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둘레 약 1,300m. 지정면적 10만5238.5㎡. 금호강(琴湖江)과 신천(新川)이 감싼 평원에 다시 달서천(達西川)이 휘감은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토루(土壘)를 쌓은 것으로, 안쪽 경사면은 6m 정도이고 바깥쪽은 9m 이상의 험준함을 의지하였다.
성벽의 아랫부분의 조사에서 초기철기시대의 조개더미와 각종 유물이 나타나서, 이 지역일대에 정치세력이 성장하면서 초기적 국가형태를 형성한 단계에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점해왕 15년(261) 2월 달벌성(達伐城)을 쌓고 나마(奈麻) 극종(克宗)으로 성주를 삼았다고 하니, 이것이 곧 달성의 축조기록이라 믿어지고 있다.
조선시대의 각종 지리지에서는 돌로 쌓고 둘레 944자이며 높이가 4자인데 성안에 우물 세 곳과 두 개의 연못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세종 때 토루 위에 석축으로 수축한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성안에는 조선시대 초기까지도 군창(軍倉)이 있었고, 1736년(영조 12) 새로이 대구읍성을 쌓을 때까지 보장(堡障 : 성의 바깥요소에 일시적으로 쌓은 소규모의 요새)노릇을 하였다. 이곳은 달성서씨(達城徐氏)의 세거지(世居地)로 알려져 있고, 1905년부터 공원이 되었다.
성의 입지조건이 경주월성(慶州月城)과 비슷하여, 우리 나라 남부지역의 초기 성곽의 전형으로 평가되고 있다. 1968년의 조사 결과 성벽을 흙으로 쌓았으며, 높이는 차이가 있으나 이때의 절단부는 약 4m였다.
한편, 성의 서남쪽으로 연결된 구릉지대에는 많은 돌방무덤이 있고, 여기서 금동관(金銅冠) 등의 유물이 발견되어 큰 세력을 가진 정치적 지배자의 존재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