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선언서 ()

목차
관련 정보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근대사
문헌
1918년 11월 만주 · 노령을 중심으로 당시 해외에 나가 있던 저명인사 39명이 한국의 독립을 선포한 선언서.
이칭
이칭
무오독립선언서
목차
정의
1918년 11월 만주 · 노령을 중심으로 당시 해외에 나가 있던 저명인사 39명이 한국의 독립을 선포한 선언서.
개설

1918년 무오년에 선포되었다 하여 ‘무오독립선언서’라고도 하며, 작성자는 조소앙(趙素昻)이라고 한다. 조소앙은 “1919년 정월, 선언서의 초안을 서두르게 되었다”라고 하였고, 『지산외유일지』에는 “3월 11일에 선언서를 인쇄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무오독립선언서라는 이름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무오독립선언은 무오년인 1918년에 발표된 선언서가 아니었으며, 1919년 3월 1일 이후에 발표되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내용

이 독립선언서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국임과 민주의 자립국임을 선포하고, 우리 대한은 타민족의 대한이 아닌 우리 민족의 대한이며, 우리 한토(韓土)는 완전한 한인의 한토이니, 우리 독립은 민족을 스스로 보호하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지, 결코 사원(私怨)의 감정으로 보복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일본의 병합 수단은 사기와 강박과 무력폭행 등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이니,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2,000만 동포들에게는 국민된 본령이 독립인 것을 명심하여 육탄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독립선언서의 특징으로는 먼저 우리 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서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한일병합의 무효를 선포하고, 우리 독립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게 할 것”을 요구했다는 점, 무력적 대항을 선포하고 그 선언서의 대표자로는 해외의 저명한 인사가 거의 망라되어 있다는 점 등도 들 수 있다.

이 독립선언서에는 김교헌(金敎獻)·김동삼(金東三)·조용은(趙鏞殷)·신규식(申圭植)·정재관(鄭在寬)·여준(呂準)·이범윤(李範允)·박은식(朴殷植)·박찬익(朴贊翼)·이시영(李始榮)·이상룡(李相龍)·윤세복(尹世復)·문창범(文昌範)·이동녕(李東寧)·신채호(申采浩)·허혁(許0x9831)·이세영(李世永)·유동열(柳東說)·이광(李光)·안정근(安定根)·김좌진(金佐鎭)·김학만(金學滿)·이대위(李大爲)·손일민(孫一民)·최병학(崔炳學)·박용만(朴容萬)·임방(林0x964f)·김규식(金奎植)·이승만(李承晩)·조욱(曺煜)·김약연(金躍淵)·이종탁(李鍾倬)·이동휘(李東輝)·한흥(韓興)·이탁(李沰)·황상규(黃尙奎)·이봉우(李奉雨)·박성태(朴性泰)·안창호(安昌浩) 등이 서명하였다.

참고문헌

『항일선언·창의문집(抗日宣言·倡義文集)』(유광렬, 서문당, 1975)
『독립운동사』 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한국독립선언서소고(韓國獨立宣言書小考)」(김근수, 『한국학(韓國學)』 28, 영신아카데미한국학연구소, 1983)
관련 미디어 (1)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