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열(咸悅). 자는 성중(誠仲). 할아버지는 남찬(南璨)이고, 아버지는 동복현감(同福縣監) 남익(南翼), 어머니는 김인각(金麟角)의 딸이다.
1540년(중종 3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1544년 사간원정언 재임 중 세자시강원사서로 체직되었고, 1546년(명종 1) 지평·헌납·부수찬을 역임했다. 1547년(명종 2)에 홍문관수찬에 승진했다.
같은 해 지평에 제수되었을 때 도성에 도적이 범람하는데도 이를 알지 못했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홍문관교리로 체직되었다. 그러나 곧 지평에 다시 제수되고, 1548년 홍문관부수찬으로서 강원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원주 등지의 구황 실태를 조사하고 돌아왔다. 이후 홍문관수찬지제교 겸 경연검토관(弘文館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과 이조좌랑을 역임했다.
1549년 사인(舍人)과 부응교(副應敎)를 역임했고, 『중종실록(中宗實錄)』의 편찬시 춘추관기사관으로 참여했다. 1552년 홍문관전한을 거쳐, 경상도 어사로 파견되어 민생의 고충을 탐문했고, 지방 수령들의 탐학을 적발하고 돌아와 홍문관직제학에 승진했으며, 같은 해 통정대부에 승진하면서 승정원우부승지로 발탁되었다.
그 뒤 5년여에 걸쳐 승정원의 소임을 맡다가 1557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1558년 진위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같은 해 장례원판결사·개성부유수를 거쳐 1563년 한성부우윤·한성부좌윤·전라도관찰사를 역임했다.
1565년 함길도관찰사로 나갔고, 이듬해 한성부좌윤·동지중추부사·한성부판윤이 되었다.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죽음과 함께 외척으로 정권을 전단한 영의정 윤원형(尹元衡)이 실각되면서 사헌부로부터 윤원형에 아부하고 윤원형과 함께 구수담(具壽聃)을 모살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 뒤 곧 복직되고, 1567년(명종 22) 오위도총부부총관으로서 명종의 승하와 선조 즉위시 치안 유지에 기여하였고 이어서 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