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구영언』과 『가곡원류』의 각 이본에 두루 실려 있다. 그 밖에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일석본(一石本)과 주씨본(周氏本) 『해동가요』, 『시가(詩歌)』, 서울대학교본 『악부(樂府)』, 『근화악부(槿花樂府)』·『동가선(東歌選)』·『해동악장(海東樂章)』·『협률대성(協律大成)』·『화원악보(花源樂譜)』·『대동풍아(大東風雅)』 등에도 실려 있다.
『고금가곡(古今歌曲)』·『영언유초(永言類抄)』·『흥비부(興比賦)』 등에는 작자를 밝히지 않고 실었다. 『포은집(圃隱集)』·『해동악부(海東樂府)』·『약천집(藥泉集)』·『순오지(旬五志)』·『조선악부(朝鮮樂府)』·『소문쇄록(謏聞鎖錄)』 등에는 한역시가 전한다.
고려왕조가 멸망할 무렵, 뒤에 조선조 태종이 된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를 초대한 자리에서 「하여가(何如歌)」를 지어 그 마음을 떠보았다. 이에 대하여 응답하여 지은 것이 이 노래이다.
이방원은 만수산 드렁칡과 같이 서로 얽혀 백년까지 누리자고 하였다. 이 말을 받아 정몽주는 일백번 고쳐죽더라도 뜻이 변하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조선조 개국과정에서 반대파의 주장을 대변하였던 이 노래가 개국 후 신하의 충성심을 나타내는 노래로 널리 퍼졌다. 조선조가 내세운 유교적 지배질서와 부합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묘미있는 표현을 개척함으로써, 고려 말 새로운 갈래로 등장한 시조가 정착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