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노승용(盧昇容). 경상남도 창녕 출신. 노응규(盧應奎)의 족손(族孫)이며 제자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노응규와 함께 최익현(崔益鉉)의 휘하로 들어가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최익현이 태인을 지나 순창에서 활약하던 중 붙잡히자, 노응규와 함께 피신하였다.
1906년 가을 충청·경상·전라 3도의 분기점이며 요새이기도 한 황간군(黃澗郡: 지금의 永同郡) 상촌면 직평(稷坪: 피뜰) 마을로 들어가, 동지들을 규합하여 창의군(倡義軍) 의진(義陣)을 편성하였다.
대장에 노응규, 중군장에 서은구(徐殷九), 선봉장에 엄해윤(嚴海潤), 종사관에 노공일이 추대되었다. 이들은 무기를 제조하고 군사를 모아 다가올 전투를 위해 맹훈련을 하면서, 일부 의병을 시켜 경부철도 등의 군용시설을 파괴하고 일본군의 척후병을 섬멸하게 하였다.
그러나 1907년 1월 21일 충청북도경무서 황간군 분파소 순검들의 계략에 빠져 지도층 인사들이 잡히자, 이 창의군은 해체되었다.
노공일은 자신들이 제조한 화약을 이유(李有)에게 전달하러 가던 중 붙잡혔다. 이들은 한성경무서에 이송되어 옥중투쟁을 벌이다가, 노응규는 옥사하고, 노공일은 1907년 5월 18일 평리원(平理院)에서 서은구·엄해윤 등과 함께 7년 유형을 언도받았다.
이들 세명은 7월 백령도로 유배되었다가, 경술국치의 비보를 듣고 탈출하였다. 승복을 입고 전국을 유랑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었으나, 언제 어디서 사망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