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적만(敵萬), 호는 시북(市北). 할아버지는 증좌찬성 남응운(南應雲)이고, 아버지는 주부 남위(南瑋), 어머니는 좌의정 한확(韓確)의 손녀 딸이다. 종숙 의흥부원군(宜興府院君) 남대우(南大佑)에게 입양했다.
1606년(선조 39)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왕자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세마(洗馬)·위수(衛率)·통례(通禮)를 거쳐 1613년(광해군 5)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조좌랑·병조좌랑·정언·수찬·응교 등을 지냈다. 당시의 권신 이이첨(李爾瞻)이 보자고 청할 때 응하지 않아 미움을 사기도 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오위장(五衛將)·황해도관향사(黃海道管餉使)·안악군수·의주부윤 등을 역임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황주수성대장(黃州守城大將)으로 도원수 장만(張晩)을 도와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에 춘성군(春城君)으로 봉해졌다. 1626년(인조 4) 형조참판에 부총관을 겸했다.
1632년 인목대비의 상사(喪事)에 수릉관(守陵官)이 되었다. 나이 60이 되었는데도 능을 지키는 예법에 조금도 어김이 없으므로 주위 사람이 모두 탄복했다고 한다.
그 뒤 호조참판·형조판서 겸 지의금부도총관을 역임했다. 1635년 강화도유수를 역임했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까지 왕을 호종했고, 그 공으로 좌찬성에 올랐다.
이듬해 소현세자가 볼모로 심양(瀋陽)에 잡혀갈 때 우빈객으로 세자를 극진히 호위했으며, 돌아온 뒤 춘성부원군에 봉해졌다.
1638년 대사헌이 되어 법을 엄하게 집행했으며, 미신을 없애려고 음사(淫祠)를 파괴하고 무당을 학대했다. 1646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어 민회빈 강씨(愍懷嬪姜氏: 昭顯世子의 嬪)의 사사(賜死)를 반대하고 사직했다. 그 뒤 1647년 좌의정이 되었다. 본래 세업(世業)이 풍족해 부자라고 일컬었지만, 법제를 준수하며 자손들을 엄하게 단속해 사치를 억제했다고 한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