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금관가야(金官加耶)를 대가야(大加耶)라고 하였다. 이는 가야연맹 전기에는 금관가야가 맹주국이었기 때문이며, 금관가야를 본가야(本加耶)라고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런데『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에는, 고령군은 본디 대가야국으로 존속 기간이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부터 도설지왕(道說智王)까지 16세(世) 520년인데, 신라진흥왕(眞興王)이 쳐서 멸망시키고 그 땅을 대가야군(大加耶郡)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아마 금관가야의 세력이 약해진 뒤, 또는 금관가야가 멸망한 뒤 고령을 중심으로 한 가야국이 대신 맹주국이 되어 대가야라고 불렸기 때문인 듯하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562년(진흥왕 23) 가야가 배반했기 때문에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해 사다함(斯多含)과 함께 쳐서 멸망시켰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가야는 고령의 대가야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 때 금관가야는 이미 멸망하고 없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이 밖에도 가야에 대한 기사가 여러 곳에 등장하는데, 그것이 어느 가야를 말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또 대가야도 위와 같이 금관가야를 가리키는 경우와 고령가야를 가리키는 경우가 있어 혼란이 있고, 맹주국을 뜻하는 ‘임나(任那)’라는 용어도 금관가야를 말하는 것인지 고령가야를 말하는 것인지 혼란이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도 금관가야와 고령가야를 모두 ‘가라(加羅)’라고 불렀는데, 때로는 금관가야를 ‘남가라(南加羅)’라고 하여 고령가야와 구별하고 있다.『삼국사기』신라본기 진흥왕 23년조의 기사에 해당되는『일본서기』긴메이(欽明紀) 23년(562)조에 “신라가 임나관가(任那官家)를 쳐서 멸망시켰다”라 하고, 그 주(注)에 가라 10국의 이름을 열거했는데 그 중에 가라국(加羅國)이 있다.
이 가라국은 고령가야를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일본서기』에서 ‘임나’라는 용어는 여러 가야를 통틀어 부르는 데 썼으므로 우리 나라의 경우와는 다르다. 우리 나라에서는 특정한 맹주국, 즉 대가야를 임나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헌에 따라 가야·가라 또는 대가야라는 용어를 달리 사용해『가락국기』에 나오는 가야의 멸망 연대에 대해서도 혼란이 있었다.
즉, 구형왕(仇衡王)이 신라에 항복한 해를 보정 2년(562)이라 하고, 그 아래에 「개황록(開皇錄)」을 들어 양(梁)나라의 중대통(中大通) 4년(532)에 신라에 항복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전자는 고령가야가 멸망한 연대이고, 후자는 금관가야가 항복한 해이므로 이런 혼란이 있었던 것이다.
경상북도 고령 지산동(池山洞)에 굉장히 큰 가야시대의 무덤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 중 발굴된 여러 무덤에서 놀라운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무덤으로 보아 고령가야가 가야의 맹주국, 즉 대가야였던 것이 입증된다.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유물 문화는 그 지역 일대에 일원적으로 확산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합천 옥전·번계제고분군, 산청 중촌리고분군, 함양 산백리·백천리 고분군, 남원 월산리 고분군, 장수 삼고리 고분군 등에서 출토된 5세기 후반 이후의 유물들의 유사성은 그러한 상황을 반영한다. 6세기 전반에는 고령계 유물 문화의 전파가 더욱 심화되어 진주 수정봉·옥봉고분군, 고성 율대리고분군, 함안 도항리고분군에까지 고령계 토기가 확산되었다. 그러면서도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유물은 다른 지역들에 비해 질과 양의 측면에서 우월성을 유지하고 있어 해당시기에 고령을 중심으로 한 연맹체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왜와의 교역 역시 고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5세기 후반의 일본열도 각 지역의 유력한 수장묘(首長墓)들에 대가야 계통의 위세품(威勢品)으로 보이는 마구(馬具), 장신구들이 주류를 나타내고 있고, 고령 양식의 토기들도 일본 큐슈 및 세토나이해 연변 각지에 널리 분포되었다. 또한 왜계(倭系) 물품이 고령·합천 등 가야 북부 지역에 들어오고 있어 왜와의 무역과 교류의 중심 역시 김해서 고령으로 옮겨진 정치적 변화가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