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옥룡사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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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옥룡사지
광양 옥룡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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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사찰터.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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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사찰터. 사적.
내용

절터는 해발 1217.8m인 백운산의 한 지맥으로 뻗은 해발 505.8m의 백계산 남쪽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절터 주변에는 동백나무가 가득하여 절경을 이루고 있다.

옥룡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는데, 선승(禪僧)이자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알려진 선각국사(先覺國師) 도선(道詵, 827~898)이 864년부터 898년까지 35년 동안 주석하고서 입적하였다. 그 뒤 통진대사(洞眞大師) 경보(慶甫, 869~948), 지문(志文) 등이 머물면서 법맥을 이었고, 신라 말∼고려 초에 건립된 쌍비와 쌍탑(부도)이 남아 있다. 1878년(고종 15)에 화재가 나서 천년 이상 밝혔던 법등은 꺼지고 사역은 점차 폐허화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전라남도 구례군 간전면에 거주하는 청주한씨 문중에서 절터를 중심으로 주변 일대를 매입하여 선대의 묘지를 조성하고 재실을 지으면서 더욱 흔적을 잃었다.

1994년~1999년에 순천대학교박물관에서 4차례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도선과 경보의 부도와 탑비가 있던 ‘비석거리’라고 불리는 탑비전(塔碑殿)터에서 부도를 보호하였던 2채의 건물터가 노출되었다. 이 건물터는 현재 전하는 최초의 신라 말~고려 초의 부도전(浮屠殿)으로 조사되었다. 곧 도선의 부도전에서는 8각 바닥돌 아래의 돌덧널〔石槨〕안에서 길이 95㎝, 너비 54㎝, 높이 48㎝인 돌로 만든 관이 출토되었는데, 관 안에서는 인골(人骨)이 물 속에 잠겨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인골은 두개골에서 척추와 골반까지 원형대로 가지런히 놓였고, 척추 좌우로 대퇴골, 비골 등의 하지골과 상완골, 요골 등의 상지골이 놓였다. 인골의 상태로 보아, 도선의 유해는 화장(火葬)을 하지 않고 우리의 전통 장법 가운데 2차장인 세골장(洗骨葬)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도선의 업적을 기록한 징성혜등탑비(證聖慧燈塔碑)는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파손되지 않은 채 묻혔거나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경보를 기리기 위해 세운 보운탑비(寶雲塔碑)는 조각이 100점 이상 발견되어 산산이 깨진 것으로 짐작된다.

절터는 윗층만 조사되었기 때문에, 대체로 조선시대의 건물터만 확인되었다. 하지만 여러 채의 건물터가 노출되었고, ‘옥룡사(玉龍寺)’, ‘성화십이년병신(成化十二年丙申)’, ‘만력십칠년기축(萬曆十七年己丑)’, ‘송치(松峙)’ 등의 글자가 새겨진 기와, 분청사기, 순백자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건물터 아래층에서도 여러 유구층이 확인되었으므로, 앞으로 조사를 더 진행하면 초기의 유구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참고문헌

『광양 옥룡사지』Ⅰ-정밀지표조사(최인선 외, 순천대학교박물관, 1995)
『선각국사 도선의 신연구』(김지견 외, 영암군, 1988)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도선의 부도전지와 석관」(최인선,『문화사학』6·7, 1997)
「도선비와 동진비」(황수영,『광양 백계산 고려쌍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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