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로 영정 ( )

목차
회화
작품
문화재
조선 후기의 문신 김재로(金在魯)와 아들 김치인(金致仁)을 그린 영정.
목차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김재로(金在魯)와 아들 김치인(金致仁)을 그린 영정.
개설

비단 바탕에 채색. 김재로의 영정은 현재 한국본과 중국본 두 벌이 함께 전해지고 있어 조선 후기 초상화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중국본은 1738년(57세)에 김재로가 주청사(奏請使)로 북경에 갔을 때 중국의 궁정 화가 시옥(施玉)에게 그려 받은 것이다. 올이 치밀하고 얇은 통견의 중국 비단에 중국풍으로 그린 초상화이다.

한국본은 변상벽(卞尙璧)과 한종유(韓宗裕)가 같이 그린 김재로의 아들인 김치인의 51세 초상화이다. 종전에는 이 본이 김재로의 초상화로 오인되었으나 최근 김재로의 아들 김치인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화면 우상변에 ‘五十一歲眞 卞尙璧韓宗裕同寫(오십일세진 변상벽한종유동사)’의 표제가 적혀 있어 작가가 명확히 밝혀진 합작 초상화의 드문 예이다. 이 초상화는 화면에 ‘51세진’이라 쓰여 있기 때문에 김재로의 51세때인 1732년 작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1760년대 전후의 전형적인 초상화 양식을 보이고 있는 점이나 한종유의 활동 연대를 고려할 때, 1766년 김치인의 51세때의 초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 초상화들은 1989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소장자가 변경되어 2001년 해제되었다.

내용
  1. 김재로 57세 초상(중국본)

중국본의 도상은 호피를 깐 교의자(交椅子)에 단령(團領: 깃을 둥글게 만든 공복)과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정장한 뒤 공수(拱手: 두 손을 마주잡음)하고 앉아서 의답(椅踏) 위에 발을 올려놓은 정면관이다.

배채법(背彩法)을 쓰지 않은 상태에서 선묘(線描)를 매우 약하게 잡고 갈색과 흰색을 섞어 유화식(油畵式)에 가까운 도말법(塗抹法: 드러나지 않게 칠함)으로 여러 번 덧칠하며 얼굴을 묘사했다. 관복도 옷주름 선을 잡지 않은 상태에서 녹색을 담채(淡彩)한 다음 먹으로 우려서 명암을 강하게 표현했다.

안료는 입자가 다소 고운 편이다. 전반적으로 채색을 매우 옅게 칠하는 경향이 많다. 그리고 관대와 교의자의 손잡이 및 의답에는 금분을 사용했으며, 관복의 비단 문양은 통상의 조선 초상화의 문양과 다르다.

얼굴의 용모가 중국 사람처럼 왜곡되게 해석되어 일반적인 조선 초상화와 달리 생소한 느낌을 준다. 선묘를 약화시킨 도말법과 강한 명암 표현으로 인하여 초상화가 전체적으로 매우 거칠고 칙칙한 느낌을 준다. 화면 좌하변에는 “무오년 겨울 종진전교서겸낵각찬수 서옥이 그리다[戊午仲冬 宗眞殿校書兼內閣纂修 施玉畵]”라는 작가의 관서(款書)와 그 아래 도장이 두 개 찍혀 있다. 화면 우상변에는 영조가 1755년 어진도사시(御眞圖寫時)의 친람(親覽)과 1756년의 기사(耆社) 도사(圖寫)를 기념하며 내렸던 어제찬문(御製贊文)을, 김재로의 아들 김치인(金致仁)이 1760년 9월에 써넣은 장문의 제자(題字)가 있다.

  1. 김치인 51세 초상(한국본)

한국본의 도상은 호피를 걸친 교의자와 화문석을 깐 의답 위에 단령과 사모관대를 정장한 뒤 반우향으로 공수하고 앉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전신(全身) 교의좌상(交椅坐像)이다. 18세기 중반경의 발달된 배채법과 명암법을 토대로 하여 매우 정치하게 묘사하면서도 전체적으로 맑고 투명한 느낌을 준다. 즉, 당시의 사대부들이 지향했던 전신(傳神) 표현의 한 전형을 보여 주는 초상화이다.

특히 얼굴 표현이 매우 치밀하면서도 창백할 정도로 해맑고 깨끗하다. 먼저 분홍색을 배채한 뒤 4, 5단계에 걸쳐 농담 차이와 굵기의 차이가 있는 갈색 필선으로 얼굴의 윤곽선과 주름선을 섬세하게 잡았다. 그 다음 물기를 많이 준 맑은 갈색을 여러 번에 걸쳐 선염하며 미세하게 변화하는 명암을 매우 정치하게 표현했다.

눈의 묘사도 매우 정교하여 속눈썹이 있는 윗쪽 눈꺼풀은 검은 먹선으로 강하게 선묘하였다. 그리고 흰자위의 중앙 부분에는 흰색을 강하게 칠한 뒤 가장자리로 갈수록 엷게 풀어서 흰자위의 동그란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그 다음 눈초리의 양 끝에 붉은 홍기를 주어 마무리했다. 콧구멍은 중먹으로 어둡게 명암을 넣어 깊이감을 강조했다. 그리고 수염은 검은 먹선과 흰색 필선에 2·3단계의 농담 차이를 주어 가며 묘사하되 수염 전체를 담묵으로 우려서 괴체감을 의식했다.

오사모(烏紗帽)는 전체를 동일면으로 검게 칠했으나 망건은 올을 일일이 표현한 뒤 약간 흐리게 칠해 오사모와 구별했다. 신체와 관복도 매우 정치하고 맑게 표현했다. 단령의 윤곽선과 주름선은 짙은 먹선을 사용하여 매우 구조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변화를 살려 가며 잡았다. 그리고 비단의 뒷면에서 녹색을 배채하고 위에서 다시 녹색을 담채한 뒤 문양 밖의 배경 부분은 더 짙은 녹색으로 담채하였다. 그 다음 주름선 주변과 허리 아래나 허벅지 부분 등 깊게 들어간 면은 먹으로 우려서 명암을 표현했다. 목 부분의 내의는 물기가 많은 중묵으로 약하게 선묘하여 단령의 선묘와 구별한 뒤 흰색을 배채했다. 흉배는 쌍학 흉배이고 관대는 서대(犀帶)인데, 흉배의 채색은 매우 곱고 선명하며, 서대는 금분을 칠한 뒤 농묵으로 우려서 무늬를 표현했다.

교의자의 손잡이와 받침대는 명암 표현 없이 전체를 검게 칠했고, 교의자 받침대의 장식쇠는 금분을 사용하여 정교하게 묘사했다. 의답은 대자색을 배채한 뒤 먹으로 우려서 나뭇결을 표현한 다음 정면보다 측면을 약간 더 어둡게 처리하여 명암의 차이를 표현했다. 의답의 윗면에는 황색을 담채한 뒤 흰색 단선으로 돗자리의 올을 일일이 묘사한 다음 다시 검은색과 적색, 흰색, 황색으로 화문석 문양을 화려하게 표현했다. 의답과 교의자 받침대 및 화문석 돗자리 문양은 시점이 매우 안정된 사선 투시법으로 묘사되어 화면 전체에 매우 충실한 시각적 공간감을 형성해 준다.

호피는 황색 담채 위에 갈색과 흰색 필선으로 터럭을 세밀하게 선묘하고 먹으로 동그란 검정 무늬를 표현했다. 호피의 다리와 꼬리를 교의자와 하체의 뒤쪽으로 완전히 밀어서 배치했다. 이는 18세기 전반경의 초상화가 호피의 머리나 다리 및 꼬리를 교의자 앞쪽이나 의답 위에 걸쳐서 강조했던 것과 달리 18세기 중반경 이후에 새롭게 나타난 특징적인 모습이다. 비단은 올이 굵고 통통하며 틈새가 거의 없는 다소 두터운 통견이며, 아교와 백반을 적게 올려 반짝임이 적은 편이다.

참고문헌

『한국의 초상화(역사 속의 인물과 조우하다)』(문화재청편, 눌와, 2007)
『인물로 보는 한국미술』(암미술관·삼성미술관 학예연구실 공편, 삼성문화재단, 1999)
『한국의 초상화』(조선미, 열화당, 1983)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