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는 수도 방위를 위해 한성부 주변의 행정적·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주·부·군·현의 일반적인 행정 체계와는 별도로 특수 행정 체계로 유수부를 설치, 운영했다.
초기에는 고려의 국도였던 개성과 태조의 어향(御鄕 : 王家 先代의 관향)인 전주에, 후기에는 개성·강화·수원·광주 등 4도(都)에 설치, 운영하였다. 즉,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 방위 체계의 강화를 절감한 조선왕조는 행정력과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주력해 비변사의 기능 강화와 5군영제로의 군제 개편을 단행했다.
아울러 행정력과 군사력을 강화시키고 군사적 요충지에 유수부를 설치, 운영함으로써 도성방어 체제를 강화하였던 것이다. 이곳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가 도읍한 이후 신라가 한강 유역에 진출하면서 한산주(漢山州)·남한산주(南漢山州)·한주(漢州) 등으로 불리다가 940년(태조 23) 현재의 명칭인 광주로 개칭되었다. 983년(성종 2) 목(牧)이 설치된 이후 조선왕조에서도 계속 목사가 파견되었다.
1395년(태조 4) 경기좌도에 편입된 광주목은 1566년(명종 21) 이후 목사가 방어사(防禦使)와 토포사(討捕使)를 겸하였다가 1577년 (선조 10) 광주부로 개편되면서 부윤이 방어사를 겸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수어부사(守禦副使)를 겸하였다. 1623년(인조 1) 남한산성을 쌓은 뒤에는 유수부로 승격되고 유수가 수어사를 겸하게 되면서 남한산성의 관리도 겸하게 되었다.
광주부가 유수부로 승격됨으로써 개성부·강화부·수원부·광주부의 4도(都) 유수제가 완성되어 한성부를 중심으로 하는 도성방어 체제가 확립되었다. 광주유수부는 1630년 부로 개편되었다가 1750년(영조 26) 다시 유수부로 승격되어 유수가 수어사를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수가 자주 교체되어 군무(軍務)가 소홀해지는 폐단이 생김에 따라 1759년 다시 부로 개편되었다.
그 뒤 1795년(정조 19) 군제 개편을 단행하면서 수어경청(守禦京廳)을 폐지하고 다시 유수부로 승격시켜 유수가 남한산성 수어사를 겸하게 해 행정과 군정을 일원화하였다.
1865년(고종 2) 당시 광주부의 직제는 유수 2인(1인은 경기관찰사 겸임), 판관 1인, 검률 1인, 서리 80인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1895년광주군으로 개편되었고, 1907년에는 한성부에 서광주군을 관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