석헌·이병린(李炳璘)·천관우(千寬宇) 등과 함께 주도한 민족수호협의회 운영위원직을 맡아 민주화운동을 벌였다.
    1973년 구화고등공민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1975년 긴급조치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으나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1979년 윤보선(尹潽善)·함석헌·김대중(金大中)이 공동의장을 맡았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의 운영위원으로 일했다. 1982년 이른바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으로 2년 여의 피신과정 후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제5공화국 시절 내내 민주화투쟁을 이끌었고,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상임공동대표를 맡아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선도하였다. 인도주의와 이상주의를 배경으로 하는 진보적 민족주의를 사상적 배경으로 하여 인간을 억압하는 제도와 관행에 일관되게 저항해 온 지조있는 삶을 산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2000년)
    한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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