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평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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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평야
김제평야
자연지리
지명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를 중심으로 정읍시 · 부안군 · 완주군 일부 지역을 포함한 지역에 펼쳐진 평야.
이칭
이칭
김만경평야, 김제만경평야, 만경평야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를 중심으로 정읍시 · 부안군 · 완주군 일부 지역을 포함한 지역에 펼쳐진 평야.
개설

동진강(東津江)과 만경강(萬頃江) 유역에 발달된 충적평야와 그 주변의 넓은 야산지대를 중심으로 한 침식평야로 구성되어있다. 이른바 ‘김만경평야(金萬頃平野)’ 혹은 ‘김제만경평야’로 불리며, 한국 최대의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다.

자연환경

이 평야의 대부분은 본래 하천들의 자연제방과 배후습지 등이 발달해 있던 범람원 지역이다. 이 범람원의 퇴적층은 만경강 하구로부터 약 50㎞ 상류에 위치한 삼례읍까지에 걸쳐 기반암 위에 실트 · 점토층 · 사력층 · 실트 · 점토층 · 사층(砂層)의 순서로 퇴적층이 쌓여서 형성되어 있다.

충적지는 만경강과 동진강 및 소하천 주변에 발달한 하곡평야와 진봉반도를 중심으로 간척된 해안평야를 가리킨다. 해발고도가 5∼6m로 낮고 평평하며 우리나라 벼농사지대의 핵심이다.

충적지와 연결된 구릉지는 부용천, 신평천, 두월천, 원평천 등 소하천의 분수계를 중심으로 넓게 발달되어 있다. 해발고도가 20m 내외로 사면의 경사가 매우 완만하다. 기반암은 대보화강암이고 차별침식에 의해 낮아진 것으로 여겨지고, 화강암지역의 구릉지 토양은 '황토'로 불리는 적색토의 발달이 탁월하며 농경지로 개간하기에 쉽다.

하천의 운반퇴적작용으로 이루어진 충적평야가 대부분이므로 사질양토가 많아 보수력이 크기 때문에 미작농업에 매우 유리하다.

형성 및 변천

원래는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야산지대나 평야부 주변의 산록에서부터 개척되어 나갔다.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의 패총으로도 이를 알 수 있다. 시대의 발전에 따라 산록에서 평야부로 점진적으로 개척되어 오다가 하천의 홍수와 범람에 대한 수방 대책이 수립되고, 대토목공사를 실시할 수 있는 막대한 자본과 기술 및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사회의 도래에 따라 하천변의 충적지를 개발하게 되었다.

한말에 만경강 하류 일대의 개척을 위한 이완용제(李完用堤)와 민영익제(閔泳翊堤)가 설치되고 1920년경 일제에 의한 동진강 · 만경강 직강공사의 실시로 인공제방이 설치된 뒤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평야주변의 오래된 촌락들은 대부분 산록에 붙어 괴촌형태로 발달해 있다. 하천변 충적지가 개척되면서 촌락들은 영농의 편의와 거리마찰(距離摩擦)을 줄이기 위하여 평야 가운데로 들어서게 되면서 넓은 평야 곳곳에 괴촌(塊村: 인가가 특정 장소에 덩이 형태를 이루고 있는 마을) 형태의 촌락들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모습은 김제시 죽산(竹山), 부안군 백산(白山), 정읍시 화호(禾湖), 신태인 부근의 동진강 유역에서 흔히 관찰되고 있다.

관개수리시설의 발달은 삼국시대부터 그 전통을 가지고 있어 벽골제(碧骨堤) 등의 유구가 있으며, 여기가 국내에서는 가장 먼저 근대적 수리시설을 갖추어 관개가 이루어진 지역이다. 근대적 수리시설은 운암호(雲巖湖)의 물로 칠보발전소에 유하(流下)한 다음 동진강 도수로로 관류시키는 배수로망을 가진 동진농지개량조합의 대단위 수리시설에 의해서 대부분 지역이 관개되고 있다. 만경읍과 성덕면 일대에 많았던 방죽은 이러한 수리시설이 갖추어지면서 논으로 개답되었다.

이 평야지대는 비옥한 미작지역으로 국내 유수의 곡창지대이기 때문에 한말 이후 일제의 통감부 시대를 거치는 동안에 일인들에 의한 토지 투자와 그 뒤 산미증산정책에 의한 미곡 수탈 지역으로 전락하여 일인에 의한 대단위 개발 공사와 수리 사업 및 농장 경영이 이루어지던 지역이다.

태인은 오랜 고을이나 호남선 개통과 함께 본격적으로 개발된 김제 · 신태인 등 요역을 통하여 이 평야지대의 미곡이 반출되었고, 이 고장에서는 최초로 군산과 김제를 잇는 미곡 반출용 시멘트 도로가 설치되었다. 이 평야지대의 중심인 김제 · 신태인 · 화호 · 만경 등지에는 일본인의 농장과 정미소 · 미곡창고 등이 밀집되어 있었고, 오늘날에도 그 잔재가 남아 있다.

구릉지는 홍수가 없고 식수를 얻기 편리한 지역이기 때문에 취락이 형성되었다. 일제시대에는 취락 주변 구릉지는 대부분 임야로 사용되었고, 소나무가 많았다. 구릉지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에 '호남야산재개발사업'이 실시되면서부터였다.

구릉지 개간 초기에는 뽕밭으로 가장 많이 이용되었고, 1980년대 이후 지하수 개발로 관정이 설치되면서 수리안전답으로 바뀌고 밭이 많이 늘었다. 구릉지 개발은 1980년대까지 이뤄졌고 1990년대 들어서는 구릉지 개간지의 재개발이 꾸준히 진행되었다. 1994년 극심한 가뭄으로 피해 받은 백산면과 공덕면의 구릉지대에 1995년백산양수장과 호남용수로 등 수리시설이 설치되어 구릉지 개발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현황

밭작물은 초기에 보리, 밀, 호밀, 고구마 등이 재배되다가 고구마, 감자, 수박, 고추, 땅콩, 인삼, 무, 배추 등 구릉지 토양에 적합하고 농가소득을 올리는 경제성 작물로 바뀌었다. 구릉지 개간지는 논과 밭 이외에 과수원, 목장, 공장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평야 말단부인 진봉반도(進鳳半島) · 만경강 · 동진강하구 · 계화도 일대는 간척사업에 의한 개발 첨단 지역이 형성되어 가고 있다. 침식평야를 이루고 있는 야산지대는 과수원 및 피란민 정착촌 · 음성 나환자 정착촌 등이 들어서서 채소류 생산과 닭 · 돼지 등을 공장제 농업(工場制農業)을 통하여 대량 사육하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지지(韓國地誌)Ⅳ·지방편(地方篇)·』(건설부국립지리원, 1986)
「김제만경평야의 구릉지와 토지이용」(김진아,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계화도간척지공간구조(界火島干拓地空間構造)에 관한 연구(硏究)」(남궁봉, 『전라문화논총』1, 전라문화연구소,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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