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 출토 광주이씨 의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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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에 소재한 광주이씨(廣州李氏) 이언웅(李彦雄)과 그의 며느리 청주한씨(淸州韓氏) 묘에서 출토된 1550년대의 남녀 복식 20점.
정의
1979년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에 소재한 광주이씨(廣州李氏) 이언웅(李彦雄)과 그의 며느리 청주한씨(淸州韓氏) 묘에서 출토된 1550년대의 남녀 복식 20점.
개설

1979년 4월 20일경기도 시흥군(현 시흥시) 과천면 막계리 소재의 광주이씨 선산 묘지를 이장하던 중 이언웅(李彦雄) 묘와 그의 며느리 청주한씨 묘에서 출토된 복식 20점이다. 지정 당시에는 이언웅의 묘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과천 출토 광주이씨 의복’으로 명칭이 정해졌으나 후에 며느리의 묘에서도 의복이 출토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언웅은 생몰년을 알 수 없으나 그의 아들의 생몰년으로 보아 중종(中宗)대에서 선조(宣祖)대의 인물로 추정된다. 그의 며느리 청주한씨는 중종의 둘째 따님인 의혜공주(懿惠公主)의 손녀이며 이집일(李執一: 1574∼1613)의 부인으로,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고 한다.

이들의 묘에서는 남녀 의복류와 염습구 등 54점이 수습되었으나 초기 발굴시 전문가가 참여하지 않아 남녀 복식이 섞인 채 출토되어 성별 구분에 주의가 요구되는 자료이다. 그중에서 선별된 20점이 1980년에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지정 유물은 포도동자문금선단대란치마(葡萄童子紋緞金線緞大襴裳) 1점, 무명누비 액주름포(腋注音袍) 1점, 무명겹액주포 1점, 장옷 2점, 솜저고리 4점, 금선단, 회장저고리 2점, 모시적삼 2점, 솜치마 1점, 무명버선 1점, 악수 1점, 멱목 2점, 습신 1점, 천금 1점 등 총 20점이다. 이 들 유물은 16세기의 남녀 의생활을 알 수 있는 소장한 자료이나 수백 년 땅속에 있었기 때문에 색상이 갈변되어 본래의 색상은 알 수 없다.

특징

장옷[長衣]은 2점이 지정되었다. 16세기까지는 남녀 공용의 겉옷이었으며 이후 여성의 대표적인 외출복으로 입혀졌다. 형태는 깃 모양이 겉깃, 안깃 모두 섶 안으로 들여 달린 목판깃이 특징이며, 섶과 함께 좌우대칭형을 이루고 겨드랑이에 작은 삼각무, 옆선에 사다리꼴 큰무가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16세기 장옷은 신체에 비해 매우 넓고 커서 남녀용을 구분하기 어려운데 광주이씨묘 출토 장옷 2점도 치수가 길이 120∼122㎝, 품 71∼80㎝, 화장 92∼102㎝의 범위로 누구나 입을 수 있을 정도로 크다. 옷감은 2점 모두 명주로 된 겉감과 안감 사이에 솜을 넣어 만든 솜 장옷이다. 1점은 아무런 장식이 없이 전체가 짙은 갈색이며 나머지 1점은 소매끝을 소색으로 달아 접어서 입는 거들치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겨드랑이의 작은 삼각무가 화문단(花紋緞)으로 되어 있다.

액주름[腋注音]은 누비옷 1점과 겹옷 1점 등 총 2점이 지정되었다. 액주름은 액추의(腋皺衣), 방습의(旁褶衣) 등으로 기록되었던 옷으로 사대부들은 포 안에 속옷의 개념으로 착용하였으며 신분이 낮은 자들의 경우에는 관복으로도 입었다. 겨드랑이 아래에 주름이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임진왜란 이전 시기의 출토 복식에 집중되어 나타나며, 임진왜란 직후 17세기 전반까지 나타난다. 목면 누비액주름은 면으로 된 겉과 안 사이에 솜을 얇게 두어 0.15cm 간격으로 곱게 누빈 것이다. 동정은 겉감과 다른 명주로 달려 있으며 고름은 넓게 달렸던 흔적이 남아 있다. 나머지 1점은 면으로 된 겹 액주름으로 쪽빛이 이염된 듯이 남아 있다. 크기는 길이 102∼107cm, 화장 92∼108cm, 품 68∼72cm의 범위이다.

저고리[赤古里]류는 적삼 2점, 솜저고리 4점, 금선단 회장저고리 2점 등 8점이 지정되었으며 모두 여성용 저고리로 추정된다. 16세기의 여성 저고리는 깃머리가 각이 진 목판깃이고 옆선에는 두쪽무 또는 한쪽무가 달리거나 옆트임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신체에 비해 길이가 길고(50∼80㎝ 전후) 품이 넓어(70㎝ 전후) 누구나 입을 수 있는 프리 사이즈(free size)형이다. 가장 짧은 단저고리형은 길이가 50㎝ 전후로서 허리를 덮어주며 60∼70㎝ 전후 길이는 중저고리형에 해당한다. 가장 긴 장저고리는 80㎝ 전후의 길이로서 엉덩이가 가려질 정도로 길고 양 옆선이 트여 있다. 본 유물 8점도 전형적인 16세기의 저고리 양식이다. 단저고리형에 해당하는 저고리가 3점이 있는데 깃·섶·끝동·곁마기 부분을 연화만초무늬의 직금(織金)으로 장식한 금선단 회장저고리가 2점이 있으며 깃과 소매끝동이 모란문단으로 장식된 명주솜저고리 1점이 있다. 중저고리 형은 2점인데 1점은 오른쪽 길과 소매만 남아 있는 갈색 당초문단 솜저고리이며 나머지 1점은 연갈색 명주 솜저고리로 오른쪽 소매가 소실되어 없는 상태이다. 장저고리형은 ‘겹유저고리’로 지정된 1점인데 길이 81cm, 품 76cm, 화장 100cm이며 옆트임이 있다. 겉감은 고운 명주, 안감은 거친 명주로 하고 사이에 솜을 넣은 명주 솜장저고리이다. 형태가 해인사 소장의 광해군내외 및 상궁옷(국가민속문화재, 1965년 지정)와 흡사하다. 이외에 모시로 만든 홑 적삼이 2점이 있다. 2점 모두 어깨에 바대가 대어 있고 진동과 수구의 너비 차이 없이 일자형이다.

치마[赤亇]는 예복용 홑치마 1점과 겹치마 1점이 지정되었다. 예복용 홑치마는 지정 당시 ‘포도동자문단직금대란치마’로 등재되었는데 치마 중간에는 연화만초문단 바탕에 28㎝ 너비의 포도동자문(葡萄童子紋)이 두 줄 직금(織金)된 스란단이 부착되어 있고 도련에는 보문이 직금된 6㎝ 너비의 금선이 장식되어 있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10년(1504), “자색과 남색의 동자쌍슬란(童子雙膝襴) 치마”의 기록이 있어, 이와 같이 스란을 두 줄 넣은 치마를 당시에는 ‘쌍스란 치마’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치마 길이가 127cm이며, 치마폭은 558cm로, 62cm폭의 옷감을 9폭 이어 만들었는데 허리말기는 탈락되어 달려 있지 않은 상태이다. 나머지 1점은 명주로 만든 솜치마이다. 허리말기와 고름이 모두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과천 출토 광주이씨 의복은 문중에 의해 발굴작업이 진행되었고 남녀복식이 섞여서 기증되어 성별구분에 주의가 요구되지만 16세기 여성의 저고리와 치마 양식이 확인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한 분묘에서 단저고리형·중저고리형·장저고리형이 함께 출토되어 16세기 여성 저고리의 다양성이 확인된다. 특히 금선단 등의 화려한 직물로 장식된 저고리와 치마는 청주한씨가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의 2녀인 의혜옹주의 손녀였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하지만 16세기는 조선시대의 어떤 시기보다도 민간 수공업 차원에서 품질 좋은 능(綾)·단(緞)·금선(金線)을 제직할 수 있었던 당시의 견직물 생산 실태와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문화재대관』-중요민속자료 2 복식·자수편(문화재청 편, 2006)
『조선시대 腋注音의 조형적 특징 연구』(이황조, 단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명선(名選)』 중(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2004)
『명선(名選)』 하(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2004)
『파평윤씨(坡平尹氏) 모자(母子) 미라 종합연구논문집』Ⅱ(고려대학교 박물관 편, 2003)
『조선조 치마저고리 특별전』(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편, 1997)
『한국복식』 제1호(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편,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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