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예(久麻藝)’라고도 한다. 669(문무왕 9)·674·676년에 각각 사신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669년 3월에 “탐라에서 왕자 구마기를 보내어 공헌하였다.
18일에 탐라왕에게 오곡의 종자를 보냈다. 이날 왕자 구마기 등이 하직하고 돌아갔다.”고 하였다. 674년 윤6월에도 도라(都羅)·우마(宇麻) 등과 함께 일본에 도착하였다. 이때 대재부(大宰府)에 명하여 “왕이 막 즉위하였으므로 하등극사(賀騰極使) 이외의 사신은 맞아들이지 않고 있다.
또, 날씨도 춥고 물결이 험하니 오래 머물게 함은 도리어 그대들을 불편하게 하는 일이니 빨리 돌아가도록 하라.”고 하고, 국왕과 왕자 구마기 등에게 작위를 내렸는데 그 품계가 대을상(大乙上)이었다.
이에 다시 금수(錦繡)를 장식할 수 있도록 하여 백제의 좌평(佐平)과 같게 하였다. 676년 8월에도 그 일행이 쓰쿠시(筑紫)에 정박하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676년 9월에 탐라왕 고여(姑如)가 나니와(難波)에 도착하였다는 기사가 있고, 677년 2월에도 탐라객에게 배 한척을 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7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이러한 외교활동은 원래 백제에 예속되어 있던 탐라가 백제 멸망과 관련하여 새로운 정세에 대처하려는 과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