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년(고종 4) 2월에 거란군 3만 명이 쳐들어와서 방책을 불사르자, 우부승선(右副承宣)으로 도공역(陶公驛: 지금의 경기도 양주)에서 힘겹게 싸우다가 패하였다.
1222년 병부상서·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로서 최이(崔怡)의 정용군(精勇軍)·보승군(保勝軍) 징발을 저지하여 민폐를 줄이는 데에 힘썼으며, 1223년 추밀원부사 상서좌복야(樞密院副使尙書左僕射)가 되었다.
이듬해 7월에는 최이를 몰아내기 위한 이극인(李克仁)의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이내 소환되어 서경유수로 임명되었다. 공정하고 충직한 인물로 이르는 곳마다 명성과 업적이 높았다. 1228년 지추밀원사가 되었고, 1232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서 왕경유수병마사가 되어 수도를 지키는 일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