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2월 3일부터 12월 5일까지 국립공주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1998년 7월 28일 공주정지산백제유적이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후 2006년 11월 6일에 공주정지산유적으로 명칭을 바꿔 국가 사적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유적은 무령왕릉(武寧王陵)이 위치한 정지산의 북쪽자락이며 금강 쪽으로 돌출되어 나온 구릉의 정상부와 남·북사면에 있다. 이 유적의 북쪽과 서쪽은 금강(錦江)에 면해 있고 동쪽은 저습지가 이어지고 있다. 이 능선 정상부의 해발고도는 57m 내외이며, 남쪽을 제외한 3면은 경사도 60° 이상의 급경사면을 이루고 있으나 정상부(해발 57∼58m 내외)는 약 800여 평의 평탄지가 형성되어 있다. 바로 이 곳에 기와를 사용한 중심건물이 위치한다. 이 돌출부는 생토면이며, 흙을 북돋운 것이 아니라 주변을 L모양으로 삭토해 만들었다. 이 유적 주변에는 공산성과 옥녀봉산성 등 방어시설이 있고, 송산리분묘군과 교촌리고분군(校村里古墳群)이 있다.
이 유적은 앞 시기의 움집자리(竪穴住居址)와 지상 가옥을 모두 철거한 후에 능선 정상부를 평탄하게 조정하고 내부에 건물을 세웠으며, 호(壕)와 목책(木柵)을 시설하여 외부와 격리시켰다. 중심부에는 기와를 사용한 지상식 건물 1동(棟)이 배치되고, 그 주변에 단층의 부속건물 7동을 세웠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나무기둥을 이용한 울타리로 구획하였고, 그 바깥쪽에는 호와 목책을 시설하였다. 내부 울타리용 나무기둥은 방형(方形)을 사용하였으며, 외부 목책은 원형 또는 말각방형(抹角方形)의 나무기둥을 사용하였다.
또한 능선의 정상부와 남사면의 윗부분에는 말각방형 혹은 타원형의 깊은 구덩이(竪穴)가 배치되어 있는데, 내부에 직경 1m 내외의 둥근 구덩이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정지산 유적의 출입구로 판단되는 서쪽 끝 부분에는 단면이 복주머니 형태의 저장혈(貯藏穴) 15기 이상이 중복되지 않고 밀집되어 있다.
기와건물지는 능선의 중앙에 배치되어 있는데 사방을 ‘L’자 모양으로 깎아낸 다음 그 돌출된 공간상에 건축하였다. 기와건물의 규모는 장변 8m, 단변 6m로 기둥을 3열로 배치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제1열은 한 변에 9개의 기둥을 세워 총 32개의 기둥을 배치하고 약 51.2㎡의 내부 공간을 만들었다. 제2열은 한 변에는 3개의 기둥을 세우고 세 변은 각기 2개씩의 기둥을 세워 모두 9개의 기둥을 세웠는데 제1열보다 안으로 조금씩 들여세웠음으로 기둥간의 간격은 거의 밀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제3열은 네 모서리에 각기 1개씩 모두 4개의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간의 간격은 장변 2.2m, 단변 1.4m이다. 일반 건물과는 달리 기둥을 받쳐주는 적심(積心)과 초석(礎石)이 없다. 건물의 상부에는 기와를 올렸는데, 와당(瓦當)은 대통사지(大通寺址) 출토품과 비교되는 소형의 8엽단판연화문와당(八葉單瓣蓮花文瓦當)을 사용하였으며, 기와는 소문(素文)의 평와(平瓦)가 대부분인데 매우 얇고 소성(燒成)이 좋은 상태이다.
대벽건물지(大壁建物址)는 기와건물지의 후면과 남사면에서 7기가 확인되었다. 이 건물은 먼저 4벽이 들어갈 곳에 구(溝)를 방형으로 파고 큰 기둥을 세울 위치에 기둥구멍을 다시 파서 기둥을 세운 후 그 사이에 작은 기둥을 촘촘히 박아 벽체를 만들었다. 70㎡ 전후의 내부공간에는 기둥이 없어 벽체의 힘만으로 건물이 지탱하도록 만든 단층 건물로 파악되고 있다. 정상부의 3동(棟) 중 1·3호 건물지와 2호 건물지는 목책으로 구획되어 있으며, 방향도 차이가 나고 있다. 1·3호 건물지는 기와건물지와 주축방향이 동일하지만 2호 건물지는 규모도 조금 작고 형태상의 차이점도 있어 용도상에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2호 건물지 내부에서는 목책공이나 기둥구멍(柱孔)이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 1호 건물지의 규모는 가로 8.2m, 세로 7m, 깊이 0.35∼0.6m이며, 네 모서리와 벽광의 가장자리에 밀착하여 9개의 큰 기둥구멍이 시설되었는데, 기둥구멍의 직경은 0.8m 내외이고, 깊이는 0.48∼0.92m이다. 이 큰 기둥구멍 사이사이에서 직경 0.15m 내외의 주흔(柱痕)이 조밀하게 확인되고 있다. 4∼7호 건물지는 후면에 배수시설을 하고 있으며, 5호 집자리에는 석재받침 2개가 확인되었고, 6호 집자리에서는 기둥구멍 내에서 석재받침 4개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2호 건물지에서 뚜껑접시의 접시(杯), 적갈색 연질의 등잔(燈盞), 적갈색 연질 독편(甕片) 등이 출토되었다.
구덩이유구(竪穴遺構)는 능선의 정상부와 남사면의 윗부분에서 6기가 확인되었는데, 2호의 타원형과 3호의 장타원형을 제외하고는 모두 평면이 말각방형의 형태를 하고 있다. 또한 1·3·4호는 바닥에 원형구덩이가 시설되어 있고, 2·6호에는 타원형구덩이가 시설되어 있으며, 1호와 6호에는 배수시설이 있는데 1호는 서쪽모서리에 터널형의 배수시설을 갖추고 있다. 1호 구덩이유구의 규모는 길이, 너비, 깊이가 5.02×5.68×1.57m이며, 2호는 5.3×4.1×1.7m, 3호는 6.8×4.58×1.0m, 4호는 4.32×3.86×1.6m, 5호는 4.7×4.3×2.3m, 6호는 2.8×2.6×0.6m이다. 출토유물은 1·5호 구덩이유구에서 출토된 기대편(器臺片)을 비롯하여 개배의 배(杯)와 개(蓋), 고배편(高杯片), 삼족토기(三足土器), 발(鉢), 옹편(甕片), 유공호구연부편(有孔壺口緣部片), 장경호구연부편(長頸壺口緣部片), 호저부편(壺底部片), 철기편, 수키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1호에서 출토된 기대편은 회청색 경질 기대편으로 정부(頂部)와 경부(頸部)에 해당하는데, 현 높이는 24.6㎝이다.
목책열(木柵列)은 여러 줄이 확인되었는데, 능선의 정상부에 있는 책공(柵孔)은 평면이 방형이며 비교적 큰 편이며, 남쪽 사면(斜面)의 책공은 평면이 원형이며 비교적 작고 조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북쪽 사면은 목책이 시설되지 않았는데, 남쪽 사면에 비하여 급경사를 보이고 있다.
남쪽 사면에서 2개소의 성토면이 확인되었는데, 성토면A는 23호 집자리 부근의 자연계곡부에 형성되어 있는데, 상하길이 14m, 좌우폭 7m 정도의 면적에 성토가 이루어졌으며, 안정된 성토층 내에서 기대편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성토면B는 16∼19호 집자리 부근에서 확인되었는데, 점토와 사질토를 교차하여 단단하게 쌓아올렸다. 이 성토면 내에서 사격자전편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집자리(住居址)는 능선의 정상부와 남쪽 사면에 35동(棟)이 분포되어 있는데, 네벽에 기둥을 세운 것과 기둥을 많이 세운 것으로 구분된다. 평면은 일부 원형도 있었을 것으로 파악되나 대부분 방형이나 장방형이다. 구덩이가 깊게 남아 있는 것은 정상부에 시설된 33호 집자리 1동뿐이며, 대부분은 자연적으로 삭평되거나 인위적으로 삭평되어 집자리의 사면은 높은 쪽 어깨선 일부만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배수시설과 바닥시설 등이 미비되어 있고 동일한 곳에 5∼6회에 걸쳐 집자리가 집중적으로 중복되어 있는 양상으로 본다면, 한번 만들어진 집자리의 사용연한이 길지 않았고, 35동 중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집자리의 수는 10여 동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면에 입지한 집자리는 대부분 많이 유실되었으나 정상부에 남아 있는 집자리의 경우 출입시설과 부뚜막 시설이 잘 남아 있다. 기둥의 배치는 네 모서리를 중심으로 벽에 붙어 있는 경우가 많았고, 기둥을 조금 안으로 기울여 세웠다. 집자리 주변에는 단면이 복주머니처럼 생긴 저장혈(貯藏穴)이 1∼2기씩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집자리 내부에서는 그릇받침편(器臺片), 바리(鉢), 완(완), 굽다리접시(高杯), 세발토기(三足土器), 뚜껑접시(蓋杯), 항아리(壺) 등의 백제토기가 비교적 많이 출토되었다. 이 중 세발토기, 굽다리접시, 목긴항아리뚜껑(長頸壺蓋)의 연대관으로부터 집자리의 중심연대는 5세기 후반∼6세기 초가 될 것으로 추정되며, 위의 국가 제사시설물이 만들어지면서 폐기된 것으로 판단된다.
저장공(貯藏孔)은 40개소가 확인되었는데, 11·17·18·22·23·24·25·28호 저장공에서는 그릇받침편을 비롯한 토기편이 출토되었으며, 37호 저장공에서는 내부에서 기둥구멍과 석재가 확인되었다.
분묘(墳墓)는 돌방무덤(石室墓)과 독널무덤(甕棺墓)이 조사되었는데, 돌방무덤은 능선의 남쪽 사면에서 백제시대의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 1기와 파괴가 심하여 규모나 시기를 판단하기 어려운 2기가 확인되었고, 하단의 6·7호 대벽건물지와 중복되어서 고려시대의 앞트기식돌방무덤 1기가 확인되었다. 1호묘는 백제시대 앞트기식돌방무덤으로 내부구조는 단면 사각형이며 돌방 바닥 전면에 평와(平瓦)를 1겹 깔았다. 널못이 길이 1.8m, 너비 0.7m의 범위 내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단장(單葬)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그릇받침편을 비롯하여 세발토기, 널고리, 널못, 반뚜껑(盤蓋), 뚜껑편(蓋片), 암키와편, 수키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독널무덤(甕棺墓)은 백제시대의 것으로 능선의 남사면과 서사면에서 각 1기씩 확인되었다. 1호 독널무덤은 무덤구덩이를 길이, 너비, 깊이가 0.95×0.9×0.6m 규모로 정리하고, 독널을 횡으로 안치하였다. 독널은 회청색 경질토기로 선문(線文)이 타날되어 있는데 횡으로 지운 자국이 있다. 태토에는 굵은 모래가 혼입되어 있다. 현 높이는 68㎝, 입지름 29㎝, 최대 지름 71㎝, 두께 1∼1.5㎝이다. 부장품은 발견되지 않았다. 2호 독널무덤은 무덤구덩이를 0.95×0.65m 규모로 판 후 독널을 횡으로 매장하였다. 독널은 회청색 경질의 독모양토기로 종집선문이 타날되어 있다. 현 높이 50㎝, 입지름 20㎝이다.
또한 능선의 정상부와 남사면에 걸쳐 19기의 통일신라시대 화장무덤(火葬墓)이 집중 분포하고 있다. 구조는 직경 약 0.3m 내외의 광(壙)을 파고 그 안에 장골용기(葬骨容器)를 매납하고 있다. 장골용기는 대부분 인화문(印花文)의 토제 유개완(有蓋완)이며, 3점은 납석(蠟石)을 깎아 만들었다.
고려시대 움무덤(土壙墓)은 능선의 정상부와 서북사면에서 22기가 조사되었는데, 주축의 방향은 대체로 등고선과 평행하며 대부분 널못만 출토되는데, 19호묘에서는 쌍룡문경(雙龍文鏡)이 출토되었으며, 2호묘에서는 청자가 출토되었고, 5기의 움무덤에서 철제 대금구(帶金具)가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시기적으로는 백제 웅진시기부터 고려시대까지 넓은 시기 폭을 가진다. 백제유적은 웅진기(熊津期)의 3시기와 사비기(泗비期)로 구분되는데, 웅진기 I기(5세기 말∼6세기초)는 정지산 능선에 처음으로 유적이 형성되는 시기로서, 대체로 움집자리와 저장공으로 이루어진 취락이 능선 전체에 분포한다. 이 시기의 연대는 475년의 웅진천도를 I기의 상한연대로, 사격자문벽돌(斜格子文塼)이나 연화문와당(蓮花文瓦當)의 제작시점을 하한연대로 설정하고 있다.
Ⅱ기(6세기 전반)는 정지산 유적의 중심시기인데, 정상부를 평탄화한 다음 일정한 기획하에 각종의 시설물을 축조한 시기이다. 능선의 중앙에는 국내에서 처음 확인된 독특한 기와건물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시기의 연대는 520년대를 전후한 시점으로 추정된다.
Ⅲ기(6세기 중엽)는 국가시설물이 폐기된 후 7세기대의 돌방과 독널무덤이 축조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보다는 적어도 반세기 이전에는 폐기되었을 것이라는 정황론을 통하여 잠정적으로 6세기 중엽의 연대를 부여하고 있다.
사비기(泗沘期)의 유구는 돌방무덤 1기와 독널무덤 2기 등 총 3기의 무덤이 조사되었다. 돌방무덤은 앞트기식(橫口式)인데 문주석(門柱石)이나 벽석(壁石)의 축조방법은 단면 사각형의 이른바 ‘능산리형돌방무덤’의 변형으로 생각된다. 바닥 전면에는 평와(平瓦)를 1겹 깔았는데 7세기대의 부여 출토 평와와 유사하다. 공주에서 조사된 이 시기의 석실은 교촌리 1호, 시목동 1·2호분 등이 있다.
독널무덤은 독의 절반 정도를 깨트려낸 다음 시신을 안치하고 입구는 판석으로, 저부쪽은 토기편이나 기와편으로 밀봉하였다. 독널로 사용된 토기가 동 최대경에 비하여 구경이 좁고 최대경이 동체(胴體) 상위(上位)에 있어 7세기대로 편년할 수 있을 것 같다.
유적 내에서 출토된 화려한 장식이 가미된 장고형그릇받침(長鼓形器臺)·세발토기(三足土器)·뚜껑접시(蓋杯)·토제등잔(土製燈盞)·사격자문벽돌(斜格子文塼)은 제사와 관련된 유물일 가능성이 높고 기와건물(瓦建物)의 구조 역시 일반 건물과는 다른 특수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유적은 국가 차원의 제의를 위해 만든 시설일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시조(始祖)나 선왕들에 대한 제사인지, 아니면 6세기 전반대의 왕이나 왕비 혹은 왕족의 사망에 즈음하여 단기간 동안 의례를 행했던 장소인지의 여부는 추후 정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특히 토기류 중에는 일본과의 문화교류를 밝힐 수 있는 유물도 포함되어 있어 주목을 요한다.
이와 관련하여 한가지 주목할만한 사실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의 매지권에 왕릉의 위치를 신지(申地)로 적고 있는데(買申地爲墓), 여기서 신지란 남서방향을 말한다. 그런데 왕비지석에는 왕비가 사망하자 유지(酉地)의 땅에서 상(喪)을 치르고(居喪在酉地) 27개월 후인 529년 2월에 대묘인 왕릉에 합장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지란 서쪽방향이며 신지와는 약 30°의 각도차가 존재한다. 공산성내의 추정왕궁지나 기타 특정지점에서 왕릉방향을 신지로 본다면 자연적으로 유지는 중간 경지(庚地)를 거쳐 정지산 유적의 위치에 해당한다. 따라서 정지산 유적의 성격을 제사시설로 파악하고 빈시설(殯施設)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