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아들 곽지태(郭之泰)는 판도정랑(版圖正郞)을 지냈고 손자 곽충수(郭忠秀)는 대간(臺諫)이 되어 여러 공적을 남겼다.
1285년(충렬왕 11) 장원으로 급제하여 문한서(文翰署)에 근무하였는데, 충직하고 문장 또한 뛰어나 인정을 받았다.
1292년 태복윤(太僕尹) 김유성(金有成)이 일본에 갈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동행하였다. 이 때 일본은 동정(東征)한 데 원한을 품고 모두 붙들어 두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나라에서 이 일을 민망히 여겨 관직을 주었으며, 또한 청주지방의 추동전(湫洞田)을 하사하였으나 끝내 고려에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서 죽었다.
손자 곽충수는 할아버지를 기려 추동(楸洞)에 정자를 짓고 오래도록 사모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영모정(永慕亭)이라고 하였다. 정자 기문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