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에 신인조사(神印祖師) 명랑(明朗)이 창건하였다. 금광사(金光寺)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명랑은 당나라에 유학 갔다가 배를 타고 귀국하는 도중 서해 용왕의 청으로 용궁으로 들어가서 설법하였고, 용왕은 황금 1,000근을 시주하였다고 한다.
귀국한 뒤 명랑은 옛집을 헐고 그 자리에 절을 창건하였는데, 법당을 중심으로 그 앞에 탑을 세우고 종루와 명경루(明鏡樓)·강당·중문 등의 당우를 신축하였다.
서해 용왕에게서 시주받은 금을 모든 건물과 탑에 입혔더니, 절이 금빛으로 눈부시게 찬란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금광사라고 불렀다.
또한, 『삼국유사』 선율환생조(善律還生條)에 의하면, 선율이 명부(冥府)에 끌려갔다가 연(緣)이 다하지 않아서 생계(生界)로 돌아오던 중 한 여인을 만났다.
여인은 “부모가 금강사의 수전(水田)을 훔친 죄 때문에 지옥에서 중고를 당한다.”고 하면서, 속히 그 밭을 돌려주게 할 것과 그녀가 살아 있을 때 호마유(胡麻油)를 상 밑에 묻고 곱게 짠 비단을 침상 밑에 감추어 두었는데, 그 것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주면 고맙겠다고 하였다.
선율이 돌아온 뒤 그 부모에게 훔친 금강사의 밭을 돌려주게 하고 기름과 비단으로 부처님께 공양하였더니 여인이 그 날 밤 꿈에 나타나서 지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그 뒤의 역사는 전래되지 않고 있다.
1960년대 초에 금광못의 물을 뽑아내자 못 속에서 큰 절터가 발견되었다. 주춧돌이 정연하게 남아 있고, 법당을 오르는 계단석과 아름다운 귀꽃을 새긴 연화대석, 경석(經石)·석불상·석탑재 등이 발견되었는데, 대부분의 유물은 경주박물관에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