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익보(益甫). 아버지는 월성군(月城君) 김수(金需)이며, 아들이 판돈녕(判敦寧) 김세민(金世敏)이다. 정종비 정안왕후(定安王后)의 종질이다.
1396년(태조 5) 생원시를 거쳐 진사시에 합격하고 군기시직장에 제수되었다.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군기시직장으로서 정안군(靖安君)의 군사에게 무기를 공급하는 공을 세워 교서감승(校書監丞)에 초천(超遷)되었다.
1401년(태종 1)에는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로서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을 겸했고, 이듬해 형조전서(刑曹典書)에 승진했으며, 그 해 12월에 병조전서로 옮겼다. 1405년 개성유후사부유후(開城留後司副留後)에 승진, 곧 한성부윤으로 옮겼다.
이듬해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를 거쳐 풍해도감사(豊海道監司)로 나갔다가 1407년 공안부윤(恭安府尹)으로 들어왔다. 1408년 4월부터 7월에 걸쳐 중군총제(中軍摠制)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한성부윤이 되었다. 1413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에 걸쳐 하정부사(賀正副使)로서 재차 명나라에 다녀오고, 1414년 4월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에 발탁되었다.
1418년(세종 즉위년) 11월 전주부윤으로 파견되고, 이듬해 10월 전주부윤 재직 중에 정종이 죽자 임지를 무단으로 떠나 분상(奔喪)했으나, 용서를 받고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가 되어 치상(治喪)에 참여하였다.
1420년 1월 좌군총제(左軍摠制), 그 해 3월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오르면서 개성유후사유후로 나갔고, 이듬해 12월에 내직으로 돌아와 우군도총제가 되었다. 1422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소환되어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제수되었으며, 곧 경기감사로 고쳐 임명되었다. 1425년 명나라 인종이 죽자 진향사(進香使)로 다시 중국에 다녀온 뒤, 유후(留後)가 되어 개성에서 사망했다.
성품이 관순근후(寬醇謹厚: 인정이 두텁고 신중함)하고 직무에 충실했으며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시호는 평후(平厚)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