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단야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당 책임비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이칭
이칭
김태연(金泰淵)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1년(고종 38)
사망 연도
1938년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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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김단야는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당 책임비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1901년(고종 38)에 태어나 1938년에 사망했다. 본명은 김태연이다. 1916년 대구 계성학교에서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1919년 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상해 고려공산청년단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5년 상해로 망명하여 조선공산당 해외부 설립에 참여하다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모스크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근무하였다. 1937년 소련 경찰에 의해 일본의 밀정이라는 혐의로 사형을 당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당 책임비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개설

본명은 김태연(金泰淵). 경상북도 김천 출신. 출생연도는 1899년과 1900년 설이 있지만, 김단야 자전(自傳)에 “나는 1901년 1월 16일 남한의 한 중농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적혀 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6년 서당에서 2년 동안 한문을 수학하였다. 1908년 4월 고향에 있는 기독교 계열 학교인 개진학교(開進學敎)에 입학하였다.

1909년 4월 진명학교(進明學敎)로 옮겼고, 1910년 4월에는 영진학교(永眞學敎)에 들어가 1914년에 졸업하였다. 1915년 3월 대구 기독교 학교인 계성학교(啓聖學敎) 고등보통과에 입학, 1916년 12월 일본인 교사와 미국인 선교사인 학교교장에 반대해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을 당하였다. 이 일로 기독교를 믿던 가족들과 심하게 다툰 끝에 1917년 1월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서 6개월 동안 공부하였다.

그 해 9월 서울의 배재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초 『반도의 목탁』이란 비합법신문을 발행하던 지하 청년학생서클에 가담하였다. 3월 말 고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대구지방법원 김천지회에서 태형 90을 언도받았다. 출옥 후 비밀결사 적성단(赤星團)에 들어가 활동하였으며, 12월에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0년 2월 절강성(浙江省) 항주(抗州)에 있는 배정학교(培正學敎)에 입학하여 영어와 중국어를 배우고, 다시 이 곳에 있는 안성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21년 3월 상해 고려공산청년단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어 기관지 『벌거숭이』 편집인으로 일하였다. 8월에 고려공산청년단 책임비서로 선임되고, 화동(華東)학생연합회 서기가 되었다. 10월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에 입당하고 상해상과대학에 입학하였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와 극동청년대회에 고려공산청년단 대표로 참가하였다. 3월에 상해로 돌아와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을 결성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4월 고려공청 중앙총국을 국내로 이전하기 위해 입국하다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신의주지법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1924년 1월 출옥하여 잠시 고향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와, 박헌영(朴憲永) · 임원근(林元根)과 함께 『동아일보』 ·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였다. 1924년 2월 신흥청년동맹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고, 한양청년연맹화요회에 가담하였다. 『조선일보』에 「레닌 회견인상기」를 실었다.

1925년 2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이 되었다.

4월 고려공청 창립대회에 참석해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연락부 책임자가 되어 해외에 있는 조봉암(趙奉岩)과 상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동양비서부 그리고 국제공청과의 연락임무를 맡았다. 9월에 조선일보사에서 해직되었다. 1925년 12월 ‘제1차 조선공산당검거사건’을 피해 상해로 망명, 1926년 1월부터 7월까지 조공 기관지 『불꽃(火花)』 주필이 되었다.

이 무렵 조공 ‘해외부’ 설립에 참여했으며 국내 공산당의 재정을 조달하였다. 그 해 4월 순종의 사망소식을 듣고 ‘상(喪)에 복(服)하고 곡(哭)하는 민중에게 격(檄)함’ 등의 격문을 상해에서 만들어 국내로 보냈다. 1926년 8월에는 모스크바에 있는 국제 레닌대학에 청강생으로 들어갔다. 1928년 11월 코민테른 산하 조선문제위원회에 조선공산당 문제를 검토할 참고자료를 제출하였다.

코민테른 전권위원(the Representative of the Comintern)으로서 국내 당재건운동에 직접 참여하여 1929년 11월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일제 경찰의 탄압을 피해 1929년 12월 서울을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 1930년 중반까지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근무하였다. 또한 1930년 7월 무렵 상해에 근거지를 두고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지도하였다.

이와 동시에 코민테른의 재정지원을 받아 기관지 『코뮤니스트』 발간 준비를 시작했으며, 1931년 3월부터 1932년 중순까지 7호를 발간하여 국내에 배포하였다. 1933년 9월부터 1934년 1월까지 코민테른 동양부 지도하에 한인반제동맹, 혁명호제한인분회(革命互濟韓人分會) 활동에 참여하였다. 1934년 박헌영의 전(前)부인 주세죽(朱世竹)과 결혼하였다.

1934년부터 1936년까지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과장으로 근무하였다. 소련에 사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사회주의의 위대한 승리』(외국노동자 출판부, 1933) · 『어떻게 콜호즈원은 유족하게 되었는가』(외국노동자 출판부, 1934) 등의 팸플릿을 만들었다. 1937년 11월 일제의 밀정이란 혐의를 받고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경찰에 체포되었다.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법정에 의해 1급 일제 밀정으로 판결받았으며 1938년 사형을 당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엮음, 창작과 비평사, 1996)
『일제하 극동시베리아의 한인사회주의자들』(마트베이 치모피예비치 김 지음, 이준형 옮김, 역사비평사, 1990)
『한국공산주의운동사』 1·2·3·5(김준엽·김창순, 청계연구소, 1986)
『사회과학대사전』(이석태 편, 문우인서관, 1948)
「코민테른 6차 대회와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정치사상연구」(최규진,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고려공산청년회의 조직과 활동」(박철하, 『한국근현대청년운동사』, 한국역사연구회 근현대청년운동사 연구반, 풀빛, 1995)
「1920년대 중후반 재만한인 청년운동」(신주백, 『한국근현대청년운동사』, 한국역사연구회 근현대청년운동사 연구반, 풀빛, 1995)
「고려공산당연구」(임경석,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국제공산주의자 김단야의 삶」(김도형, 『역사비평』23호, 1993)
「1930년대 서울 지역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안태정, 『일제말 조선사회와 민족해방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회 1930년대반, 일송정, 1991)
「당재건운동의 개시(1929-31년)」(이종민,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사』, 한국역사연구회 1930년대연구반, 한길사, 1991)
『現代史資料』 29(姜德相·梶村秀樹 編, みすず書房, 1972)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編, 原書房,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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