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의 국기
정치
지명
아시아 대륙의 북동부에 있는 한반도의 중남부에 위치한 민주공화국.
정의
아시아 대륙의 북동부에 있는 한반도의 중남부에 위치한 민주공화국.
개설

영어 명칭은 Republic of Korea. 남쪽으로는 1,000㎞에 이르며, 북쪽으로는 중국 · 러시아와 접경을 이루고 있다. 남북한 전체 면적은 영국이나 루마니아와 비슷한 크기이고, 남한은 헝가리나 포르투갈보다는 조금 크고 불가리아보다는 조금 작다.

전 국토의 70%가 산악 지역으로 서해로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동해로는 급격한 경사를 이룬다. 또한 국토의 면적에 비하여 강이 많은 편이다. 기후는 사계절이 뚜렷하여 덥고 습한 여름과 춥고 건조한 겨울은 길고, 상쾌하고 청명한 날의 봄 · 가을은 비교적 짧다. 기온은 겨울에는 영하 15℃로 내려가고, 여름에는 34℃로 올라간다.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는 샤머니즘 · 불교 · 유교이며, 이들은 역대 국가들의 문화발달 및 사상과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그 밖에 근대 이후 고유 종교인 천도교를 비롯해 외래 종교인 기독교(개신교) · 천주교를 믿는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주민은 한국인이고 인종적으로는 몽골계에 속하며, 고조선시대 이래로 단일민족으로서 존속하여 왔다.

고조선 이후 고대의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중세의 고려시대, 근세의 조선시대로 이어져 오던 우리나라는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국권을 상실하고 식민지 지배체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오랫동안 독립투쟁을 벌여오던 우리 민족은 일본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함으로써 마침내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광복과 더불어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의 군대가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각각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게 됨으로써, 일제로부터 광복은 되었으나 독립을 이루지 못한 채 오히려 남북이 분단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한국민족의 열망이 국제연합에 반영되어 1947년 제2차 UN총회에서 UN한국감시위원단 감시하의 남북한 동시 총선거가 제의되었으나, 북한은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어 5월 31일 제헌국회가 개설되었다.

제헌국회는 7월 17일 「대한민국헌법」을 제정, 공포하고(제9호 개헌 때부터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명시) 그 달 20일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李承晩)을 선출하였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 국내외에 그 성립을 선포하고 자유민주주의국가의 일원으로서 출발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국제연합은 이와 같이 성립된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에서의 유일한 합법적 정부’로 인정하였다.

대한민국은 정부를 수립하면서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규정,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한반도 전체를 통할함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하나의 정치공동체로서의 실제 행정영역은 북위 38°선 이남으로 한정되다가 1953년 휴전 이후에는 휴전선 이남으로 바뀌었다. 휴전선을 경계로 한 현재의 행정영역은 한반도 총면적 22만 258㎢의 약 45%인 9만 9720㎢이다.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특별시이며, 행정적으로는 서울특별시, 1개 특별자치시, 6개 광역시, 2개 특별자치도, 7개 도로 구분되어 있다. 총인구는 1988년에 4197만 5000명이었으나 2015년 현재 5061만 7045명이며, 인구밀도는 1988년에는 423명/㎢이었으나 2010년 현재 485명/㎢이다.

대한민국의 국어는 한국어이며, 문자는 한글 전용을 원칙으로 하되 꼭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한자를 병기하고 있다. 통화는 원화(won貨)이며, 국기는 태극기(太極旗), 국가(國歌)는 애국가, 국화는 무궁화이다.

대한민국의 정치

정치

1945년 8월 15일 우리 겨레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이때부터 3년 동안 통일정부의 수립을 위한 노력이 국내외적으로 기울여졌으나 불행히도 그 열매를 맺지 못하다,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서는 대한민국이 수립되었고 9월 9일 북한에서는 김일성 정권이 세워졌다.

정부수립과정

일제의 패망에 따른 조국의 광복은 환희와 더불어 안타깝게도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통일된 독립운동조직이 없었던 상황에서 통치권은 공백상태가 예상되었다.

이때 조선총독부는 송진우(宋鎭禹)와 여운형(呂運亨) 등의 조선의 지도자들과 치안권 또는 행정권의 이양을 협의한 끝에 여운형에게 치안권을 포함한 행정권의 일부를 넘겼다. 여운형은 치안유지의 차원을 넘어 과도정부 수립을 목표로 광복 이틀 뒤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 약칭 建準)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당초 좌우익과 중간노선의 정파 모두를 포함하려 하였던 건준은 안재홍(安在鴻) 중심의 우파들이 탈퇴하고 박헌영(朴憲永)이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은 뒤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공산주의자들이 선포한 이른바 ‘인공(人共)’에는 사전승낙도 없이 우익민족지도자들조차 망라하고 있어 국민들을 현혹시켰으며, 이는 미군이 진주하여 10월 10일 불법단체로 선언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이 시기에 건준 및 조선인민공화국에 반대하는 보수 계열의 지도자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국민대회를 준비하는 등의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공산주의자의 활동에 비해서는 미약하였다.

뒤이어 해외에 있던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이 귀국함에 있어 미군정 당국은 ‘인공’을 부인하는 논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조차 부인함으로써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한반도에는 정치세력의 분립현상이 나타났다.

그 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 · 영국 · 소련 3개 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결정된 「코리아에 관한 의정서」 가운데 신탁통치안을 둘러싸고 정치세력들은 찬탁과 반탁으로 양극화되었다.

국내 정치세력들이 모스크바 결정을 둘러싸고 그것을 반대하는 보수세력의 ‘비상국민회의’와 그것을 지지하는 좌파들의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대립하는 가운데 모스크바 결정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한반도의 통일문제가 논의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 20일부터 5월 12일까지, 그리고 1947년 5월 21일부터 10월 18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서울에서 열리는 동안 소련점령군 당국은 북한지역에서 토지개혁, 산업시설의 국유화, 지방정권기관 조직 등 단독공산정권 수립작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에 무관심할 수 없었던 미군정 당국도 1946년 2월 군정청 자문기관으로 구성되었던 ‘남조선민주의원’을 그 해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으로 개편하면서 북한지역의 동향에 대응하게 되었다.

미군정 당국은 남한에서의 좌우합작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고 이승만의 단정(單政) 추진이 벌어지는 가운데 ‘남조선과도입법의원’조차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인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거부하는 등,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신탁통치 대신에 최단시일 내 독립정부 수립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 정부는 1947년 9월 17일 한국독립문제를 국제연합총회에 의제로 상정하였으며, 국제연합총회는 11월 14일 국제연합 감시하의 총선거를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총선거를 감시하기 위한 국제연합 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入北)이 소련 당국에 의하여 거절됨으로써 총선거는 선거감시가 가능한 남한지역에서만 이루어졌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지역에서는 유권자 총수의 75%가 투표에 참가하여 198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함으로써 제헌의회를 출범시켰다. 북한공산 당국 역시 1947년 11월 헌법제정에 착수하였으며, 1948년 4월 초안을 채택하고 그 해 9월 8일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한 뒤 이를 확정하게 되었다.

이로써, 국제연합총회가 결의한 토착인구비례에 의한 국회 구성과 이 국회로 하여금 독립된 통일정부를 수립하게 한다는 결정은 실현되지 못하고 한반도는 정치적으로 분단의 길을 걷게 되었다.

총선에 즈음해서 김구(金九) · 김규식(金奎植) 등 일부 지도자들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면서 통일정부 수립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들의 노력에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호응하여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정치협상회의가 열리기도 하였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헌정사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국가이념으로 한 헌법을 채택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헌정을 유지해 오고 있다. 제1공화정은 1948년 5월 10일에 실시된 총선거의 기초 위에서 세워졌다. 이때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남북협상 지지세력은 5 · 10선거를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 5 · 10선거 결과 제헌국회에는 적지 않은 수의 무소속 의원들이 포함되었으나 대체로 5 · 10선거를 추진하여 온 이승만계와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약칭 한민당)계 의원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일단 제1공화정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곧 한민당을 배척하였으며, 그리하여 한민당은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 약칭 민국당)으로 개편되면서 야당의 입장에 섰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민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세력과 중도파가 크게 진출한 반면에 이승만 지지파와 민국당은 크게 위축되었다. 한 달도 채 못 되어 북한의 남침에 의한 6 · 25전쟁이 일어났으며, 정부는 부산으로 옮겨갔다.

여기서 이승만은 자유당(自由黨)을 창당하여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였으며, 반대파는 이를 막고자 하였다. 이러한 대치상황에서 이승만은 1952년 여름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을 거쳐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그 헌법에 의한 대통령직선제에 따라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55년 5월 20일 제3대 민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비로소 정당정치의 모습이 뚜렷하게 나타나 무소속 당선의 수가 크게 줄었다. 이 선거에서 이승만이 이끄는 자유당은 원내 제1당으로 등장하였고, 민국당은 제1야당으로 등장하였으나 열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자유당은 곧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철폐하는 개헌안을 이른바 ‘사사오입(四捨五入)’이란 방식을 통하여 불법적으로 통과시켰고, 이에 맞서 반대세력 가운데 보수세력은 민주당(民主黨)으로 결집되었고 혁신세력은 진보당(進步黨)으로 결집되어 1956년 5월 15일 실시된 제3대 대통령 · 제4대 부통령선거에 임하였다. 이 선거에서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신익희(申翼熙)가 유세 도중 급서하여 이승만은 여유 있게 승리하였다.

그러나 진보당의 대통령후보인 조봉암(曺奉岩)이 200여만 표를 얻었고 부통령에는 민주당의 장면(張勉)이 당선되어 자유당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강하게 표출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1958년 5월 2일에 실시된 제4대 민의원선거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 제1야당인 민주당이 대도시에서는 물론, 중소도시의 많은 곳에서 승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헌저지선인 원내 3분의 1선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자연히 국민의 관심은 1960년에 실시될 제4대 대통령선거와 제5대 부통령선거로 집중되었다. 마침내 자유당 정권은 3월 15일 전국적인 부정선거를 실시하여 자유당의 이승만 · 이기붕(李起鵬)을 대통령 및 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이에 저항한 4월 19일의 전국적 학생의거는 4월 26일의 시민혁명으로 발전하였고 결국 제1공화정은 붕괴되었다.

제1공화정의 붕괴와 함께 외무장관(수석국무의원) 허정(許政)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가 출범하여 의원내각제로 개헌하고, 1960년 7월 29일 제5대 민의원선거와 초대 참의원선거를 실시하였다. 선거의 결과는 민주당의 압승이었다. 그리하여 윤보선(尹潽善)을 대통령으로 하고 장면을 국무총리로 한 제2공화정이 1960년 8월 13일 출범하였다.

제2공화정은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하여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2년 가까이 계속된 권위주의체제의 급격한 붕괴라는 새로운 상황 속에 각계각층의 욕구가 분출하여 사회는 안정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정치 역시 갖가지 분파작용을 거듭할 뿐 제 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여기에 혁신계를 중심으로 하는 통일운동 및 현상타파운동이 급격히 번져나가며 기존 질서의 안정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1961년 5월 16일의 군사정변은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났다. 군사정변의 주동자들은 반공을 앞세우며 제2공화정을 무너뜨린 후 군정을 실시하였고,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민투표제를 통하여 새 헌법을 확정지었다.

1963년 1월 1일자로 민간인의 정치활동이 다시 시작되었고, 5 · 16세력은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으로, 반대세력은 민정당(民政黨) 등으로 결집되었다.

1963년 10월 15일에 실시된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후보 박정희(朴正熙)는 민정당의 후보 윤보선을 가까스로 누르고 당선되었고, 11월 26일에 실시된 제6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공화당은 제1당이 되었다. 민정당과 민주당 등은 원내에서 삼민회(三民會)라는 교섭단체를 만들어 이에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제3공화정이 1963년 12월 17일 출범하였다.

제3공화정은 ‘조국근대화’라는 구호를 앞세우고 경제개발정책을 추진해 나갔으며, 한일국교정상화와 국군의 베트남파병을 실현하였다. 제3공화정은 1967년 실시된 첫번째 국민의 심판을 통과하였는데, 그 해 5월 3일에 실시된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는 신민당(新民黨)으로 결집한 단일야당의 후보 윤보선을 여유 있는 표차로 물리쳤으며, 6월 8일에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선거에서도 공화당은 여전히 제1당의 자리를 지켰다.

1969년 박정희는 자신의 3선을 가능하게 하는 개헌안을 불법적으로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할 수 있었고, 집권여당의 이점과 여러 형태의 부정을 통하여 신민당 후보 김대중(金大中)을 힘겹게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어 5월 25일에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선거에서도 박정희의 공화당은 고전을 면하지 못하여, 비록 제1당의 지위를 굳히기는 하였으나 신민당의 공세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무렵 국제적으로는 강대국들 사이에 긴장완화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물결이 우리나라에도 밀려와 남북대화가 열리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1972년 7월 4일 역사적인 ‘남북공동성명서’가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그 뒤 박정희는 통일에 대비한다는 명분 아래 1972년 10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여 제3공화정을 유신체제(維新體制), 곧 제4공화정으로 대체시켰다. 이 체제 아래 그는 1972년 12월 23일 새 헌법이 마련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임기 6년의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1973년 2월 27일 제9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의석의 3분의 1은 사실상 대통령이 임명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추인하는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 의원으로 채워졌고, 나머지 3분의 2는 1선거구에서 2명씩 당선되는 지역구 의원들로 채워졌다. 지역구 선거에서 공화당이 제1당을 차지하여 원내는 공화당과 유정회의 여권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원내의 세력분포와는 관계없이 원외에서는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투쟁이 범국민적 차원으로 확산되어 갔다. 정부는 해외망명투쟁의 구심점이던 김대중의 납치와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발동으로 이와 같은 사태에 대처하였으나, 반유신운동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반대 속에서 박정희는 1978년 7월 4일에 실시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를 통하여 제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1978년 12월 12일에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지역구 선거에서 공화당은 신민당보다 1.1% 뒤진 득표밖에 얻지 못했다.

사실상 승리하였다고 확신한 신민당은 정부에 대한 보다 선명한 투쟁을 내건 김영삼(金泳三)을 새 총재로 선출하고 유신체제에 대한 공세를 가중시켰다. 정부와 여당은 사법적인 조처를 통하여 그의 의원직을 박탈하였다.

이 같은 상황은 곧바로 부마사태(釜馬事態)를 낳았으며, 이 소용돌이 속에서 집권층은 분열되어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가 박정희를 암살하기에 이르렀고, 이로써 유신체제는 사실상 끝을 맺었다.

박정희의 피살과 함께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였는데, 권력의 중추는 12월 12일 사실상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全斗煥) 중심의 신군부로 넘어갔다. 신군부는 곧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열어 국무총리 최규하(崔圭夏)를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한편, 반대세력은 최규하체제를 유신체제의 연장으로 보고 민주화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때 공화당 총재 김종필(金鍾泌), 신민당 총재 김영삼, 그리고 반유신투쟁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온 김대중 등 이른바 3김(三金)이 각각 대통령선거전에 뛰어들었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의 실질적인 영향권 아래 놓여 있던 최규하 정부는 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김대중과 그 측근 지도자들 및 재야지도자들을 구속하였다. 이에 대한 항쟁이 전라남도 광주에서 발생하였으며, 마침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신군부는 이 운동을 유혈진압함으로써 이른바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우리나라 역사상 커다란 비극을 낳았다.

전국적인 계엄하에서 정국불안이 점차 수습되면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제11대 대통령에 전두환을 선출하였다. 이 정부 아래 새 헌법이 확정되었고, 1981년 2월 25일 그는 새 헌법이 마련한 선거인단선거에서 제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제5공화정이 출범하였다.

제5공화정의 출범과 더불어 3월 25일 제11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 여당인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이 제1당으로, 민주한국당(民主韓國黨)이 제1야당으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이 제2야당으로 등장하였다.

1985년 2월 12일 실시된 제1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정당은 제1당의 위치를 굳히기는 하였다. 그러나 선명야당의 깃발 아래 출발한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이 제1야당으로 등장하면서 민한당을 흡수하여 국회사상 최대의 야당이 되었다. 2 · 12총선과 더불어 헌법의 개정 여부가 국내정치의 쟁점이 되었다.

야당은 직선대통령중심제로의 개헌을 부르짖었고, 여당은 처음에는 호헌을 주장하다가 1986년 이후 의원내각제 개헌으로 돌아섰으며, 결국에는 1987년 6월항쟁에 압도되어 6월 29일 ‘민주화선언(民主化宣言)’을 통하여 직선대통령중심제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아홉 번째가 되는 새 헌법은 다시 직선대통령제로 돌아섰다. 같은 해 12월 16일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어 노태우(盧泰愚)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그가 1988년 2월 25일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제6공화정이 출범하였다.

제6공화정이 출범한 직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 약칭 민정당)은 제1당이 되었으나 과반수 의석을 얻지는 못하였으며, 김대중의 평화민주당(平和民主黨, 약칭 평민당)이 제2당으로, 김영삼의 통일민주당(統一民主黨, 약칭 민주당)이 제3당으로,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新民主共和黨)이 제4당으로 등장하였다.

1990년 3월 민정당은 통일민주당 및 신민주공화당을 통합하여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약칭 민자당)으로 발족하였으나 1992년에 실시된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과반수 의석을 얻는 데 실패하였다.

그렇지만 1992년 12월 18일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의 김영삼이 승리하여 1993년 2월 25일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는 자신의 정부를 문민정부라고 불렀다.

그 뒤 1995년에 실시된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이어 1996년 실시된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자당에서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꾼 집권여당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는 상당한 강세를 보였다.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은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과 제휴를 성사시킴으로써 마침내 당선되어 1998년 2월 25일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는 자신의 정부를 국민의 정부라고 불렀다. 이 정부는 대한민국 최초의 공동정권이다. 현재 제1당은 이회창(李會昌)이 이끄는 한나라당으로 이 당은 신한국당의 후신이다.

정치제도

앞에서 보았듯이 40년 헌정사에서 잦은 개헌을 경험한 결과 대한민국의 정치제도 역시 자주 바뀌어 왔다. 제1공화정 때는 대체로 대통령제를 골격으로 하되 의원내각제의 요소들을 어느 정도 가미하였다. 국무총리를 둔 점, 국회에 국무위원불신임권을 준 점 등이 그 예들이다.

한편, 제1차개헌과 제2차개헌에서 모두 국회의 민의원 · 참의원 양원제가 규정되었으나 정부는 참의원선거를 끝내 실시하지 않았다. 「지방자치법」은 1949년에 공포되었으나 그 첫 번째 지방의회선거는 1952년 4, 5월에 실시되었다.

제2공화정은 의원내각제 헌법을 채택하였다. 대통령은 상징적이며 의전적인 국가원수에 지나지 않았고, 행정권은 내각인 국무원에 소속되어 국무총리가 행정권의 수반이 되었다. 국회는 민의원과 참의원의 양원으로 구성되었고, 민의원은 내각을 불신임할 수 있는 반면 국무원은 민의원을 해산할 수 없었다.

경찰의 중립을 보장하기 위하여 공안위원회를 설치하였고, 사정위원회를 폐지하는 대신에 감찰위원회를 부활시켰다. 한편, 각 부에 사무차관과 정무차관을 두었다. 지방자치 행정제도는 1960년 11월부터 바뀌어, 지방자치단체의 장인 도지사와 서울특별시장 및 시 · 읍 · 면 · 동 · 이장을 주민의 직선으로 뽑게 하였다.

제2공화정의 붕괴와 더불어 군사쿠데타 주도자들은 군정의 실질적 중추기관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하였다. 이 기관은 입법권을 행사하였으며, 사실상 행정부와 사법부를 지휘하였다. 군정기간 동안 국회와 지방의회는 모두 해산되었고, 정당은 1962년 12월 31일까지 해산되었다.

제3공화정은 고전적 삼권분립원칙에 입각한 대통령제이었다. 국민 직선에 의하여 선출되는 대통령은 국가원수이면서 행정부 수반이며,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속하였다. 대통령제이면서도 제1공화정 때와는 달리 부통령제를 두지 않았다.

단원제인 국회는 대통령은 물론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에 대해서도 불신임권을 가지지 못하였다. 정부 역시 국회를 해산할 수 없었다.

중앙행정관청으로 감사원과 중앙정보부가 신설되었고, 자문기관으로 국가안전보장회의와 경제과학심의회의가 신설되었으며, 국무총리에 직접 소속되는 중앙행정기관으로 경제기획원이 신설되어 그 장관이 부총리를 겸하였다. 1969년 국토통일원이 신설되었다.

지방자치단체의 장으로 서울특별시장과 부산직할시장, 그리고 도지사와 시장 및 군수를 두었는데 그들은 모두 대통령에 의하여 임명되었고, 지방의회는 설치되지 않았다.

대법원장은 법관추천회의의 제청에 의하여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였다. 대법원판사는 대법원장이 법관추천회의의 동의를 얻어 제청하고 대통령이 임명하였다. 일반법관은 대법원판사회의의 의결을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하였다.

제4공화정의 유신헌법은 대통령의 권한을 크게 증대시켜 대통령에게 입법부와 행정부 및 사법부의 총조정자로서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대통령은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고 국회를 해산시킬 수 있으며 비상사태에 임하여 긴급조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대통령의 임기는 6년으로, 새 헌법기관으로 설치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하여 간선되었다.

국회는 단원제이며 국회의원의 임기는 6년으로 늘어났다. 의원의 3분의 2는 중선거구제 아래 1구 2인씩 선출되며, 3분의 1은 대통령이 추천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선출하였다. 국회는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의 불신임을 의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신헌법 이전의 헌법에서 국회가 가졌던 국정감사권은 폐지되었다. 대법원장과 대법원판사 및 일반법관의 임명권은 대통령이 가졌다. 유신헌법 이전의 헌법에서 규정된 법관추천회의는 폐지되었다. 전반적으로 입법부와 사법부의 지위는 격하되었다.

지방자치제도의 실시는 여전히 유보되었으며 지방행정제도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중앙행정제도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는데, 공업진흥청과 특허청 및 항만청이 신설되고 농림부가 농수산부로, 내무부 치안국이 내무부 치안본부로 각각 개편되었다.

제5공화정의 정부형태는 대통령제를 기본으로 하면서 내각책임제의 요소를 가미하였다.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속하고, 대통령은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하여 간선되며 임기는 7년으로 연장되었다. 대통령은 긴급조치권과 국회해산권을 가졌다.

국회는 단원제로서 의원의 3분의 2는 중선거구제 아래 1구 2인씩 선출되고 3분의 1은 전국구로 선출하게 되었으며, 임기는 4년으로 되었다. 국회는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에 대하여 개별적으로 해임을 의결할 수 있었으며, 국정조사권을 가졌다.

대법원장과 대법원판사 및 일반법관의 임명권은 대통령이 가졌다. 헌법위원회가 일종의 헌법심사기관으로서의 구실을 수행하였다. 한편, 대통령의 통일정책자문기관으로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가 헌법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제5공화정의 행정제도는 제3 · 4공화정의 행정제도에 비하여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뜻에서 1981년 10월에 단행된 행정개혁을 통하여 행정기구가 많이 축소되었다.

한편, 정부 부서로 1982년 체육부가 신설되었고, 1981년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1985년 원호처가 국가보훈처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지방자치제도의 실시는 여전히 유보되었다.

제6공화정에서는 중앙행정기구에 변화가 있었다. 그 대표적 예로 문교부가 교육부로, 체육부가 체육청소년부로, 문화공보부가 문화부와 공보처로, 국토통일원이 통일원으로 바뀐 것을 들 수 있다.

김영삼 정부에서도 개편이 이루어졌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재정경제원으로, 건설부와 교통부가 건설교통부로, 상공부와 동력자원부가 통상산업부로 각각 통폐합되었으며, 보건사회부는 보건복지부로 개칭되었다.

김대중 정부에서도 개편이 이루어졌다. 외무부가 통상산업부의 통상기능을 흡수하여 외교통상부로, 문화부가 체육청소년부 및 공보처를 흡수하여 문화관광부로, 내무부와 총무처가 행정자치부로 각각 통폐합되었으며, 통상산업부는 산업자원부로 바뀌었고, 과학기술처는 과학기술부로 승격되었다. 기존의 정무 제1장관실이 폐지되었고, 여성문제를 전담하였던 정무 제2장관실은 대통령직속 여성특별위원회로 바뀌었다.

한편, 공무원제도는 제1공화정의 수립과 더불어 근대적 의미의 민주행정제도가 「헌법」과 「정부조직법」 및 「국가공무원법」에 규정되었고, 이에 따라 공무원제도가 법적으로 확립되었다. 공무원제도의 발전과정은 국가공무원제도와 지방공무원제도의 두 갈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국가공무원제도는 1949년 8월 제정된 「국가공무원법」에 의하여 처음으로 그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 법은 공무원이 주권을 가진 국민의 수임자로서 국민의 봉사자요 국민의 대표자임을 명백히 규정하였다.

「국가공무원법」은 그 뒤 몇 차례 개정되었다. 최근의 개정의 한 예는 유신 이후인 1973년 2월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개정을 통하여 민주적 공무원제도와 직업공무원제도가 확립되어 왔다. 국가공무원의 중앙인사기관으로 현재 행정자치부와 소청심사위원회 및 중앙징계위원회가 있다.

국가공무원의 임용은 신규임용 또는 승진임용에 의하며, 모두 성적주의에 따른다. 국가공무원의 교육 및 훈련기관으로 중앙공무원교육원이 있다.

지방공무원에 관한 최초의 법적 근거는 1950년 2월에 제정된 「지방공무원령」에 의하여 마련되었다. 그러나 「국가공무원법」에 비하여 불합리성이 적지 않았으므로, 1963년 11월 「지방공무원법」이 제정되어 지방공무원제도의 확립을 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외교

정책변천

대한민국은 제1공화정 수립과 동시에 자신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간주하고 북한의 공산정권을 부인하였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외교는 줄곧 이 입장을 국제사회에 뿌리내리려는 노력으로 일관되어 왔다.

대한민국은 우선 1948년 12월 12일 제3차 UN총회에서 승인받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뒤따라 1949년 1월 1일 미국이, 1월 4일 중화민국이, 1월 18일 영국이, 2월 5일 프랑스가, 그리고 3월 3일 필리핀이 각각 대한민국을 승인하였다.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승인은 계속되어 1950년 6 · 25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대한민국을 승인한 나라의 수는 30개 국에 가까웠다. 이에 비하여 북한을 승인한 나라는 소련권에 국한되었다.

국제사회에서의 승인을 넓혀가면서, 제1공화정은 그 초기에 태평양동맹체의 발족을 추진하였다. 주로 중화민국 및 필리핀과 손을 잡고 반공의 성격을 가지는 지역공동체를 출범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도는 미국의 냉담한 반응으로 좌절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전면남침이 시작되면서 대한민국은 미국과 국제연합의 적극적 지원을 받았다. 3년간의 전쟁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매듭지어진 뒤 한반도문제의 궁극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이 1954년 제네바에서 열렸다.

남북한이 함께 참석한 이 회담에서 대한민국 대표단은 14개 항목의 제의를 하였다. 그 핵심적 내용은 대한민국 주권 아래 남북한을 통일한다는 것이었다. 제네바회담은 자유진영의 입장과 공산진영의 입장이 대립되어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6 · 25전쟁과 제네바회담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의 친미 · 친서방 · 친UN외교는 더욱 강화되었다. 반면에, 공산권에 대해서는 물론 중립국가들에 대해서조차 반공적 입장에서 철저히 반대하는 노선을 걸었다.

1960년 4 · 19혁명으로 제1공화정이 붕괴되고 제2공화정이 수립되면서, 정부는 제1공화정의 반공적 외교노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노선은 한계에 부닥쳤다.

왜냐하면, 1950년대 후반 이후 독립을 얻어 UN에 가입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국들은 반서방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친미적 대한민국의 외교노선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중립국들은 1961년 봄 제15차 UN총회에서 대한민국대표만을 초청하던 종래의 결정에 반대하여 남북한대표를 동시에 초청할 것을 제의하였다. 미국은 북한이 UN의 권위와 권능을 인정한다면 남 · 북한 동시초청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았고, 그리하여 이 수정안은 통과되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군정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국가들은 물론 중립국가들, 이른바 제3세계에 외교적으로 접근해 갔다. 이 노력은 어느 정도 효과를 나타내어 대한민국의 외교관계는 넓어져 갔다.

군정을 계승한 제3공화정은 우선 일본과의 관계정상화를 추진하였다. 국내에서의 많은 반발을 무릅쓰고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관계협정’을 체결하였다.

그 뒤 제3공화정은 베트남전에 깊이 개입하였는데, 1964년 9월 이동육군병원팀과 태권도팀을 보낸 것을 시작으로 1965년부터 1973년 사이에 국군을 보내어 전투에 참가시켰다. 베트남파병은 한미간의 유대를 크게 강화시켰으나 친공적 중립국가들로부터는 상당한 반발을 받았다.

제3공화정은 이어 아시아 · 태평양이사회(ASPAC)의 창설에 성공하였다. 1966년 6월 일본과 필리핀을 비롯한 8개 국 각료가 서울회의를 열고 이 지역 최초의 지역협력기구를 발족시킨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와 이 기구는 사실상 소멸되었다.

1969년 미국에 닉슨(Nixon,R.) 행정부가 들어서고, 베트남으로부터의 미군철수와 남한에서의 미군감축을 포함한 아시아에 있어서의 미국의 의무감소정책인 ‘닉슨 독트린’을 채택한 뒤 한미관계는 긴장을 겪었다.

특히, 미국이 공산권과의 긴장완화를 추구하고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면서 대한민국에 대하여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권고한 것은 우리 정부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러나 곧 국제질서의 변화를 받아들여 북한과의 대화를 추진하여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1973년부터 남북한관계는 다시 교착되고 때로는 긴장의 고조를 겪었다.

남북공동성명의 발표는 국제사회에 대하여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 또는 ‘정부’가 실존한다는 인상을 심어주었고, 그리하여 이제까지 북한을 승인하지 않던 서방국가들 중의 일부에서 북한을 승인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대한민국이 건국 초부터 지켜 온 이른바 할슈타인원칙, 즉 ‘대한민국은 북한을 승인하는 나라와 단교한다.’는 원칙은 위협받게 되었다. 여기서 제4공화정은 1973년 6월 23일 ‘외교에 관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여 사실상 할슈타인원칙을 버렸고 공산권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정책전환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소련 및 동유럽권과의 관계가 조금씩 좋아졌다.

제4공화정은 1976년 이후 미국과의 관계에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미국에 영향력을 쌓기 위한 로비활동이 불법적이었던 것으로 인식되고 그것이 조사받게 되면서 이른바 ‘코리아게이트’라는 추문으로 악화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1977년에 출범한 카터(Carter,J.) 행정부는 주한 미지상군의 철수를 추진하고, 제4공화정의 유신체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함으로써 한미관계를 더욱 긴장시켰다. 이 시기에는 중앙정보부가 1973년에 김대중을 일본에서 국내로 납치하여 온 사건을 계기로 한일관계도 긴장을 겪었다.

한편 제4공화정시대에 들어와 한반도문제는 더욱 ‘비(非)UN화’되었다. 즉, 국제연합과 국제사회는 한반도문제가 국제연합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북대화를 통하여 해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 것이다. 1975년의 국제연합총회에서는 한반도문제를 놓고 서방측 안과 공산측 안이 동시에 통과되는 일마저 있었다.

제5공화정의 수립 이후 한미관계와 한일관계는 정부 대 정부의 차원에서 1970년대 후반의 ‘불편’을 씻고 다시 가까워졌다. 이 시기에 두드러진 현상은 공산권과의 관계개선이었다. 특히, 중국과의 관계는 비정부(非政府)의 차원에서 크게 좋아졌다. 소련과의 관계는 1983년 소련 공군의 대한항공기격추사건이 빚었던 긴장에도 불구하고 개선의 잠재성이 점차 현재화의 전향성을 보였다.

제6공화정에 들어서자 대한민국은 북방정책을 활발히 전개하게 되었다.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7 · 7대통령 특별선언’을 통해 대 공산권 외교의 폭을 넓히는 조처를 취하였으며 실제로 서울올림픽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로 소련 · 중국 등과 인적 · 물적 왕래가 활발하게 되고 1988년 12월에 헝가리와는 정식 국교관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1989년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계기로 공산권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공산국가들과의 수교는 빨라졌다. 1990년에는 소련과, 1992년에는 중국과 각각 외교관계가 수립되었으며, 1991년에는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이 실현되었다.

외교현황

1989년 3월까지 대한민국이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의 수는 모두 131개 국이었으나 1999년 4월 현재 세계 191개 국 가운데 183개 국과 수교를 맺고 있다.

미수교국은 북한을 제외한 쿠바 · 시리아 · 아프가니스탄 · 마케도니아 · 산마리노 · 모나코 등이다. 이 가운데 남북한 동시수교국은 1989년에는 70개 국이었으나 1999년에는 131개 국으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대한민국은 1989년에 91개 국에 상주공관을 설치하고 있으며 35개 소에 총영사관, 3개 소에 대표부를 두고 있어 96개 국에 129개의 공관을 설치하고 있었으나, 1999년 4월 현재 91개 국에 상주공관을 설치하고 있고 30개 소에 총영사관, 4개 소에 대표부를 두고 있어 91개 국에 125개의 공관을 설치하고 있다.

1989년보다 수교국이 늘어난 데 비하여 공관 숫자가 줄어든 것은 1998년 9월에 우루과이 · 유고 · 카메룬 · 잠비아에 있던 총영사관을 철수하고 벨기에에 있던 대사관과 유럽연합대표부를 통합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북한도 1989년에는 101개 국과 외교관계 맺고, 72개 국에 상주공관을 두고 있었으나 1999년 4월 현재 135개 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고, 52개 국에 상주공관을 두고 있다.

교민정책

1987년의 해외교포 수는 401만 5000명으로 추계되었다. 중국이 176만 명으로 가장 많고 북미지역 107만 명, 일본 67만 명, 소련 40만 명, 중남미 8만 1000명, 유럽 1만 6000명, 동남아시아 1만 5000명, 중동지역 1,000명 순으로 99개 국에서 살고 있었으며, 1995년 1월 현재 해외교포 수는 494만 1324명으로 추계되고 있다.

지역별로 보면 중국이 192만 6017명으로 가장 많고, 북 · 남미지역이 181만 7188명, 일본 65만 9323명, 독립국가연합 46만 1576명, 아주지역 4만 5661명, 유럽 2만 7967명, 아프리카지역 1,328명, 중동지역 150명 순이고, 기타 홍콩 · 대만 등에 2,114명이 99개 국과 2개 특수지역에서 살고 있다. 이외 장기 체류자를 포함하면 500만 명을 훨씬 상회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지구상의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해외교포들은 이민동기나 생활양상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정부의 교민대책은 나라마다 다를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로 수립된 교민대책은 재일교포문제로서, 제2차세계대전 후 일본 내의 피압박 · 피차별 소수민족인 재일교포들이 좌익계로 기울어진 데 대응하여 민족진영의 교포단체로 재일거류민단을 조직하여 민단계 교포확보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현재 재일교포들은 민단계, 조총련계, 그리고 일본에 귀화한 성화회(成和會) 등 3개 집단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대한민국의 국력신장과 더불어 재일교포 모국방문사업 등을 통하여 점차 민단계의 우세가 굳혀지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체결 이후 일본사회 내의 갖가지 차별대우로 인한 재일교포들의 생활환경조건 개선, 2 · 3세들의 처우 개선 등에 중점을 두고 재일교포대책을 펼쳐 왔다.

북미지역에서는 1970년대 이후 급증한 교포들에 대하여 모국과의 연계관계를 심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 교포사회 내의 공동체 활동 및 모국방문을 적극 지원해 왔다. 중남미로의 이주는 1962년의 「해외이주법」 실시에 따라 인구정책 차원에서 추진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주대상지역의 열악한 환경조건 및 이주자들의 현지적응태세 미비 등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래서 당초에는 현지 농촌개발이 이주목표였으나 오늘날 중남미 이주민의 대부분은 도시에서 상공업 부문에 종사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및 중동지역에는 한국인들의 해외진출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이주민들이 생겼으며, 대체로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다.

위의 여러 지역과 달리 중국 · 소련 등 공산권지역의 교포들에 대해서는 그 동안 북한측이 접근시도를 해왔지만 교포들의 거부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였는데, 1988년의 서울올림픽대회 이후로는 대한민국의 민간교류 등 접근 움직임이 현지교포들의 좋은 반응을 얻어 점차 정책접근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들 공산권 교포문제에 있어 고령의 제1세대 교포들이 모국귀환을 희망하고 있어 교민대책의 긴급한 당면과제로 제기되고 있다. 특히, 러시아의 사할린 교포문제는 대표적인 예로 꼽히고 있다.

국방

정책기조

대한민국은 정부수립과 더불어 국방정책의 기조를 북한공산집단의 침략저지에 두고 침략 아닌 방위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정책기조 위에서 대북 우위의 국방역량 강화를 추진하였으나 건국 이후 연이은 좌익반란소요의 진압작전, 38선상의 무력충돌 등에 뒤이어 1950년에는 6 · 25전쟁을 당하게 되자 대한민국의 국방정책은 미국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의 전쟁복구, 1960년대의 경제개발로 국력기반을 다져 1972년부터 비로소 자주국방태세 확립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목표는 북한이 외부지원 없이 단독무력도발을 할 경우 독자적인 자위력으로 격퇴할 수 있는 수준까지 국방력을 강화하여 한반도 내의 전쟁 억지력을 보유함과 동시에, 북한이 대한민국의 한반도평화정착노력에 동조하게끔 유도하는 데 있다.

즉, 한반도의 평화유지와 함께 통일접근의 기반 조성을 동시에 달성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의 국방비는 국민총생산의 6%선을 조달하도록 조치되었다.

이와 같은 자주국방계획에 따라 1990년대 초에 이르러 남북한의 군사력은 균형을 이루게 되며, 그 이후부터는 대한민국의 대북한 군사력 우위가 달성됨으로써 자주국방을 위한 1차적인 목표를 성취하게 되었다.

한미군사관계

한미군사관계는 우리의 국방정책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성을 띠고 있다. 양국간의 군사관계는 미군정 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는데, 한미군사관계의 변천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의 군은 미군정의 통위부 아래 국방경비대로 출발하였다. 미군정은 곧 군사영어학교를 세워 한국군 간부들을 양성해 나갔다. 이러한 배경에서 대한민국의 군사관계는 오랫동안 한미군사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제1공화정이 출범한 직후 한국과 미국은 경찰과 경비대 및 해안경비대를 포함하는 국방군에 대한 지휘권을 한국에 이양하는 잠정 군사협정을 맺었다.

1949년 7월 1일자로 주한미군은 철수를 끝냈다. 그러나 미국은 철군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한국의 안보와 안정을 위하여 물질적 · 정치적 원조를 계속하리라는 뜻을 밝혔다. 그리하여 1950년 1월 양국간에 상호군사원조협정이 체결되었고, 동시에 주한미군사고문단(KMAG)에 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6 · 25전쟁의 발발은 미국의 대한군사정책을 급전시켰고 미군의 즉각적인 참전을 가져왔다. 1950년 7월 이승만 대통령과 UN군사령관 맥아더(MacArthur,D.)는 모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UN군사령관에게 위임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상호 교환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대전협정(大田協定)’이다.

한미간의 군사관계는 6 · 25전쟁 동안 계속 강화되었으니, 한국과 미국의 안보 및 군사관계의 강도는 1950년부터 1953년까지의 6 · 25전쟁 기간에 가장 강하게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휴전과 더불어 대한민국과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북대서양조약기구 방식 대신에 이른바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 방식을 따른 것으로, 그 어느 한 쪽의 당사국이 침공을 받았을 때 다른 쪽도 전쟁에 개입한다는 것을 약속하지는 않고, 단지 헌법상의 절차에 따라 상호원조를 제공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 조약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안보체제의 초석이 되고 있다.

1960년대 초 미국 국방부에서는 주한미군의 감축에 관한 논의가 때때로 있었다. 그러나 1964년부터 시작된 한국군의 베트남파병과 함께 그러한 논의는 사라졌다. 미국은 한국군의 베트남파병에 대한 보상으로 기존의 주한미군 수준을 유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뿐 아니라 주한 미국대사 브라운(Brown, W.)의 각서를 통하여 한국군의 현대화를 도울 것을 약속하였다. 한국군의 베트남파병은 확실히 한미간의 군사관계를 강화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1968년 1월 북한공비가 청와대 기습을 시도하고 북한해군이 미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 두 사건의 처리를 둘러싸고 양국간에 이견이 벌어졌다. 이때 미국은 대통령안보보좌관 밴스(Vance, C.)를 대통령특사로 파한하여 우리나라와의 이견을 조정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은 한미공동성명을 통하여 대한방위공약의 준수를 다짐하였다. 또, 연례 한미안보회의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고, 오늘날까지 이 회의는 계속되고 있다.

1969년 닉슨 독트린의 발표로 한미군사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주한미군이 감축되었고 그 대신 한국군의 현대화와 증강이 이루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른바 자주국방을 외치게 되었고, 한국군 스스로도 변화를 겪게 되었다. 우선 1969년 한국 총군사비 가운데 미국의 대한군사원조점유율은 50% 수준 이하로 떨어졌고, 그 뒤 계속 줄어들어서 1974년 10% 수준이 되었다.

이 기간 우리나라에 대한 미국의 간접군사원조는 급격히 줄었고 1973년에 종결되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국방예산은 전적으로 자체 재원으로 충당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제7사단 철수에 대한 보상으로 수립된 한국군현대화계획(1971∼1975)을 돕기 위하여 직접군사원조는 계속 제공하였다.

1975년의 베트남 패망과 한국군현대화계획의 지연 및 미국 군사원조계획의 감소에 자극받아 우리나라는 독자적으로 야심적인 대규모 전력증강5개년계획(1976∼1980)에 착수하였다. 이 계획의 재원을 충당하기 위하여 정부는 1975년 특별방위세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무상원조가 1977년에 끝났기 때문에 대외군사판매차관이 전력을 증강하는 계획에 또 다른 주요한 재정원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78년 이후로 우리나라의 총군사비는 전적으로 자체 재원으로 충당되어 왔다.

1977년 카터 행정부의 등장에 따른 주한미지상군 감축발표와 단계적 감축은 양국 관계를 어느 정도 긴장시켰다. 그러나 국내외의 반대 속에 카터 행정부는 단계적 감축을 중단하고 자신의 결정을 사실상 백지화하였다. 1981년 레이건(Reagan, R.) 행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한미간의 군사유대는 그 이전보다 강화되었다.

미국은 우선 우리나라의 군사적 · 전략적 가치를 보다 중시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즉, 소련의 극동군사력을 견제할 수 있는 전초기지로서의 기능을 중시하고 이 지역에서의 전력을 강화해 나갔다. 그뿐 아니라 팀스피리트로 대표되는 대규모의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연례적으로 실시하여 한미간의 긴밀한 군사협력을 과시하였다.

서울올림픽대회의 개최와 관련하여 미국은 특히 1987년 이후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하여 상당한 외교적 공세를 취하였다. 북한에 대한 관계도 개선하려는 움직임을 구체적으로 보였다. 북한은 이 기회를 이용해 1986년에 남북한과 미국의 고위정치군사회담안을 제의한 데 이어 1987년 7월 23일 남북한 상호군축을 위한 삼자회담의 개최를 제의하였다.

1993년 3월 북한의 핵무기확산금지조약(NPT) 탈퇴선언을 계기로 미국과 북한 사이의 공식적 협상이 개시되었고, 이듬해의 ‘핵전쟁의 위기’를 거쳐, 그 해 10월 제네바에서 북 · 미합의가 성립되었다.

이 합의는 북한이 핵개발을 동결하는 조건으로 한국과 미국이 주축이 되어 북한에 경수로를 건설하여 주고 중유를 공급한다는 내용을 뼈대로 삼고 있다.

군사현황

1988년 대한민국의 군사력은 총병력 62만 명으로 이 가운데 해군이 4만 5000명이고, 공군이 3만 3000명이었다. 국방비는 59억 8000만 달러로 국민총생산의 군사비부담률은 5%였다.

이에 비하여 북한은 세계 제2위의 군사밀도(국민 1,000명에 대한 병력비)에 GNP부담률 23%라는 막중한 군사제일주의노선을 지향하여 총병력 80만 명을 유지하였고, 1988년도에는 100만 명 규모로 늘렸다.

1987년 국민총생산규모로 볼 때 대한민국은 1186억 달러인데 비하여 북한은 6분의 1 수준인 193억 달러였으며, 1인당 GNP도 2,862달러 대 936달러라는 열세에도 불구하고 군사력의 우위 확보를 위하여 GNP부담률에서 대한민국보다 무려 4.6배에 달하는 과중한 군사비를 지출하였다.

1998년 10월 현재 대한민국의 군사력은 총병력 69만 명으로 이 가운데 해군이 6만 7000명이고, 공군이 6만 3000명이다. 이에 비하여 북한의 상비전력은 육군 100만 3000명, 해군 5만 4000명, 공군 10만 3000명으로 1997년보다 1만 3000명이 증원된 116만 명으로 추정된다.

북한의 이 같은 병력 수는 대한민국의 총병력의 1.7배의 규모이다. 또한 북한은 예비전력으로 교도대 173만 명, 노농적위대 약 414만 명, 붉은청년근위대 약 118만 명, 기타 준군사부대 39만 명 등 모두 745만여 명을 갖추고 있다.

수적으로는 북한이 한국보다 대부분 앞서고 있으나, 질적인 무기의 성능면에서는 한국이 앞서고 있는 것으로 추계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군사력 현황에서 보듯이 북한은 1990년 이후 세계정세가 급변함에 따라 군사력만이 체제수호 및 대남 적화전략 추진의 유일한 수단이라 판단하고 일관되게 전쟁준비를 해 왔다.

이러한 전투준비태세 강화 움직임은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 체제하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1997년에는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도 후방의 기계화군단 기동훈련과 특수부대 침투훈련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물론 상당수의 군병력이 영농활동 및 건설현장에 투입되고는 있으나, 아직 군사적 위협이 감소되었다는 징후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통일

분단된 조국의 통일문제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꾸준히 추구되어 온 국가의 가장 중요한 정책과제였다. 통일정책은 시대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대체로 1960년대까지의 정통성을 내세운 통일접근, 1970년대의 남북대화를 통한 평화통일방안 모색, 1980년대의 북방정책을 통한 교류 · 협력 실시, 1990년대의 경제교류의 확대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책 개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의 통일노력은 신탁통치안을 둘러싼 남북한 정치지도자들의 의견대립,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의 남북정치협상 시도와 저지 등의 과정을 통하여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노력은 미국과 소련의 대(對)한반도 점령정책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미소군정 당국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 · 영 · 소 3개국 외무장관회의의 결정에 따라 1946년 3월부터 5월까지, 1947년 5월부터 10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어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논의하였으나 기본입장의 현격한 차이 때문에 결렬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한반도 통일문제는 미국에 의하여 UN에 이관되었으며 이를 반대한 소련은 북한지역에서 단독적으로 공산정권 수립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분단의 고착화과정을 거치면서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통일정책의 기조를 대한민국의 유일합법성에 두었다. 즉, 대한민국은 UN에 의하여 한반도에서 주권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이며, 또한 헌법에 명시하였듯이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정통성을 지닌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부수립 후 6 · 25전쟁 전까지의 통일방안은 UN한국위원단의 입북거부로 선거가 실시되지 못한 북한지역에서 조속히 선거가 실시되고 여기에서 뽑힌 의원이 대한민국 국회에 남겨둔 의석을 채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기간에 북한 정권은 남북협상에 의한 통일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남침은 결국 북한의 통일방안이 정치협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력통일에 있음을 드러내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은 무력이 뒷받침되는 가능성에 근거했다기보다는 북한을 미수복지역으로 보고 이를 수복하여 통일을 성취하자는 통일의지 고취의 구호에 불과한 것이었다.

6 · 25전쟁이 휴전된 뒤 1954년 4월부터 6월 사이에 제네바에서 휴전협정의 규정에 따른 정치회담이 열려 한반도 통일문제가 논의되었으나, 남북한 양측의 엇갈린 주장만을 기록할 뿐이었다.

이 회담에서 대한민국의 변영태(卞榮泰) 외무장관은 ‘통일에 관한 14개항’을 제의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① 6개월 안에 UN감시하에 대한민국 헌법절차에 따른 남북한 자유총선거 실시, ② 인구비례에 따른 국회의원 수를 정하기 위한 UN감시하의 국세조사 실시, ③ 유엔감시단원과 입후보자들의 이동 및 언론자유 보장, ④ 새 입법부가 헌법을 개정할 때까지 대한민국 헌법의 효력 유지 등이었다.

이에 북한측 남일(南日) 외상은 UN의 권능을 부인하고 남북 동수의 ‘전조선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위원회가 제정한 선거법에 따라 남북한동시총선거를 실시하자고 주장하였다. 1960년 8월 제2공화정이 들어서면서 정부는 북진통일론을 포기하였지만 ‘선경제건설 후통일’의 정책기조를 내세우면서 여전히 국제연합을 통한 총선거 방안을 내세웠다.

그러나 당시 4 · 19혁명 후의 정세에 따라 생겨난 많은 혁신계 정치인들과 정당들은 통일의 민족내부문제화를 주장하면서 남북협상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1961년 5 · 16군사정변으로 등장한 군사정부는 남북협상 주장을 침묵시키면서 국력배양 뒷받침에 따른 대한민국 주도의 통일성취를 강조하였다.

군사정부와 이어서 들어선 제3공화국시대인 1960년대, 특히 1960년대 후반기에는 북한의 대남폭력혁명선동이 그 어느 때보다 격심해졌고 빈번한 대남간첩침투로 군사적 긴장이 높아갔다.

그러나 1970년대가 되면서 미국과 소련 간의 화해모색과 미소 중심의 양극체제가 다극체제로 변화되면서 동서진영은 평화공존 분위기에 싸이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와 더불어 닉슨독트린이 등장함으로써 동북아시아 세력구조는 개편의 조짐을 보였다. 이에 남북한의 대결구조는 새로운 적응을 요구하게 되었다.

1970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정세변화와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염두에 두면서 ‘평화통일구상’을 선언하였다. 이 선언은 북한의 무력행사 포기를 요청하면서 남북한관계를 개발과 건설과 창조의 체제경쟁관계로 전환할 것을 제의한 것으로서, 선의의 경쟁 위에서 분단으로 인한 민족적 고통과 불행, 불편을 경감시키자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북한은 그 해 11월에 있었던 당대회를 통해서도 이른바 ‘남조선 해방’을 내세우면서 이 선언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였지만, 남북한간의 직접대화를 바라는 내외의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1년 8월부터 남북대화시대가 개막되면서 남북한 쌍방은 대화를 통하여 통일문제에 접근하려 하였다.

대체로 1977년 12월까지의 대화는 남북적십자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회의라는 두 갈래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이 기간에 ‘7 · 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남북한 쌍방은 새로운 통일방안을 제기하였다.

대한민국정부는 ‘평화통일외교정책선언’ · ‘남북불가침협정’ · ‘평화통일 3대기본원칙’을 발표하였다. ‘평화통일외교정책선언(1973.6.23.)’은 대공산권 문호개방, 남북한 동시UN가입 불반대 등을 천명함으로써 북한 정권이 사실상의 정부라는 점을 한층 명백히 한 것이며 ‘선평화 후통일’의 정책기조를 밝힌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이 선언이 ‘두 개 조선’정책이라면서 같은 날 ‘남북연방제’를 포함한 ‘5대강령’을 발표하였다.

‘남북상호불가침협정(1974.1.18.)’은 ① 상호간의 무력침략 배제, ② 상호간의 내정불간섭, ③ 현행 휴전협정 준수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평화통일 3대기본원칙(1974.8.15.)’은 ① 남북상호불가침협정 체결, ② 남북대화의 성실한 진행과 다각적인 교류 · 협력 실현, ③ 토착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자유총선거 실시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통일방안들이 아무리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라도 대화 상대방에 의하여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아무 소용 없는 것이었다. 북한은 대한민국의 불가침협정체결 제의는 외면한 채 대미평화협정체결(1974.3.25.)을 제의하였으며, 기존의 대화통로가 아닌 새로운 방식의 ‘남북정치협상회의(1977.1.25.)’를 제의하기도 하였다.

그 뒤 남북한간에는 ‘남북한 경제협력기구 구성(1978.6.23.)’ · ‘남북한 당국간 대화(1979.1.19)’ 제의에 대한 ‘전민족대회 개최(1979.1.23.)’의 대응이 있는 등, 통일방안 자체보다 기존의 통일방안 주장을 위한 대화통로 마련의 제의만이 오고 갔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5공화정에서는 그 동안의 통일방안을 집대성하여 1982년 1월 22일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을 제시하였다. 이 방안은 통일헌법의 제정으로부터 총선거를 통한 통일민주공화국 완성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는데, 그 주된 내용은 통일헌법을 초안하기 위한 ‘민족통일협의회’ 구성과 ‘남북한 기본관계에 관한 잠정협정’ 체결로 이루어진다.

‘민족통일협의회’는 ① 남북 쌍방 주민의 뜻을 대변하는 대표들로 구성되어, ② 민족 · 민주 · 자유 · 복지의 이념을 담은 헌법을 마련하고, ③ 자유로운 국민투표로 확정하여, ④ 통일국회와 통일정부를 세우자는 데 목적이 있으며, 잠정협정체결은 통일헌법이 제정되어 통일정부가 설 때까지 남북한 관계를 평화적 · 현상적 관계로 유지시키자는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방안은 평화통일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대결논리를 극복하려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나 북한측의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북한측은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을 뒷받침하여 제의된 ‘20개 시범실천사업(1982.2.1.)’이나 ‘남북고위대표자회의(1982.2.25.)’도 반대하고, 당국을 포함하는 정당사회단체회의를 제의(1983.2.1.)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뒤 남북한간에는 수재물자 제공(1984.10.)과 이를 계기로 한 적십자회담의 재개(1985.5.∼1985.12.),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방문(1985.9.20∼9.23.)’ 등이 있었고, 뒤이어 경제 · 국회 · 체육 회담 등이 열리면서 새로운 대화시대를 맞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1986년 1월 20일 북한측이 팀스피리트 훈련을 이유로 연기시켜 오다가 대한민국의 제6공화정 수립 이후 쌍방의 활발한 제의가 잇따른 가운데 대화는 부분적 · 간헐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제6공화정에서는 ‘7 · 7대통령특별선언’을 통하여 북한을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식하고 이 바탕 위에서 북한이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성원이 되는 데 협조하겠다고 하였다. 이것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정책이라 평가되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남북동포간의 적극적인 상호교류 추진, ② 해외동포의 남북자유왕래를 위한 문호개방, ③ 이산가족들의 생사 · 주소 확인, 서신왕래 · 상호방문을 적극 주선, ④ 남북간교역 문호개방, ⑤ 우방국과 북한간의 비군사적 물자교역 불반대, ⑥ 국제사회에서의 남북한간 자유접촉과 협력 희망, ⑦ 북한과 우리 우방과의 관계개선 협조 용의 등이다. 그런데 북한은 이 7 · 7선언에 대해서도 단계론이고 분단고착화정책이라면서 거부하였다.

제6공화국의 통일정책은 1989년에 대통령의 국회연설의 형태를 통하여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으로 계승되었다. 이것은 교류 · 협력의 확대로써 평화공존시대를 열고 거기서 남북연합을 거쳐, 궁극적인 남북통일에 도달한다는 구상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이른바 ‘햇볕정책’이라는 이름 아래 북한에 대한 포용정책을 선언하였다. 그것은 북한의 대남무력도발에 대해서는 강력히 대응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안전을 확고히 지키되 북한의 붕괴를 추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다짐 아래 북한과의 화해협력을 통하여 궁극적인 통일국가 수립을 유도한다는 내용을 뼈대로 삼았다.

남북한은 통일을 위한 대화는 계속하면서도 통일방안에 대한 합의는 아직까지도 도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북한의 통일정책이 이른바 ‘남조선 혁명’이라는 대남혁명전략의 테두리 안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남조선 혁명’은 남한에서 미군이 철수하고 폭력투쟁을 통하여 용공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말한다.

북한이 말하는 평화통일이라는 것은 이 용공정권과 북한공산정권이 협상하여 평화적으로 통일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이 평화정착과 신뢰회복이라는 바탕 위에서 남북한자유총선을 통해 추구하는 통일성취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쌍방의 의견을 좁히고 통일에 이르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남북대화가 그 통로가 될 것이다.

남북대화

남북대화는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 최두선(崔斗善) 총재의 남북이산가족들의 재회를 주선하자는 제의에 북한측이 반응을 보임으로써 막을 열기 시작하였다.

다섯 차례의 파견원 접촉(1971.8.22.∼9.16.)과 1971년 9월 20일부터 1972년 8월 11일까지 25회의 예비회담과 16회의 예비회담 실무회의를 거쳐 1972년 9월 평양에서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한편, 적십자회담 예비회담과정에서 남북 쌍방은 실무자의 비밀접촉과 서울의 이후락(李厚洛) 중앙정보부장, 평양의 김영주(金英柱) 노동당조직지도부장을 대신한 박성철(朴成哲) 제2부수상의 상대방 지역 비밀방문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으며, 이 성명 6항에 따라 남북조절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로써, 남북한간에는 남북적십자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회의의 두 통로로 대화가 진행되면서 본격적인 남북대화시대가 개막되었다.

서울과 평양을 내왕하면서 남북적십자회담 7회(1972.8.∼1973.7.), 남북조절위원회회의 3회(1972.11.∼1973.6.) 등이 개최되었다. 그러나 대화는 1973년 8월 28일 북한측의 대화중단 선언으로 더 이상 개최될 수 없었다.

북한측은 김대중납치사건을 중단의 표면적인 이유로 내걸었으나 사실은 2개월 전에 발표된 6 · 23선언 때문이었다. 6 · 23선언은 대한민국의 공산권에의 문호개방, 남북한 동시UN가입 등을 골자로 하는 평화통일을 위한 기반조성 정책이었다.

북한에 의한 대화중단 이후 남북적십자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회의는 대한민국의 요청에 의하여 적십회회담은 대표회의와 실무회의 형태로 31회(1973.11.21.∼1977.12.9.), 조절위원회회의는 부위원장회의 형태로 10회(1973.12.5.∼1975.3.14.) 열렸다. 그러나 특별한 합의사항이나 진전된 제의내용은 없었다. 이 시기까지의 남북대화는 적십자회담과 조절위원회회의라는 두 형태뿐이었다.

그러나 1979년 이후에 전개되는 남북대화는 여러 형태였다. 1979년 1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기 · 장소 · 수준에 구애됨이 없이 남북한 당국간에 무조건 대화를 갖자는 제의를 하였다.

이는 기존의 대화형태가 아닌 것도 상정된 것이었다. 그런데 북한측은 이 제의에 대해 책임 있는 당국이 아닌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이 나서 1 · 19제의를 받아들이면서 ‘전민족대회’를 소집하자는 반응을 보냈다.

대한민국은 당국회담이라는 기본 입장에는 변함이 없지만 남북조절위원회의 기능 정상화를 촉구하였고, 북한측은 전민족대회 개최를 위한 ‘민족통일준비위원회’ 회의를 열자고 제의하였다.

서로의 대화 주체나 토의주제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1979년 2월 17일, 3월 7일, 3월 14일 3차에 걸쳐 변칙적인 남북접촉이 판문점에서 이루어졌다. 이 변칙접촉은 북한측이 대한민국측의 당국 참석이라는 요구를 외면하고 ‘조국전선’ 대표의 이름으로 참석함으로써 성과를 얻기 어려웠다.

남북한간에 이 변칙접촉이 이루어지고 있는 기간에 북한측은 평양에서 열리는 제35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한이 단일팀을 구성하여 출전하자고 제의해 왔다. 이 제의는 그간 교류 · 협력을 강조해 온 대한민국의 남북대화정신에 부합되는 것이므로 선뜻 응하여 나섰다. 그리하여 1979년 2월 27일, 3월 5일, 3월 9일, 3월 12일 네 차례에 걸쳐 쌍방 4명씩의 대표가 대좌하였으나 단일팀 구성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북한측은 단일팀 구성의 중요성만 강조하면서 원칙적인 합의를 하자고 주장하였고, 대한민국측은 단일팀이 구성되지 않더라도 국제탁구연맹 회원국인 대한민국 선수단의 대회참가 기득권을 먼저 보장하라고 요구하였다. 북한측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는 당초 북한측이 대한민국 선수단의 평양대회참가 저지를 의도하였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북한은 그 해 12월 20일 또다시 모스크바올림픽대회에 단일팀으로 출전하자면서 이를 위한 회담을 제의하였다. 이 제의에 대해 대한민국은 이듬해인 1980년 1월 11일 대한체육회 회장 서한을 통해 거부의사를 표명하였다. 이로써 1970년대의 남북대화는 끝났다.

이 시기에 대한민국은 북한의 대화전술을 파악하면서 남북한관계를 ‘대화없는 대결’에서 ‘대화있는 대결’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는 남북대화가 북한측에 의하여 중단될 때마다 재개 방도를 모색하면서 대화통로를 확보하려고 하였던 사실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1980년대의 남북대화는 1980년 1월 11일 북한측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명의의 편지와 정무원(政務院) 총리 명의의 편지를 보내옴에 따라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은 10 · 26 이후의 혼란된 시기이지만 국무총리에게 보내온 편지에 대해서는 총리회담을 위한 실무대표 접촉을 제의하였다.

이 제의에 북한측이 응해서 각 3명씩의 실무대표들이 1980년 2월 6일부터 8월 20일까지 10차의 접촉을 가졌다. 이 접촉에서 총리회담의 장소는 합의를 보았으나 의제문제에서 합의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북한측에 의하여 중단되었다.

그 뒤 대한민국은 ‘남북한당국 최고책임자 상호방문(1980.1.12.)’, ‘남북한당국 최고책임자회담(1981.6.5.)’, ‘20개 시범사업(1982.2.1.)’, ‘남북한고위대표회담(1982.2.25.)’, ‘남북한간 교역 및 경제협력(1984.8.20.)’ 등을 제의하였으나 북한측은 이에 상응하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북대화는 1984년 9월 북한측의 대남수재물자제공 제의를 수락한 뒤부터 대한민국측에서 남북적십자회담 재개(1984.10.4.), 남북체육회담 재개(1984.10.6.), 남북경제회담 개최(1984.10.12.)를 제의하고 남북국회회담을 수락(1985.6.1.)하였다.

이로써, 1984년 11월 15일 남북경제회담이 처음 개최된 이래 남북대화는 1986년 1월 20일 북한측이 모든 남북대화를 무기연기하기까지 경제회담 · 적십자회담 · 체육회담 · 국회회담 등 여러 갈래로 진행되었다. 1970년대의 대화를 제1기 남북대화라고 한다면 이 시기의 대화는 제2기 남북대화였다.

경제회담은 각각 7명의 대표로 5차에 걸쳐 판문점에서 열렸으며 ‘남북간 물자교류 및 경제협력 추진과 남북경제협력 공동위원회 설치에 관한 합의서’를 둘러싸고 토의를 하던 도중에 연기되었다.

남북적십자회담은 예비회담을 거쳐 평양에서 열렸던 제7차 본회담(1973.7.)에 이어 제8차 본회담(1985.5.)을 서울에서 개최하였으며, 제9차 본회담(1985.8.)의 평양개최, 제10차 본회담(1985.12.)의 서울 개최로 이어졌다.

적십자회담에서는 이산가족의 자유왕래 절차 등의 문제에서 상반된 견해가 드러나며 난항을 겪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남북 고위급밀사들이 서울과 평양을 각각 방문하여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려고 하였으며, 그 결과의 하나로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이 이루어졌다.

1985년 9월 20일부터 9월 23일까지 쌍방 151명이 판문점을 통하여 서울과 평양을 방문하였다. 방문단의 구성은 책임자 1명, 이산가족 50명, 예술공연단 50명, 취재기자 30명, 지원인원 20명이었는데, 평양에서 가족을 상봉한 서울의 이산가족은 35명, 서울에서 가족을 상봉한 평양의 이산가족은 30명이었다. 이 방문사업은 남북대화가 시작된 이래 대화를 통하여 이룩된 최초의 결실이라는 데 뜻이 있었다.

남북체육회담은 올림픽대회를 비롯한 각종 국제경기대회에 단일팀으로 출전하자는 대한체육회의 제의(1981.6.19.)를 외면해 오던 북한측이 로스앤젤레스올림픽대회 참가선수명단 제출이 2개월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단일팀 구성문제를 협의하자고 제의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1984년 4월 9일, 4월 30일, 5월 25일 3차의 회의 끝에 성과없이 끝났다.

그 뒤 남북체육회담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주재하는 로잔체육회담 형태로 이어져서 남북한의 서울올림픽 단일팀구성문제를 협상하게 되었다. 이 회의 역시 1985년 10월부터 1987년 7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회담이 열렸으나 북한측이 1987년 10월 회담의 사실상 중단을 선언함으로써 끝났다.

국회회담은 북한측의 제의(1985.4.9.)를 대한민국 국회가 수락(1985.6.1.), 예비접촉이 열렸으나 2차로 끝났다. 이로써 제2기 남북대화는 적십자회담 3회, 경제회담 2회, 국회회담 2회, 체육회담 7회를 기록하였다.

제6공화정에 들어서면서 남북국회회담을 시작으로 제3기 남북대화 시대가 열렸다. 대한민국 국회는 1988년 7월 9일 ‘서울올림픽대회에의 북한참가촉구 결의문’을 북한에 보냈으며 이를 계기로 1988년 말까지 7차의 준비접촉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기존의 대화통로를 재개하려는 제의를 계속하였으며 남북정상회담을 제의(1988.8.15.)하였다. 특히, ‘7 · 7특별선언’의 발표로 남북한관계는 새로운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으며, 이에 따른 북한상품의 수입, 경제인의 입북 등이 이어졌다.

한편, 북한도 1988년에 들어와서 많은 대화제의를 하기 시작하였다. 남북연석회의(1988.1.1.) · 남북국회연석회의(7.17.) · 남북한고위급정치군사회담(11.16.) · 3자회담(12.20.) · 남북한체육회담(12.21.) · 남북한학생회담(12.26.)이 그것이다. 1989년에도 남북정치협상회의를 시발로 대화공세를 폈다.

1990년 가을에 마침내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총리회담이 서울에서 열렸다. 1991년까지 일곱 차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열린 끝에 1991년 12월 ‘화해와 협력에 관한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었으며, 이 역사적 문서는 1992년 2월에 발효되었다.

이 사이에 남북 고위급밀사들이 서울과 평양을 교환 방문하여 남북정상회담의 개최를 논의하였으나 성사되지는 않았다. 1994년 한반도에서의 핵전쟁 위기를 계기로 7월 하순에 남북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하고 공식 발표하였으나 김일성의 사망으로 좌절되었다.

1998년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직후 김대중 대통령은 정경분리원칙을 제시하여 남북 사이의 경제교류와 민간교류를 적극 권장하였다. 이 해 여름 현대그룹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의 ‘소 떼 방북’을 계기로 금강산관광이 남북 사이에 합의됨으로써 남북관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대한민국의 경제

1945년 8 · 15광복으로 우리나라는 식민지경제체제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분단으로 인하여 자원의 배분이 왜곡되고 혼란 때문에 자연스러운 발전과정을 거치지 못하였다. 광복 직후 통화남발과 물자부족으로 경제질서가 극도로 혼란하였다. 1945년 11월부터 실시된 미군정기간 동안 원조물자의 배분과 임기응변적인 조처를 취하는 데 머물렀다.

1948년 정부수립 후 시장경제체제를 근간으로 하여 경제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귀속재산처리 · 농지개혁 · 금융제도개선 등을 추진함으로써 물가도 차차 안정되고 산업활동도 약간 활성화되었다.

그러던 중 1950년 6 · 25전쟁으로 산업시설의 대부분이 훼손되고 농지개혁과 금융제도개선 등 일련의 조처도 완성하지 못하였으며 전시인플레이션 등의 요인으로 산업활동도 크게 위축되었다. 그 뒤 산업활동의 재건을 도모하고자 각종 시책을 실시하였으나, 원조물자의 불공정한 배분과 소비재공업 위주의 불균형 성장으로 경제의 발전은 저조하였다.

1960년대 초 정부 주도로 경제개발이 추진되면서 고도의 경제성장과 아울러 급속한 산업화가 이루어졌다. 대량의 외자유치와 성장거점산업에 대한 선택적인 보호 · 육성, 그리고 제조품의 수출증대 등을 정책적으로 적극 실시하여 대외지향적 성장을 시도하였다. 물론, 그러한 고도경제성장이 순조롭게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성장과정에서 소외된 부문과 성장 부문 간의 격차가 확대되고 성장의 열매의 불평등한 분배로 인하여 소득격차가 심화되는 가운데, 정부의 성장정책에 반발하는 사회세력이 점차 형성되기도 한 것이다. 반면, 정부는 정책수단의 한계로 인하여 강압적인 정치권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바로 1970년대로 오면서 실시한 8 · 3조치와 유신체제의 성립으로 나타났다.

고도성장과정의 이면에서 정치적 · 사회적 격변이 진행된 이외에도, 경제성장의 원동력인 자금원천이 ‘해외자본’이었기 때문에 성장의 정도와 비례하여 외채의 누적도 심화되어 갔다. 그 결과 1970년대 후반에 오면서는 국제수지의 만성적 적자와 외채의 누적이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 자체를 제약하는 한계요인으로 작용하게까지 되었다.

1960∼1970년대 고도경제성장의 정치 · 경제 및 사회적 귀결은 1980년대 한국경제가 당면한 현실이자 동시에 해결하여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당시의 경제성장은 광복 이후 극심한 경제적 혼란과 국민 대다수가 절대적 빈곤상태에 처하여 있던 경제적 낙후성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나라 경제의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도경제성장의 역사적 배경이었던 광복 직후 우리나라의 경제적 조건과 분단 및 6 · 25전쟁으로 인한 경제혼란, 그리고 전후 경제의 재건과정에 대한 검토가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경제성장과정 및 그 역사적 귀결로서 1980년대는 고도경제성장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정책으로 물가안정에 최대 역점을 두고 이를 어느 정도 달성하였으나, 1980년대 말부터 대외적인 환경변화와 오랜 정경유착에서 오는 부정적인 요인이 노정되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따라서 1990년대는 이러한 과제를 해결해 나가는 한 단계 높은 경제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시기별 변천과정

광복 이후 1961년에 이르는 기간

1945년 8 · 15광복 직후 한국경제는 국토분단 · 생산위축 · 통화남발 등으로 물가폭등과 함께 경제질서가 극도로 혼란하였다. 이에 미군정은 미국점령지구제기금(GARIOA) 원조를 통하여 물자부족에 대처하고 민생안정을 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한반도에 대한 무지와 한반도의 정치적 · 군사적 문제에 우선적인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당시 경제혼란을 근본적으로 수습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자유시장경제체제를 국민경제 건설의 이념적 좌표로 설정하고, 경제안정과 산업재건을 위한 정책을 추진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49년에는 귀속재산 불하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하였고, 같은 해 농지개혁이 단행되었다. 그 사이 미국의 경제원조도 구호적인 성격에서 경제부흥을 위한 원조로 성격이 바뀌었다.

그러나 1950년 6 · 25전쟁 발발로 산업시설이 파괴되고 물가가 폭등하였으며, 농지개혁도 기대한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휴전이 되자 한미간에 전후 부흥사업추진을 위한 계획서가 발표되고, 이에 대한 기본원칙이 협약되었다.

1954년 5월에는 유엔한국부흥위원회(UNKRA)와 협약이 조인되어 유엔한국부흥위원회 원조를 뒷받침으로 한 경제부흥사업이 본격화되고, 미국 국제협력처(ICA)의 원조, 미국 공법(P.L.) 480에 의한 잉여농산물 도입 등에 의해 원조액도 급증하였다.

경제부흥은 정부의 안정화정책의 기조 아래 소비재공업을 토대로 하여 진척되었다. 그리하여 전쟁중의 마이너스 성장에서 1954∼1960년에 이르는 기간에는 연평균 4.7%의 성장률을 보였고, 특히 공업 부문에서는 12.2%의 높은 성장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무절제한 소비재원조물자의 도입과 원조물자 가공공장의 시설과잉에 시달리던 한국경제는 1950년대 말부터 원조가 감축되면서 원조경제의 취약성을 노정하게 되었다.

결국 원조경제하에 부정부패가 만연되었던 제1공화국은 1960년 4 · 19혁명을 통해 몰락하고, 한국경제는 다시금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제2공화국 정부는 경제의 계획적 개발을 구상하는 등 모색을 해 보았지만, 1년도 안되어 1961년 5 · 16군사정변이 일어남에 따라 경제개발사업은 군사정부의 과업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1962년 이후의 경제계획기간

5 · 16군사정부는 발족과 더불어 「조국근대화」라는 기치 아래 경제의 자립적 성장이라는 장기적 관점에서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1962년부터 실천에 옮겨갔다.

제1 · 2차 경제개발계획기간에 정부는 대규모 외자를 도입하여 풍부하고 저렴한 국내 노동력을 활용하는 노동집약적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수출확대를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그 결과 정부주도하에 한국경제는 1960년대 후반부터 급속한 성장을 보이면서 점차 신흥공업국으로 변모하여 갔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과열된 성장정책은 산업간 불균형, 외채문제, 만성적인 인플레이션 등의 부작용을 초래하기 시작하였다.

1972년부터 시행된 제3차 경제개발계획에서는 안정적인 고도성장을 보장하기 위하여, 수입유발적 수출구조 개선의 시급성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해 나갔다.

그리고 1977년 제4차 경제개발계획에서 정부는 중화학공업에의 투자비중을 더욱 늘려 나갔다. 그러나 과도한 중화학공업화는 재정인플레션과 과잉시설에 따른 불황, 내수용 소비재 생산위축이라는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제1∼4차 계획까지 한국경제의 개발전략은 한마디로 수출확대 → 공업생산증대 → 고도의 경제성장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계획까지는 경공업을 중심으로, 제3차 계획부터는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고도성장을 추구하였다.

이와 같은 개발전략을 통하여 한국경제는 1962년부터 1981년까지 연평균 8%가 넘는 놀라운 고도성장을 기록하였다. 그 동안 1970년대에 두 차례의 석유파동, 국제금리상승 등으로 다소의 굴곡은 있었지만, 한국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수출확대를 통한 공업생산의 증대가 꾸준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오면서 그 동안 추진되어 온 성장지상주의 경제정책에 대한 종합적인 반성이 일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무엇보다 1980년에 제2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수출의 해외수요가 침체되면서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된 이후 최초로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고, 1970년대 후반기부터 분배의 불공정과 기회의 불평등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점차 커졌기 때문이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과 새로운 군부의 권력 장악 등 정치적 여건 변화도 이러한 분위기를 촉진하였다.

그리하여 정부는 중화학투자의 재조정과 기존의 개발전략에 대한 재검토 및 새로운 방향전환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1년에 등장한 제5공화국은 선진경제와 선진사회로 향하는 방향설정으로 복지국가의 건설과 복지사회의 구현을 국정지표로 내걸었으며, 1982년부터 시작되는 제5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명칭도 「경제사회발전5개년계획」으로 변경하였다.

1980년대 이후 한국경제는 과거 고도성장과정에서 누적된개 군구조적 문제들을 해결하고, 제2의 도약을 준비하는 전환기적 과정에 처해 있었다. 1980년대의 정부는 성장의 부작용으로 고질화된 인플레이션을 해결하기 위해 물가안정에 경제정책의 최우선순위를 두었다.

그 결과 물가안정의 기반을 조성하는 데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과거 만성적인 현상을 보이던 저축부진, 국제수지 적자 등의 문제도 상당 부분 완화시켰다. 또한 전국민의료보험의 실시, 국민연금제도 및 최저임금제의 도입 등을 통해서 국민들의 복지에도 상당한 성과를 나타내었다.

김영삼 정부 이후의 한국경제 · IMF 관리체제까지

1992년 12월 한국에서는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 일이 발생하였다. 30여 년간 계속되던 군사정권이 끝나고 민간인 주도의 정권, 즉 문민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비록 기존의 6공화정 기득권 세력(군부세력, 재벌, 관료 등)과의 연합을 통한 정권 창출이었지만, 대통령으로 선출된 김영삼은 오랫동안 민주화운동을 이끌어 왔고, 그가 소외된 대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경제정책을 실시하리라고 기대하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문민정부는 초기 80∼90%의 강력한 국민의 지지도에 고무되어 상당한 개혁적인 경제정책들을 시도하였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1993년 8월의 ‘금융실명제’ 실시라고 할 수 있다.

당시 40조 원 정도로 추정되는 막대한 지하경제를 양성화시키고, 소득의 형평과세를 목적으로 이 제도를 추진하였다. 한편으로는 1993년부터 1997년에 걸쳐 실행한 신경제5개년계획을 통해서 경제 개혁정책과 이중구조의 경제를 척결하려고 하였다.

문민정부는 이러한 계획을 통하여 그 동안 광범위하게 행해져 왔던 국가의 시장개입을 줄이고 민간경제 주체들의 자발적 경제운용을 나름대로 보장하려고 하였다.

이중구조의 경제체제를 척결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불합리한 정치 · 경제 · 사회 구조의 개혁이 중요하였다. 앞에서 본 금융실명제나 1995년에 실행된 부동산 실명거래 실시 등이 이런 개혁의 근간이었다. 문민정부는 이러한 경제개혁을 국내적으로 행해 나가는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광범위한 시장개방을 시도하였다.

국내 경제력이 여러 가지의 외부적 요인으로 팽창하게 되자 성급하게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에 가입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도한 개방정책과 경제 부문에 대한 정부의 갑작스런 규제 완화, 이에 편승한 국내 재벌의 외형 위주의 무절제한 국내외 투자, 생산성을 무시한 외생적 성장정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문민경제의 종말은 결국 1997년 12월에 이르러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을 받아야만 하는 경제체제로 전락하고 말았다.

산업 부문별 변천과정

산업구조의 변화

일제강점기 때 최초로 식민지 경제침탈이라는 목적하에서 근대적 공업생산이 이루어졌으나, 공업시설들은 6 · 25전쟁으로 크게 파괴되었다. 전후 복구를 통해 산업은 점차 재건되기 시작하였고, 특히 1962년 정부 주도하에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실시되면서 고도의 경제성장과 함께 공업 중심으로 산업구조의 재편이 이루어졌다.

취업인구는 1949년 1차 · 2차 · 3차산업에 각각 79.9%, 3.7%, 16.4%가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업화가 진전된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2차산업 비중이 22.4%로 늘어나고, 3차산업도 43.4%로 되어 34.0%의 1차산업 취업인구를 압도하게 되었다. 1992년 현재 구성비는 1차 · 2차 · 3차산업이 각각 16.0%, 25.5%, 58.5%로 나타나고 있다.

산업구조의 변화는 국민총생산의 구성비에도 반영되었다. 1961년 1차산업이 전체 국민소득에서 38.7%를 차지하였다. 제4차 경제개발계획이 끝난 1982년 18.2%로 급격히 저하된 반면, 2차와 3차산업은 1961년 15.4%와 45.9%에서 1982년 35.4%와 46.6%로 각각 증대되었다.

1992년 1차 · 2차 · 3차산업은 각각 7.6%, 27.6%, 64.8%를 기록해 3차산업의 상대적 비중이 증가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계속 진행되어 1996년 현재 각 산업의 비중은 11.6%, 22.6%, 65.8%로 변모하였다.

농업

공업화가 전개되면서 농업의 위치는 계속 저하되어 왔다. 농촌인구는 농산품 교역조건이 악화되고 농가소득이 감소됨에 따라 인구유출이 가속화되었다.

한국의 농업인구는 1960년 약 1500만 명에서 1981년 약1000만 명, 1992년 약 570만 명, 1996년에는 460만 명으로 격감하였다. 반면 농업인구 감소에도 불구하고 농가당 경지규모는 1962년 0.8㏊에서 1992년대에는 1.26㏊로밖에 늘지 않았다. 이는 한국의 농업생산이 여전히 영세 소농에 머물고 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농업문제에 대해 정부는 신품종 개발과 보급, 토지개량과 비료사용, 기계화 등 농업생산기술의 개혁을 꾀하는 동시에 이중곡가제를 실시하여, 농가교역조건을 개선하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업화의 진전에 따라 농업과 공업 간의 격차는 점차 확대되는 경향이 있다.

한편 소득증가에 의해 식량 소비형태가 변화함에 따라 한국농업은 자급자족적인 생산에서 시장판매를 위한 채소 · 과일 및 낙농제품 등 비곡물 농산품의 생산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축산업

국민소득 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축산물의 수요도 크게 증대되어, 축산업은 1970년대 이후로 기업화 · 대형화되고 있다. 농가에서는 주로 소 · 돼지 · 닭이 사육되고, 1970년대 이후로는 낙농사업이 활기를 띠고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수급의 불균형으로 인해 심한 가격변동과 과다한 수입 등의 문제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축산업은 1980년대 이후부터 몰아 닥친 농 · 축산물 개방 조치로 큰 타격을 입고 있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결과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로 들어간 1997년 7월부터 돼지고기와 닭고기의 수입이 자유화되었고, 2001년 1월부터는 쇠고기 수입자유화가 진행될 예정이다.

임업

일제강점기 때의 군용목재 확보를 위한 무분별한 벌채와 6 · 25전쟁으로 인한 재화 등으로 한국의 산림은 매우 황폐해졌다. 정부는 1961년 「산림보호법」을 제정하였으며, 1972년 제1차 치산녹화10개년계획, 1979년에 제2차 치산녹화10개년계획을 실시한 바 있다.

4년 앞당겨 완수한 1차 계획에서는 산림녹화에 치중하고 국민계도를 위주로 하는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2차 계획에서는 임업의 경제성과 공공성을 중시하여 국내산업발달에 부응하는 산지의 자원화를 도모하였다.

1992년 현재 조림면적은 646만 7655㏊, 임목축적은 ㏊당 40㎡로서 임업선진국에 비하면 아직도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1996년의 임업생산 부가가치액은 국민총생산 272조 원의 0.2%인 5434억 원 정도에 머물고 있다.

수산업

수산업은 영세성과 낙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가, 1958년 원양어업이 본격화되면서 어선의 대형화 · 동력화와 함께 점차 발전하게 되었다. 1992년 수산물 생산량은 원양어업 100만t을 포함, 총 324만t으로 세계9위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수출액은 16억 달러에 달하여 세계7위 수준이다. 1996년 현재 어업인구는 약 17만 명 정도이다.

1997년 통계에 의하면, 우리 어업은 연근해 어업이 약 100만t, 천해양식업이 약 70만t, 원양어업이 약 56만t, 내수면 어업이 약 2만 2000t 정도로 여전히 연근해 어업이 주류이다.

광업

한국에는 백금과 석유를 제외한 각종 지하자원이 다양하게 매장되어 있으나, 주요 지하자원의 대부분은 북한에 편중되어 있다. 남한에서는 1962년 이후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면서 공업화에 필요한 석탄 등을 중심으로 광업개발이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무연탄은 1980년대 중반에 총 에너지소비의 20% 이상을 차지하였으나 환경규제와 고급에너지 선호경향으로 1992년에는 5.2% 수준으로 낮아졌다.

제조업

6 · 25전쟁 후 산업의 재건과 1960년대 이후 고도의 경제성장은 제조업의 급속한 발달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1950년대에는 미국의 원조물자를 가공하는 소비재공업이 성장하였으며, 1960년대에는 경제개발계획과 차관도입에 의해 공업발전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1962년부터 공업생산은 급속히 증대되어 20년 후인 1982년에는 약 16.1배로 생산이 늘어났다.

1960년대에는 국내의 풍부한 노동력을 이용한 최종소비재 중심의 경공업이 성장하였고, 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1965년에서 1980년까지 전체 제조업생산에 대한 중화학공업의 비중은 34.2%에서 53.2%로 증대되었고, 수출에 있어서도 15.3%에서 47.6%로 그 비중이 늘어났다.

그러나 과도한 중공업화의 문제점이 나타나 1980년대에는 산업간 및 동일 부문 내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새로운 산업정책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한국제조업의 급속한 성장에서 몇 가지 특징적인 면모가 형성되었다. 첫째, 부족한 자본과 원자재를 외국으로부터 도입하고 국내의 풍부한 노동력을 활용하여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수출확대를 공업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이러한 수출지향적 생산구조는 생산증대를 위한 원자재와 생산재를 계속 수입해야 하는 수입유발적 성격을 띠게 되어, 수입대체적 공업화도 병행하게 되었다.

둘째, 대기업을 중심으로 공업생산의 증대를 추구한 결과 중소기업이 상대적으로 침체되었고, 따라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 불균형한 이중구조가 형성되었다.

서비스업

한국의 산업구조에서 서비스산업은 8 · 15광복 후 꾸준히 높은 비중을 차지하여 왔다. 미국의 원조가 제공되던 시기에는 물자배분과정에서 유통 부분이 기형적으로 확대되었으며, 1962년 이후 경제개발이 추진되고 급속한 공업화가 이루어지면서도 서비스산업은 꾸준한 증가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국민총생산에서 서비스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65년 42.5%에서 1980년 55.4%, 1992년에는 64.8%에 이르게 되었으며, 이는 공업화와 관련된 사회간접자본 · 건설업 · 부동산업 · 금융업의 성장 등에 기인한 것이다. 서비스산업은 부가가치생산에서보다 취업인구 구성면에서 더 높은 비율로 성장하였는데 이는 신규노동력을 흡수하는 고용창출효과가 컸음을 보여준다.

서비스업은 최근 계속해서 GDP 성장률을 상회하는 수준에서 성장률이 이루어지고 있고, 고용창출에서도 현격한 성장을 보이고 있다.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에서도 계속적인 부가가치 창출 산업으로 지원, 육성하고 있다.

1998년 현재 IMF관리체제하에서 금융 · 보험 · 통신 · 부동산 · 항공과 개인 서비스 분야(의료 · 법률 등) 등의 각종 서비스산업 분야에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개방정책이 행하여지고 있다.

현황과 대책

한국경제는 광복 이후 어려운 여건 속에서 꾸준하게 성장하였다. 6공화국 말기인 1992년 당시 국민총생산은 2945억 달러이고, 1인당 국민총생산은 6,749달러였다. 연간수출은 766억 달러이고 수입은 818억 달러였다. 이후 계속적인 성장이 이루어져 한국경제는 1995년에 드디어 1인당 국민총생산 1만 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그 해 국민총생산액은 4520억 달러였다.

정부주도형의 대외성장정책에 의해 양적인 성장은 어느 정도 달성하였으나, 과도한 대외의존성, 부문간 불균형과 분배상의 불공정 문제가 나타나는 등 경제구조가 매우 취약하다. 이러한 경제구조가 결국 국가경쟁력을 잠식하게 되어 급기야는 1997년 12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게 되는 위기로까지 비화되었다.

앞으로 우리 경제는 장기적 안목에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자율적인 발전을 도모하여야 하며, 분배의 불공정을 시정하기 위하여 각종 정책 및 제도를 개혁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대한민국의 사회

사회관계

인구 및 계층구조

우리나라의 인구는 광복 직전에 38°선을 기준으로 북한이 약 830만 명, 남한이 대략 1600만 명으로 추산되었으나, 1949년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남한의 인구는 약 2019만 명으로 광복 후 약 4년 동안 400만 명 정도가 증가하였다.

이와 같은 인구증가는 자연증가뿐 아니라 주로 해외로부터의 귀환인구와 북한으로부터의 월남인구의 대규모 유입에 기인한 것이기도 한데, 광복 이후 1949년까지 해외로부터 남한에 귀환한 동포는 일본에서 약 120만 명, 만주 등지의 중국에서 약 40만 명, 기타 지역에서 약 3만 명이었고, 북한에서 월남한 동포가 약 60만 명으로 모두 약 220여만 명이 이동하여 왔다.

그 뒤 6 · 25전쟁으로 또 한 차례 대규모 인구이동이 있었는데, 당시 북한에서 약 100만 명이 남하하였다. 휴전 후 남한의 인구는 계속 급증하여 1960년 약 2500만 명에 달하여 광복 전의 전국 인구수와 비슷하게 되었고, 1967년 약3000만 명, 1975년 약 3500만 명, 1984년 4000만 명을 돌파한 데 이어 1988년 4197만 명, 1997년 4599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와 함께 우리나라의 인구밀도는 광복 직전 약 120명 · ㎢이던 것이 광복 후 남한의 경우 1949년 200명 · ㎢에서 1966년 300명 · ㎢, 1985년 400명 · ㎢, 1997년 463명 · ㎢로 증가하였다. 반면, 남한의 인구증가율은 1961년의 2.9%에서 1971년 이후 2% 미만으로 점차 낮아져서 1986년 1.25%를 나타내었다.

1980년대 후반기에 처음으로 1.0% 이하를 기록하였으며, 1990년대 초반에는 다시 1.0%를 다소 상회하다가 1997년에는 0.98%를 기록하였다.

이와 더불어 오랫동안 다산다사(多産多死)의 피라미드형 구조를 나타내었던 연령별 인구구조는 1960년대 후반 이후 가족계획사업 등에 힘입어 점차 소산소사형(小産小死型)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유 · 소년층 인구의 감소가 두드러져 생산연령층에 대한 비생산연령층의 비율, 즉 부양비가 1971년의 82%에서 1986년 51.6%로 감소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40%대로 감소하였는데, 1990년 44.3%, 1995년 41.45%, 1996년 40.7%를 기록하였다.

한편, 광복 후 남한 인구의 성비(性比)는 1949년 102의 남초현상(男超現象)에서 1955년 100을 기록하였고, 1960년 100.8, 1970년 100.8, 1980년 100.5로 대체로 균형 있는 성비를 나타냈다. 그러나 1982년 이후 101을 상회하기 시작하여 1982년 101.8, 1989년 101.6, 1995년 101.4, 1997년 101.5를 기록하는 등 남초현상을 보이고 있다.

연령별 구조에서 볼 때, 1996년의 경우 50세 이상 인구는 연령이 많아질수록 남성인구가 적은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80세 이상의 경우 0.47% 대 1.31%로 남성이 여성보다 단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4세 이하의 유 · 소년층 인구는 상대적으로 남아인구가 많은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 밖에 대한민국 인구구조의 또 하나의 특징은 도시인구의 급격한 팽창이다. 1960년대 초 이후 공업화정책이 급속히 추진됨에 따라 도시화 추세도 더욱 가속화되어 광복 직전 약 10% 안팎에 불과하였던 남한의 도시인구율은 1949년의 18%에서, 1970년 43%로, 1985년 65.4%로 증가하였다.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 많은 농어촌인구가 도시지역 및 개발지구를 향하여 이주함에 따라, 대도시지역의 과밀화와 농어촌지역의 과소화현상이 사회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985년 도시인구는 2644만 3000명이었고, 전체인구의 약 24%가 수도 서울에 거주하였다. 1996년 현재 서울인구는 전체의 22.5%이다.

1994년 현재 도시근로자 가구월소득은 약 170만 원이며, 농가소득은 약 169만 원으로 도농(都農) 사이의 소득 차는 심각한 편은 아니다. 따라서 1990년대 말 현재 이농현상보다는 오히려 귀농현상이 일부 목격되고 있다.

한편, 이민은 1962년 「해외이주법」이 공포된 이후 미국 · 브라질 · 서독 · 캐나다 · 아르헨티나 등 각국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그 가운데 주로 미주지역 국가가 주요 대상이 되고 있는데, 특히 미국에 대한 이민은 약 30만 명에 달한다.

인구구조의 변화와 더불어 광복 이후 새로운 계층구조가 재편성되기 시작하였다. 우선, 미군정청에 귀속되었던 재산의 불하를 통해서 새로운 재산가들이 형성되었고, 또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농지도 미군정청에 귀속되었다가 그 뒤 토지개혁을 통해서 농민들에게 유상분배하여 새로운 농촌사회관계를 구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6 · 25전쟁으로 인하여 귀속재산의 불하를 통한 새로운 사회관계의 형성은 일단 무산되고 말았다. 전쟁의 여파로 그 뒤 수년간 대한민국 사회의 계층구조는 매우 유동적이며 혼미스럽기까지 하였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실시된 이래 강력한 공업화정책의 추진으로 새로운 사회계층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는 취업과 교육기회의 확대 등으로 인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농촌경제의 악화와 그에 따른 농민층 분해 및 탈농화현상(脫農化現象)으로 인하여, 대한민국의 계층구조는 급격한 계층간 · 계층 내 이동을 통하여 형성되었다.

1955년부터 1980년 사이의 계층구조의 변화를 보면, 자본가계급이 3.3% 증가하였으며, 구중산층이 34.2% 감소한 반면 신중산층은 11.1% 증가하였으며, 노동자층도 19.9% 증가하였다.

이와 같은 사회계층구조의 변화는 지난 30여 년간 자본주의적 산업화과정이 크게 진전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에 따라 근대적 계층분화, 즉 자본가 · 경영자 및 노동자에로의 분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30여년간 자영자가 감소되고 노동자층이 증가되었다는 것은 분명히 자본주의와 산업주의의 발전을 뜻하지만, 이것은 서구형과는 매우 다르다.

예컨대, 노동력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업 분야에 있어서 근대적 계층분화현상이 발생하지 않고 있으며, 도시의 사회계층에 있어서도 자본가의 경우 거의 대부분 소유권과 경영권이 분리되어 있지 못하다. 노동자의 경우도 대부분 독립적으로 가계를 부양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구주의 가계보조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구중산층의 경우 거의 대부분 빈농 · 소농 또는 영세상이기 때문에 오히려 소산층 또는 저소득층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전문기술직의 종사자일지라도 그들의 약 2분의 1이 봉급생활자이기보다는 오히려 구중산층의 성격이 매우 강하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에 있어서 사회계급의 직업적 성격은 아직 구미의 경우처럼 역할과 권력이 분화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과도기적 성격이 매우 강한 편이다. 다시 말해서, 계층과 직업의 성격에 있어서 전통성과 근대성이 혼재되어 있는 상태이다.

대한민국의 권력지배층은 1950년대까지 전통적 구중산층의 성격이 매우 강하였고, 1960년대 이후부터 점차 신중산층의 성격으로 전환되고 있다. 특히 정치지배층의 경우, 그 의식과 행동면에 있어 구중산층의 특성이 강한 반면, 관료지배층의 경우는 신중산층의 성격이 강하다.

그것은 정치지배층이 대개 지주 출신이며 식민지시대에 교육을 받은 데서 기인한 것이며, 관료지배층의 경우 대체로 중산층 출신인 데다 그들의 사회화가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의 혼합으로 형성된 문화적 주변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97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기업이 정치권력에 크게 의존하였지만, 오늘날 권력지배층은 점차 기업합리성의 영향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대한민국 사회의 경우 선진산업사회와 그 구조적 · 역사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반드시 서구적 계급의식이 존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늘날 기업을 비롯한 취업 및 고용은 합리적 계약관계에 따라 구성되기보다는 오히려 지연 · 혈연 · 학연 등의 연고관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실정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산업발전은 분명히 사회 내에서도 자본주의적 원리 및 제반 법칙을 꾸준히 관철시켜 나가고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사회관계 및 온정주의적 무계급성에서 탈피될 가능성이 지난 30여 년간 구중산층이 급격히 감소하고 신중산층과 노동자층이 급증하고 있다는 객관적 사회조건 속에서 생성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중산층은 1980년 말 현재 가사종사자를 제외하면 전체 직업인구 가운데 53.1%를 차지한다. 그 가운데 구중산층이 35.8%, 신중산층이 17.3%이다. 1980년 이전 25년 동안 구중산층은 연평균 1.4%가 감소되었지만, 신중산층은 연평균 0.4%가 증가되었다.

한편, 산업화의 결과 구중산층은 감소되고 있고 신중산층은 증가되고 있지만, 후자의 증가율은 전자의 감소율에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아서 중산층은 다소 감소하고 있다.

생산직 노동자는 1980년 말 현재 전체 직업인구의 43.3%를 차지하며, 이들은 지난 25년 동안 연평균 8%의 증가율을 보였다. 이들은 주로 제조업과 건설업 및 서비스업 분야에 많이 종사하며, 기본 특성으로는 처녀공(處女工) · 저연령 · 고학력 · 저임금 · 농민출신 · 연고취업 · 가족별거 등을 들 수 있다.

오늘날까지 대한민국 사회계층의 형성과 변화는 6 · 25전쟁과 농지개혁, 자본주의적 산업화, 교육기회 확대 등 다인적 요인(多因的要因)에 의한 것이었다.

사회계층의 형성요인으로서 일반적으로 재산과 분업이 지적되고 있으나 모든 기회를 제공해 주는 권력, 그리고 사유재산제도하의 상속을 통한 세습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요인에 의한 사회적 불평등의 형성은 소수 독점재산의 형성과 더불어 특히 상대적 빈곤을 심화시키고 있다.

정부의 『 제5차 경제사회발전5개년계획서』에 의하면 상위 20%의 소유점유율이 1965년의 41.8%에서 1980년에는 45.4%로 증가되고, 하위 40%의 점유율은 같은 기간에 19.3%에서 16.1%로 감소되었다.

그런데 통계청의 사회통계조사에 의하면 상위 20%의 소득 점유율이 1988년의 42.2%에서 1993년 39.4%로 감소되고 하위 40%의 소득 점유율이 같은 기간에 19.6%에서 20.4%로 증가되어 이 기간 중에는 비교적 건전한 소득분배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의 위기가 초래된 1997년 이후 이러한 불평등은 오히려 심화되었다. 하위 20%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1997년 상반기 92만 2100원에서 1998년 상반기에는 78만 4700원으로 14.9%나 줄어든 반면, 상위 20% 가구는 1997년 상반기 422만 3400원서 1998년 상반기에 432만 600원으로 2.3%나 늘어났다. 이에 따라 상위 20%와 하위 20%의 소득격차는 1997년보다 1998년에 오히려 7.1% 확대되었다.

1980년 국제통화기금이 지적한 바와 같이, 억대가 넘는 재산을 소유한 가구는 전국 가구 수의 5.4%에 불과하지만, 그 소유재산은 전국 재산의 51.2%에 달한다.

가족

1970년대 중반 대한민국의 가족구성원의 종류는 가구주(家口主)를 포함하여 약 28종에 달한다. 그 가운데 가구주를 제외하고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가족원은 그 자녀와 배우자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은 아들의 배우자, 손자 · 어머니 · 아버지 · 형제 등 대부분 남계(부계)의 근친자로서 구성되어 있다.

세대별로는 2세대 이하 가구의 비중이 커지는 반면 3 · 4세대의 비중이 작아져 핵가족화가 심화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평균가구원 수는 4, 5명이다. 1세대가족과 2세대가족은 그 대부분이 부부가족이며, 3세대가족 이상은 거의 대부분 직계가족이라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지난 20여 년간 가족유형도 크게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1955년의 부부가족의 비율은 약 63.6%였던 것이 1975년에 와서는 71.6%로 늘어 8% 증가된 반면에, 한국의 전통적 가족형인 직계가족은 20년 사이에 30.7%에서 19.5%로 약 11.2% 감소하였다. 20년이 지난 1990년대에 오면 가족형태는 더욱 다양화되고 있다.

세대별로 가구구성을 보면 총 일반 가구 가운데 2세대가구(180.9)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 1세대가구(43.1), 1인가구 · 3세대가구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2세대 가구는 바로 핵가족 단위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이고, 1세대가구와 1인가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것은 인구고령화와 핵가족화가 서로 연계성을 가진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 가족 내의 권력구조에 있어서, 농촌가족의 경우 현재도 전통적인 가족 가치관이 어느 정도 강하게 잔존하여 성별 분업과 세대의 권위가 강한 남편우위형 내지 가장우위형의 권력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가족을 대표하는 것은 언제나 남편이며, 보관권에는 성별 분업이 뚜렷하여 귀중문서는 남편이, 식료품은 부인이 보관한다.

결정권에 있어서도 남편이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으나 성별 분업이 뚜렷한 편이며, 아들이 혼인하여 동거하게 되면 아들 부부에게도 권력의 많은 부분이 이양된다. 도시가족의 경우에도 이와 크게 다를 바는 없으나, 직계가족에 있어 세대의 권위가 많이 약화되어 있다는 점과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그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역할구조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성별 분업이 뚜렷하여 남자와 여자의 분담역할의 구분이 확연히 나타난다. 그러나 오늘날의 도시의 부부가족의 경우, 남자는 바깥일을 하고 여자는 집안 일을 한다는 전통적 가족역할규범이 많이 약화되어 농촌가족만큼 지켜지고 있지는 않다. 또한, 육아나 교육 등 부부 공동의 역할범위가 점차 확대되어 가고 있다.

한편, 부모와 아들 부부가 동거하는 경우 세대적으로 역할이 분화되고 있으나, 대체로 아버지세대에서 아들세대로 역할이 이양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속에 있어서는 장남이 제사를 상속하고 재산상속도 장남이 우대받는 상속제도가 보편적이다.

「민법」에도 상속에 관한 규정이 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장남이 법정비율보다 더 많은 비율을 상속받고, 여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상속을 받지 못하는 것이 거의 일반적인 실정이다.

오늘날 서로 생활에 연관을 맺고 있는 친족의 범위를 살펴보면, 부계친(父系親)은 대개 8촌 이내를 친족의 범위로 보고 있으며, 여자혈족에 있어서는 이보다 훨씬 좁아진다. 예를 들면, 형의 손자는 친족의 범위에 들지만 누이의 딸의 자녀는 그 범위에 들지 않는다. 이는 친족의 범위가 부계친 남자 위주의 친족의식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부계친의 친족범위는 대체로 현 「민법」상의 범위와 일치한다.

반면에 모계친(母系親)의 경우 어머니의 형제자매의 자녀들까지, 그리고 어머니의 남자사촌의 자녀 및 여자사촌까지가 친족의 범위에 포함된다. 이는 외사촌까지를 친족으로 규정하고 있는 현 「민법」의 범위보다 다소 확대된 것이지만 부계친에 비하면 매우 축소된 것이다.

한편, 부계친족(夫系親族)은 과거 관습법에 따르면 남편의 친족범위보다 좁은 범위를 친족으로 규정하고 있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남편의 친족범위와 일치하는 8촌까지를 친족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는 현 「민법」의 규정과 일치하는 범위이다. 대개의 경우 같은 마을에는 부계친(夫系親)만 사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기 때문에 일상생활의 접촉도 매우 밀접하다.

반면에, 처계친(妻系親)에 있어서는 처의 부모만을 친족으로 간주하고 있고, 현 「민법」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제도상으로는 그렇지만, 오늘날 일상생활이나 감정의 측면에서 본다면 적어도 처의 형제자매나 이들의 자녀들은 모두 친족의 범위에 포함되고 있다.

사회보장

현대국가에 있어서 사회정책의 핵심은 예방적 특성과 방빈적 특성(防貧的特性)을 지닌 사회보장에 있다. 대한민국에서도 1960년대 이후에 복지의 기본적 제도인 사회보장에 관한 입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대한민국의 사회보장제도는 대체로 사회보험 · 공적 부조(公的扶助) · 사회복지서비스의 세 가지 형태가 골간을 이루고 있다.

우선, 사회보험은 연금보험 · 의료보험 · 산재보험 · 실업보험 · 가족수당 등을 말하는데, 이에 속하는 입법으로는 「공무원연금법」(1960년 시행) · 「군인연금법」(1963년 시행) · 「산업재해보험법」(1964년 시행) · 「의료보험법」(1977년 시행) · 「국민복지연금법」(1988년 시행) 등이 있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사회보험의 실태로는 연금보험의 경우 공무원 · 군인 · 교원 · 사원 등 비교적 직업 및 생활안정이 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전체 국민의 2.1%만이 가입되어 있다.

의료보험의 경우에는 1963년 제정된 의료보험법을 토대로 하여 1977년 시행된 지 12년 만인 1989년 7월 전국민의료보험을 달성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 국민이면 의료보험법에 의한 의료보호대상자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의료보험 적용대상자가 되며, 1997년 1월 현재 의료보험 적용인구는 전 국민의 96.1%이며, 공적 부조제도인 의료보호대상자는 3.6%이다. 산업재해보험의 경우 16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의 24.6%만이 그 적용을 받고 있다.

한편, 1973년에 제정되어 1974년에 실시될 예정이었다가 보류되었던 국민복지연금제도는 국민종합복지대책의 일환으로 1988년 사업장부터 시작하여, 1995년 7월에는 농어촌지역의 주민에게까지 확대하여 시행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노령연금 · 장애연금 · 반환일시금 · 유족연금 등 4종류로 구분, 시행되며, 이에 따른 재원은 모두 근로자와 사용자가 부담하고 제도운영에 필요한 행정관리비만 정부가 부담하고 있다. 1996년 현재 742만 여명이 가입하여 있다.

공적 부조는 생활보호법상 정부의 보호를 받게 되어 있는 영세민들에 대한 생계지원대책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에 속하는 입법으로는 「생활보호법」(1962년 시행) · 「군사원호법」(1961년 시행) · 「아동복지법」(1962년 시행) · 「재해구호법」(1963년 시행) · 「의료보호법」(1977년 시행) 등이 제정, 시행되고 있다. 1994년 현재 전체 국민의 약 4.8%가 그 수혜를 받고 있으나 생계비의 70∼80% 미만에 불과하다.

한편, 1997년 1월 현재 전체 인구의 3.6%인 164만 명은 생활보호대상자로서 정부가 무료진료혜택을 주는 의료보호를 받고 있다. 이 밖에 사회복지서비스는 불우아동 및 장애자 · 불우여성 등에 대한 시설수용보호와 재활사업을 말한다. 현재 사회복지시설은 양로시설 · 성인불구시설 · 모자보호시설 · 부녀직업보도시설 · 아동복리시설 등으로 전문화되고 있다.

민속

세시풍속

우리나라는 국토가 온대에 속하고 사계절의 구분이 뚜렷하여 우량이 알맞기 때문에, 일찍부터 농경을 주업으로 삼아 그에 관련한 농경문화를 하나의 생활문화로서 정착시켜 왔다.

또한, 농경생활에서 비롯된 세시풍속이 다양하게 뿌리를 내려 명절만도 설 · 상원(上元) · 입춘 · 한식 · 초파일 · 단오 · 유두 · 칠석 · 추석 · 동지 등의 각종 의례와 놀이, 조상을 모시는 차례를 비롯하여 각종 신을 모시는 여러 가지 의례가 행해져 왔다.

악귀를 쫓고 복을 비는 행위로서 고사(告祀) · 굿 · 고수레 · 부적 등의 민속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정월이면 토정비결을 보고 점을 치는 일 등도 유구한 역사에서 이루어진 민속유산으로 남아 있다. 이 밖에 세시풍속에 맞추어 정초에는 설빔으로 갈아 입고 어른에게 세배하며 조상의 무덤에 성묘도 하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덕담을 나누는 등의 민속은 오늘날에도 흔히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은 이미 농업국가에서 상공업국가로의 전환점을 넘어서 버렸고, 영농도 기계화되면서 세시풍속도 근본적인 대변동을 겪고 있다. 그러한 징후는 1960년대부터 나타나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화되었다. 무엇보다도 기본 인구면에서 이제는 도시인구가 농촌인구보다 훨씬 많아졌다.

그에 따라 세시풍속도 그 생활주기면에서부터 크게 달라졌다. 즉, 재래농민이 대개 1년 단위의 생활을 해온 데 반하여 도시인들은 연 · 월 · 주의 삼원체제생활을 전개시키고 있다. 종래의 화전놀이 · 화류놀이 · 등고(登高) · 단풍구경 등은 오늘날 주말이나 휴가계절의 관광 내지는 등산으로 바뀌고 있다. 그리고 천렵(川獵)은 낚시행락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현대적인 세시풍속의 변모는 농촌에서도 일어난다. 농촌도 영농기계화와 제초제 등의 화학약품 사용으로 시간이 많이 남게 되었고, 길쌈이나 바느질도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한편, 오늘날 각종 국가공휴일과 급증한 교육인구의 방학 및 봉급생활자들의 휴가라는 새로운 세시풍속도 등장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국가공휴일로는 현대생활에도 깊이 뿌리내려서 우리 세시풍속의 2대 정점일로서 집약되고 있는 3일간의 설날(음력 1월 1일)과 3일간의 추석(음력 8월 15일)이 있으며, 양력 정초 1일간의 신정(新正), 삼일절(3월 1일) · 식목일(4월 5일) · 어린이날(5월 5일) · 석가탄신일(음력 4월 8일) · 현충일(6월 6일) · 제헌절(7월 17일) · 광복절(8월 15일) · 개천절(10월 3일) · 성탄절(12월 25일)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설날은 한때 음력과 양력의 이중 역법체계의 갈등을 해소, 단일화한다는 명분 아래 폐지되었다가, 실제적인 이중과세가 여전히 잔존하고 전통민속문화의 계승이라는 문제가 대두되면서 명칭을 구정(舊正)에서 ‘민속의 날’로, 다시 ‘설날’로 개칭하여 국정공휴일로 정해졌다. 실질적으로 설날과 추석은 우리나라의 2대 명절로서 민족의 대이동일(大移動日)이라는 새로운 풍속도를 자아내고 있다.

이러한 모든 상황들은 종래의 농촌문화와 전통적인 신앙성을 당연히 약화시키고 있으며, 그에 따라 대형 집단민속놀이의 세시풍속들도 소멸되어 가는 추세에 있다. 내무부에서는 1960년대 새마을사업 초기에 동제(洞祭)의 폐지, 제당(祭堂) · 장승 등의 철거를 전국에 지시한 일이 있었고, 그 상태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영남이나 호남에 많았던 동제 · 농악 · 줄다리기 등과 함께 이루어지는 마을 단위의 세시풍속들은 아무래도 점차 소멸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최근 이 전체적인 소멸추세에 대하여 문화재 보존이라는 차원에서 반성과 보존운동이 국가적인 관심 속에 새로이 전개되어 가고 있다. 이른바 향토문화제라는 이름으로 관 주도형(官主導型)의 대형 지방축제들이 전국적으로 80∼90개로 성황을 이루며 세시풍속화하는 것도 근래의 한 경향이다.

관혼상제

우리나라 고유의 민속인 관혼상제의 의례는 광복 이후 가정의례에 관한 법규가 제정되면서 관 주도의 새로운 풍속이 형성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어른이 되는 데는 남자는 관례(冠禮)를 행하고 여자는 계례(筓禮)를 행하여 어른과 아이를 구별하는 관습이 있었으나, 광복 이후 점차 사라지고 관례는 혼례에 포함되고 말았다.

우리나라의 혼례예식도 요즈음에 와서는 외래사조의 영향을 받아 양가가 따로따로 잔치를 차리고 또 친영(親迎)의 예를 행하는 등의 번폐를 없애고 많이 개선하여 행하며, 특히 도시에서는 재래식 혼례예식보다는 현대식 혼인을 더욱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신식 혼인식은 서양식 혼인식과 비슷한 것으로 원래는 기독교 교회식에서 나온 것이다. 혼인식이 끝나면 신혼여행을 가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으며, 시부모에게 드리는 폐백도 식이 끝나면 별실에서 곧바로 행해진다.

한때 호화혼인식이 사회문제로 등장하자 혼인식을 법령으로 간소화하는 조처가 행해지기도 하였다. 한편, 상례 및 제례의 예식도 1969년부터 대통령고시로 제정, 공포된 「가정의례준칙」에 의거하여 간소하게 시행되었다. 물론, 지방이나 집안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종래의 절차보다 대체로 간소화되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생활

의생활

근 · 현대에 이르러, 개화의 물결은 의생활에 있어서도 변화를 가져와 기존의 의복제도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서구문물의 영향으로 점차 양복이 정착되는 한편, 한복에 있어서도 거추장스러운 옷차림에서 벗어나 평상복을 중심으로 한 한복 고유의 기본형으로 돌아가 간소화되었다. 또한, 신분에 따른 의복의 외형적인 차이점도 거의 사라졌다.

특히, 광복과 함께 의생활은 외래의 유행이 일본을 거치지 않고 직접 들어오게 되어 또 하나의 변혁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6 · 25전쟁을 계기로 외국의 구호 · 원조 물품이 대량 유입됨으로써, 서양의 복식문화가 일상화되기 시작하였다. 전반적인 흐름으로 보면, 광복 이후 현대사회의 의생활 부문은 초기의 공백기를 지나 서구화가 가속화되고 정착되는 과정을 밟고 있다.

이에 따라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이르러 양복은 일상적인 생활양식으로서의 지위를 굳히고, 나아가서 생활양식 및 의식변화와 더불어 의류산업이 급성장하여 1970년대 말에는 기성복이 정착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

또한, 국제교류가 증진됨에 따라 외국 유행의 영향도 보다 직접적으로 받아, 1960년대는 미니스커트와 판탈롱이 유행하였고, 1970년대는 핫팬티가, 그리고 1980년대는 디스코 스타일의 배기룩이 크게 유행하였다. 1990년대는 무정형과 다양성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양복이 일상복으로 정착된 반면 한복은 예복 · 특수복으로 분화되었으며, 그 결과 장식성을 더하여 고급화되고 있다. 한복의 고급화는 맞춤복화로 가능하여진 것이지만, 1970년대 말부터는 한복도 기성복화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로써, 가풍에 의해서까지 구속되었던 자가봉제 한복의 보수성에서 벗어나 패션성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1990년대에는 전통적 한복을 실생활의 편의에 따라 개량한 생활한복이 등장하였다.

의복재료에 있어서는, 1950년대 초엽까지 옥양목이나 광목 · 베 · 모시, 또는 부유층의 경우 비단이나 모직물 등 주로 천연섬유를 많이 사용하였으나, 1953년 처음 수입된 나일론을 비롯하여 합성섬유들이 질기고 손이 덜 간다는 장점 때문에 1950년대 말부터는 널리 보급되어 복식상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섬유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다시 고급화된 천연섬유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식생활

광복 이후 오늘날까지 의생활과 주생활이 서구화되면서 식생활도 여러 가지 변화를 겪었다. 특히 6 · 25전쟁 이후, 지역간 · 사회계층간의 극심한 이동은 광복 이전까지 남아 있던 지방 고유의 독특한 조리법과 전통음식의 특성을 사라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인공조미료의 보급으로 국민들의 식성이 획일화되는 등 광복 이후 50여년 동안 식생활양식이나 질뿐만 아니라 미각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또한, 산업화 이후 생활의 합리화, 도시의 아파트생활 등 근대생활문화는 인스턴트식품시대와 식품공장화시대를 초래하여 식생활역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960년대 중반 라면이 등장한 이후로 통조림 · 분말식품 · 훈제식품, 각종 조미료 등이 속속 개발되어 식생활을 편의 위주로 몰고 갔으며, 이러한 가공 · 편의식품의 소비량은 매년 증가추세에 있다.

또한, 간장 · 된장 · 고추장 등 전통적인 저장식품의 공장생산화가 이루어져 이들에 대한 수요도 급격히 늘었고, 1980∼1990년대에 들어서는 각종 패스트 푸드 업체들이 급성장하는 등 외식산업(外食産業)이 급속히 번창하고 있다.

그 동안 끊임없는 미각의 발달과 함께 새로운 종류의 식품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식생활 양태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한식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각 가정에 냉장고가 보급되고 조리기구가 달라져도 밥 · 국 · 김치 등으로 차려지는 식탁의 기본만큼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대한민국의 일상음식은 기본적으로 밥을 주식으로 하고 반찬을 부식으로 하여 차리는 주식 · 부식 분리유형이 주조를 이룬다. 밥은 곡물음식이므로 반찬은 되도록 곡물이 아닌 식품으로 만들어 밥에 없는 영양소를 보완하고 밥의 맛을 더하게 할 수 있도록 관습화되어 있다.

반찬의 수에 따라서 3∼12접시의 다양한 내용을 가지며, 모든 음식이 한 상에 한꺼번에 차려서 나온다. 그런데 오늘날 과거와는 달리 첩수와 그 내용이 정확히 지켜지지는 않고 있다.

아침 · 저녁의 상차림은 가정마다의 기호, 생활규범, 향토적 특성 등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어느 가정에서나 김치류 · 장류 · 젓갈 · 마른 반찬류 등을 상비하여 일상음식에 대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김치는 익는 동안에 생긴 유기산 맛과 발효미(醱酵味)가 잘 조화된 상용음식으로 밥상에서 밥 다음으로 상용적 위치를 차지한다. 김치는 일종의 상비 · 저장 식품이며 장류(醬類)와 밑반찬도 그에 속한다.

한편, 김치를 담그는 김장은 추운 겨울 동안의 3∼4개월을 위해서 채소공급원을 준비하는 주요 행사인데, 오늘날 비닐하우스의 채소재배와 저장식품의 상품화 추세에 따라 예전에 비하여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다.

그리고 상차림과 접대하기의 격식은 20세기 초반 이후 많이 바뀌어 노인 · 어른 이외는 모두 함께 모여 두레상차림에서 밥을 같이 먹는 것으로 바뀌었으며, 요즈음에는 식탁을 사용하여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하는 양식으로 크게 변하였다.

한편, 생활이 나아지고 전반적인 식생활 개선이 이루어짐에 따라 곡류섭취량은 감소하는 반면 동물성단백질의 섭취량이 증가하고, 과일 · 채소 · 두류의 섭취량도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식량자급도는 계속 저하되어 수요량의 절반 수준이다. 주곡인 쌀의 자급도는 완전자급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정도이지만 식생활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작아지고 있다.

또한, 이러한 변화추세와 관련하여 과잉영양섭취로 인한 비만아 · 성인병 등이 오늘날 새로운 문제거리로 등장하고 있으며, 지나친 가공 · 편의 식품 위주의 식단은 영양의 불균형문제를 초래하고 있다.

주생활

8 · 15광복 후 정치 · 사회적 불안정으로 항구적인 주택건설사업에 역점을 둘 여력이 없는 데다가, 월남민들과 만주 · 일본 등지에서 귀환한 동포들의 수적 증가로 심한 주택난에 시달렸다.

더욱이, 6 · 25전쟁을 겪으면서 전국토가 파괴되고, 북한으로부터의 수백 만의 피난민 이주는 주택사정을 극한적으로 어렵게 만들었다. 극심한 주택부족은 UN의 원조와 자체의 건설 노력에도 불구하고 판자촌과 천막촌 등 무허가주택을 난립시키는 폐해를 가중시켰다.

1960년대까지의 이러한 어려움은, 정부 주도의 공공주택 건설의 노력과 민간자본의 주거건설참여로 1980년대까지 적극적인 단지개발과 주거의 질적 내용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급증하는 인구와 세대구성의 핵가족화 및 택지의 절대적 부족이 높은 토지가격의 부담과 함께 주택보급을 과거보다 더 악화시키고, 국민소득의 한계로 말미암아 손쉬운 주택취득은 아직도 기본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

특히, 산업화과정에서 인구의 도시집중현상이 가속화되면서 도시의 주택부족률은 계속 증가하여 1983년 말 현재 약 46.5%에 달하고 있다. 이를 농촌지역의 8%와 비교해 볼 때, 오늘날 대한민국의 주택난은 바로 도시지역에 있어서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셋방살이는 대한민국의 도시서민들 사이에 일반화된 삶의 형태가 되었다.

1995년 말 전국의 가구수는 1113만 가구, 주택수는 957만 호로 86.1%의 주택보급률을 보였다. 1988년에 시작된 200만 호 건설계획과 1993년부터 시작된 신경제5개년계획은 1988년의 70%에도 미달하던 주택보급률을 상승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1960년대 중반 이후에 등장한 아파트생활문화는 급속한 속도로 국민들의 주생활에 파고 들었다. 전국의 모든 주택 가운데 아파트는 1983년 말 현재 약 17%를 차지하고 있다. 1997년 전국에서 건설된 주택물량의 81.3%가 아파트이다.

한편, 주택규모는 1970년의 14.5평에 비하여 1985년에는 22.3평으로 7.8평이 증가하였으며, 가구당 주거면적도 1970년의 11.4평에서 1985년에는 14.2평으로 2.8평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주택규모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방 1개에 거주하는 가구는 전체가구의 32.6%, 방 2개 이하에 거주하는 가구는 전체가구의 66.2%에 달하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이 월세 · 전세 형태의 셋집을 살고 있는 등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의 주거생활을 하고 있다.

이는 앞으로 더욱 공공주택을 개발, 주거밀도를 높이고, 임대주택으로의 분양방법을 전환함으로써, 토지의 공개념(公槪念)을 통하여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주택 자체의 양식은 생활양식의 급격한 서구화 추세로 편익성 · 기능성 우선의 구성과 설비로 바뀌고, 또 건설의 경제성을 추구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주거의 전통성이 많이 잠식당하고 있다. 그 결과로 오늘날 일반주택의 건축에 있어서 전통적 한옥양식을 갖춘 집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창호지를 바른 봉창이나 문은 유리와 합판으로 짠 문으로 바뀌었고, 마루는 벽과 유리로 막아 현관을 통하여 출입하도록 변형되었다. 흙으로 구운 한식 기와나 이엉 같은 전통적 지붕재료들도 그다지 사용되지 않으며, 전통한옥의 지붕곡선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고, 목조가옥은 시멘트나 블록건축물로 대체되었다.

가옥의 입지도 전통적으로는 자연환경 및 풍수지리설에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최근 도시지역에 건축되는 많은 가옥의 위치나 방향은 접근이 쉬운 도로를 따라서, 또는 도시계획에 의하여 정리된 구획형태에 따라서 배열되고 있다. 이러한 외형적 변화는 물론 주생활 자체도 사회 전반의 서구화 추세에 따라 크게 변화하고 있다.

스테인레스 스틸로 된 조리대, 바닥이 높아져 마루나 방과 똑같은 높이의 평면이 된 입식 부엌, 목욕탕 설비, 수세식 좌변기가 갖추어진 현대식 주택이 등장하여 널리 보급되었다. 이러한 시설의 확충은 수도의 일반가정 보급과 난방 및 취사연료의 변화를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동선이 길고 조리자세가 불편한 재래식 부엌의 작업환경의 변화는 나무를 때던 아궁이가 연탄아궁이로 바뀌고, 다시 보일러를 사용한 중앙난방 방식이 보급되고, 수도가 부엌 안까지 들어오고, 거기에 난방연료와 취사연료가 분리, 사용됨으로써 이루어졌다. 1980년대 도시가스가 개발되어 가스의 지역별 집단공급 방식이 대두되어 연탄의 비중은 계속 감소하였다.

여가생활

공업 부문의 발달은 대체로 국민소득 증대에 기여하였고, 생산시설의 근대화와 대량생산 체제로의 돌입은 생산직 근로자 등 직장인들의 생활방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여가생활의 추구방식도 다양해지고, 이에 따른 수요증가로 점차 여가와 관련된 산업의 발전도 촉진되고 있다.

이에 따라 여가활용비 지출이 도시 및 농촌 가구에서 해마다 증가하고 있으나, 교양오락비 지출율에 있어서는 도시가구가 1975년 1.9%, 1980년 1.8%, 1985년 3.3%, 1990년 4.4%, 1994년 4.9%의 수준으로 같은 시기 농가의 1.2%, 1.7%, 0.9%, 0.7%, 0.9%보다 높다.

여가활용은 1993년 전국을 기준으로 수면 및 가사 잡일이 45.4%로 가장 많으며, TV 시청이 24.4%, 연극 · 영화 등의 감상이나 박물관 등의 관람이 4.9%, 스포츠 · 여행이 14%이다. 여가계획을 세울 때의 주요 고려사항은 마음의 여유와 비용이다.

가족의 여가계획에 영향을 미치는 가족구성원은 주로 아버지(남편)이다. 핵가족화의 진전에 따라 할아버지 · 할머니의 존재가 약화되고 아버지 · 어머니 중심으로 바뀌고 있으며,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여타의 구성원 또는 어머니(처)의 영향력이 크다.

여가활동은 대부분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하며 혼자인 경우도 적지 않은 반면, 직장동료나 이웃과 함께 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여가활용 만족도는 1993년 전국을 기준으로 14.8%에 불과하여 낮은 편이며, 텔레비전시청률이 1977년 54.4%, 1980년 84.3%, 1983년 84.2%, 1990년 93.9%, 1993년 94.8%로서 텔레비전 시청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1985년의 국민생활시간 조사에 의하면 성인이 생활필수시간에 소비하는 시간량은 남자가 평일 10시간21분, 토요일 10시간24분, 일요일 11시간12분이며, 여자는 평일 10시간18분, 토요일 10시간23분, 일요일 11시간3분이다.

노동시간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남자의 경우 평일에는 다소 증가하였으나 토요일에는 감소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고, 여자도 남자와 비슷한 추세를 보이고 있다. 한편, 여가활동을 하고 있는 비율은 남자의 경우 평일과 토요일에 증가한 반면, 여자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높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

우리나라에 있어서 학교교육의 역사는 매우 길다. 고대로부터 근대 말에 이르기까지의 1,500여년 동안 각 왕조는 모두 교학발전을 위하여 지대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19세기 말 근대교육제도가 도입된 이래 거의 1세기가 지난 오늘날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국민교육은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커다란 발전을 이룩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있어서도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이라는 교육구국(敎育救國)의 정신 아래, 일제의 식민지교육정책에도 불구하고 자주독립을 지향한 민족의 교육열은 매우 높았다.

광복 후의 교육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민주주의이념에 입각한 교육정책의 수립과 국민의 교육열 증가에 따라 교육수요는 해마다 높아져, 현재는 각급 학교의 취학률과 상급학교에의 진학률이 어느 선진국에도 뒤지지 않는 교육국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또한, 초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는 정규교육기관 이외에도 평생교육의 이념에 입각하여 취학 전의 유아교육 및 일반인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사회교육이 확충되어 가고 있다.

교육정책

광복 후 대한민국의 교육정책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 원리를 이념으로 한 새로운 교육을 추진하게 되었다. 미군정기 동안 종래 복선형 학제를 단선형으로 개편하고 교육행정의 자치화를 꾀하는 한편, 초등학교 교과서 편찬, 민주교육 이념의 보급을 위한 교원 재교육, 문맹퇴치를 위한 성인교육, 각급 교육기관의 확충 등 새로운 교육체제를 정비하게 되었다.

이러한 군정기의 교육재건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우리의 힘으로 우리 실정에 맞는 교육을 모색하게 되었다. 당시 무엇보다 시급한 교육정책 과제는 국민교육제도의 근간이 될 교육의 기본법을 제정하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1949년 12월 「교육법」이 공포되어 홍익인간의 이념을 교육이념으로 삼게 되었으며, 각종 교육제도의 정비로 교육기반을 확립하게 되었다.

1951년 3월 6 · 3 · 3 · 4제의 현행 학제가 수립된 이래 제도적으로 교육의 기회가 균등하게 보장되고 국민학교 의무교육이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으며, 중등교육인구의 급증과 고등교육의 확장 등 전란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한 성장을 계속하여 왔다.

한편, 교육자치제의 실시를 위하여 꾸준히 추진한 결과, 6 · 25전쟁중인 1952년 6월 각 교육구와 교육위원회의 발족을 보게 되었다. 전쟁복구와 재건기라 할 수 있는 1950년대 중반 이후 전란으로 파괴된 교육시설을 복구하고 교원의 수급조정 및 인사 등에 관한 체계 확립, 반공 · 도덕 교육의 강화와 과학 · 기술 교육의 진흥 등에 중점을 두어 교육정책을 추진하였다.

1960년대는 4 · 19혁명과 5 · 16군사정변을 거치면서 교육의 정상화를 촉진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1961년 9월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 등을 공포하고, 1963년 2월 종래의 교육과정을 전면 개편하기에 이르렀다. 제3공화국에 들어와서는 민족중흥과 국가발전을 위한 교육개혁이 강조되었다. 이에 따라 1968년 잇따른 교육정책상의 개혁이 실시되었다.

즉, 중학교 평준화시책에 따른 중학교 무시험진학과 대학의 질적 향상을 꾀하고 지역간의 격차 해소를 위한 대학입학예비고사 실시 등 입시제도에 있어서의 변혁을 비롯하여, 「국민교육헌장」의 제정, 통신교육제도의 도입, 장기종합교육계획심의회 설치 등이 그것이다. 특히, 「국민교육헌장」은 새로운 국민상과 국민교육을 제시한 것으로, 홍익인간의 교육이념과 함께 우리나라 교육의 기본이념으로 정착되었다.

제4공화국이 출범한 1970년대의 교육은 ‘국적 있는 교육’이라는 기치 아래 반공안보교육 · 주체성교육 등에 역점을 두었으며, 과학기술교육과 산학협동기술이 강화되어 전국민의 과학화운동이 실시되었고,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교육의 사회적 기능을 개발하기 위한 새마을교육이 전개되었다.

학교교육에서는 중등교육의 보편화가 이루어져 1979년 중학교 진학률이 91%를 나타내게 되었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고등교육에서의 개혁과 확충이 이루어졌다.

즉, 고등학교 졸업생의 증가와 산업인력 수요의 증가에 대응하여 기존 대학의 입학정원이 현저히 확대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전문대학 수준의 고등교육기관이 대폭 증가되어 고등교육의 보편화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대학교육의 확충과 함께 대학원교육의 강화를 지향하는 고등교육개혁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입시제도에 있어서는 고등학교의 평준화와 지방교육의 발전을 목적으로, 고등학교 추첨입학제도의 확대와 함께 대학입시에 고등학교 성적을 반영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 와서는 7 · 30개혁조치 등을 통하여 일련의 주요한 교육정책이 결정되었는데, 그 주요 내용은 ① 국민정신교육의 강화, ② 평생교육 및 전인교육의 강화, ③ 고등교육의 내실화를 위한 졸업정원제의 실시, ④ 대학입시제도에 있어서 국가학력고사 실시 및 고교내신제 적용, ⑤ 조기유아교육의 진흥, ⑥ 학원자율화, ⑦ 과외수업금지, ⑧ 해외유학에 관한 개방정책 추진, ⑨ 교육세 부과 등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은 역사의 격변과 함께 개혁과 변동을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장기적인 안목보다는 근시안적이고 잦은 개편으로 교육정책이 실시되어 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교육부가 중심이 되어 교육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는데, 이는 지난 50여년 간 교육을 지배하여 왔던 교육의 틀을 깨고 21세기 정보화 · 세계화 시대에 대응하는 새로운 틀을 짜는 작업이다.

구체적으로는 인성 · 창의성을 기르는 열린 교육 및 학교 현장의 혁신운동 확산, 대학교육의 질 향상을 위한 자율화 · 다양화 · 특성화, 직업능력 향상을 위한 평생 직업교육의 내실화, 교육복지 구현을 위한 학습자 지원, 열린 평생학습 사회 건설을 위한 교육의 정보화 등이 그 방향이다.

이는 광복 이후 정치적 · 사회적 불안정, 경제적 궁핍, 급속한 인구성장 및 교육의 팽창 등 여러 가지 내적 · 외적인 요인에 따라 체계적이고 건전한 교육의 성장이 어려운 조건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양적 팽창, 민주적 제도의 도입, 교육투자의 증대, 교육프로그램의 다양화, 교육기술의 전문화 등 여러 면으로 성장해 왔으며, 이러한 성장발전을 위하여 부단히 교육정책이 바뀌고 학제도 수정, 보완되어 왔다.

학교교육

1998년 현재 우리나라의 취학 전 교육은 만 3∼5세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유치원과, 그 이전의 유아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어린이 집에서 실시하고 있다. 유치원 아동 수는 1980년의 6만 6500명에서 1986년 35만 5000명, 1996년 55만 1000명, 1997년 56만 8000명으로 급증하고 있으나 전체 대상 아동 수의 절반이 조금 안되는 인원이 다니고 있는 실정이다(1996년 44.8%, 1997년 45%).

초등학교는 국민생활에 필요한 초등교육을 실시하는 곳으로, 학령(만 6세)에 도달한 아동을 대상으로 무상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1988년 국민학교 수는 6,463개(분교 1,095개)이고, 학생 수는 총 481만 9857명이었으나, 1997년 현재 초등학교 수는 5,721개이고, 학생 수는 총 378만 3986명이다.

중등교육은 중학교(3년)와 고등학교(3년) 과정으로 나누어진다. 초등학교졸업자의 중학교진학률은 98% 정도이며, 중학교교육의 무상 · 의무제가 농어촌지역부터 단계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1988년 중학교 수는 2,429개(분교 45개)이고, 학생 수는 총 252만 3515명이었으나, 1997년 현재 중학교 수는 2,720개이고, 학생 수는 총 218만 283명이다.

고등학교에서는 중학교에서 받은 교육의 기초 위에 고등보통교육과 전문교육을 실시한다. 중학교졸업자의 고등학교진학률은 87% 정도이며, 학비는 자기부담이다. 고등학교는 인문계 고등학교, 실업계 고등학교 및 기타 예 · 체능 고등학교로 나누어진다. 인문계 고등학교는 고등보통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로서, 2학년부터 희망과 적성에 따라 인문 · 사회과정, 자연과정, 직업과정의 셋 중에서 택일하게 된다.

실업계 고등학교는 주로 농업 · 공업 · 상업 및 수산 · 해양 등 전문교육을 실시하는 학교이다. 기타 고등학교로는 예술고등학교 · 체육고등학교 등이 있어 음악 · 미술 · 무용 · 체육 등을 전공하게 하고 있다. 1988년 고등학교 수는 1,653개이고, 학생 수는 총 230만 582명이었으나, 1997년 현재 고등학교 수는 1,892개이고, 학생 수는 총 233만 6725명이다.

1997년 12월에 고시된 제7차 교육과정(2000년부터 단계적으로 시행)에 의하면 초등교육(1학년∼6학년)부터 중등교육(7학년∼12학년)까지의 교육과정은 국민공통 기본교육과정(1학년∼10학년)과 고등학교 선택중심 교육과정(11학년∼12학년)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민 공통 기본교육과정은 교과, 재량활동, 특별활동으로 편성된다. 교과는 국어 · 도덕 · 사회 · 수학 · 과학 · 실과(기술 · 가정) · 체육 · 음악 · 미술 · 외국어(영어)로 한다. 다만 1∼2학년은 관련 교과를 통합하여 국어 · 수학 · 바른 생활 · 슬기로운 생활 · 즐거운 생활 및 우리들은 1학년으로 한다. 재량활동은 교과 재량활동과 창의적 계발활동, 봉사활동, 행사활동으로 한다.

고등학교 선택중심 교육과정은 교과와 특별활동으로 한다. 교과는 보통교과(국어 · 도덕 · 사회 · 수학 · 과학 · 기술 · 가정 · 체육 · 음악 · 미술 · 외국어와 한문 · 교련 · 교양의 선택과목)와 전문교과(농업 · 공업 · 상업, 수산 · 해운, 가사 · 실업, 과학, 체육, 예술, 외국어, 국제에 관한 교과)로 한다. 특별활동은 자치활동 · 적응활동 · 계발활동 · 봉사활동 · 행사활동으로 한다.

고등교육기관으로는 대학 · 교육대학 · 사범대학 · 전문대학 · 방송통신대학 · 각종학교 등이 있다. 종합대학교는 3개 이상의 단과대학으로 구성되며, 종합대학교나 단과대학은 모두 대학원을 설치할 수 있다. 대학의 수업연한은 대부분 4년으로 되어 있으나, 의과 · 한의과 및 치과대학은 6년으로 되어 있다.

학사학위는 문학 · 신학 · 미술학 · 음악학 · 법학 · 정치학 · 행정학 · 교육학 · 도서관학 · 경제학 · 경영학 · 상학 · 이학 · 가정학 · 체육학 · 공학 · 의학 · 치의학 · 한의학 · 보건학 · 간호학 · 약학 · 농학 · 수의학 · 수산학 등 25개 분야로 되어 있다. 교과는 일반교양과목과 전공과목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필수과목과 선택과목으로 구분한다.

교육대학은 국민학교의 교원을, 사범대학은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교원을 양성하는 기관이다. 교육대학은 모두 국립이며, 수업연한은 교육대학과 사범대학 모두 4년이다. 전문대학은 종래의 전문학교와 초급대학을 개편한 것으로서, 전문지식과 이론을 습득한 중견직업인을 양성하는 곳이다.

전공 분야는 공업계, 농업계, 간호계, 수산 · 해운계, 산업 · 경영계 등이 있으며, 수업연한은 2년 내지 3년으로 되어 있다. 졸업하면 대부분 취업을 하지만, 동일계 4년제 대학에 편입하여 수학을 계속할 수도 있다.

1988년 고등교육기관 수는 대학 104개, 교육대학 11개, 전문대학 119개, 각종학교 25개 등이며, 재학생은 대학 100만 3648명, 교육대학 1만 8765명, 전문대학 26만 6844명, 각종학교 1만 9608명 등이었으나, 1997년 현재 고등교육기관 수는 대학 150개, 교육대학 11개, 전문대학 155개, 각종학교 8개 등이며, 재학생은 대학 136만 8461명, 교육대학 2만 948명, 전문대학 72만 4741명, 각종학교 9,596명 등이다.

고등교육기관의 10년 동안의 변화 상황의 두드러진 특징은 대학과 전문대학의 숫자와 학생 수가 현저히 늘어났다는 점이다. 더욱이 전문대학 학생 수의 3배나 되는 급격한 증가는 우리 사회의 변화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학원에는 석사학위과정과 박사학위과정이 있다. 1년 이상 수학하고 전공과목 24학점 이상을 취득한 자로서 외국어시험과 석사학위종합시험에 합격한 자는 석사학위논문을 제출할 수 있고, 다시 3년 이상 수학하고 전공과목 60학점 이상을 취득한 자로서 2종의 외국어시험과 박사학위종합시험에 합격한 자는 박사학위논문을 제출할 수 있다.

1988년 전국에 203개의 대학원이 설치되어, 재학생이 6만 9962명이었으나, 1997년 현재 전국 592개의 대학원에 재학생은 15만 1358명이다. 대학원도 10년 사이에 2배 이상의 증가를 보인 것에서 차츰 학문의 전문화가 확대되어 가는 추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특수학교에서는 시각 · 청각 장애자 등 심신장애자에게 유치원 · 국민학교 · 중학교 · 고등학교에 준한 교육과 실생활에 필요한 지식 및 기능을 가르친다. 서울특별시 · 광역시 및 도에는 각 1개 교 이상의 특수학교를 설립하게 되어 있고, 특별한 경우 초등학교 또는 중학교에 신체허약자 · 성격이상자 · 정신박약자 · 농자 및 난청자, 맹자 및 난시자, 언어부자유자, 기타 불구자 등을 위하여 특수학급을 둘 수 있다.

1986년 특수학교는 서울맹학교와 서울농아학교의 2개 국립학교와 공립 23개, 사립 65개 등 총 90개가 있었고, 재학생은 1만 5664명이었으나, 1997년 현재 특수학교는 114개가 있으며, 재학생은 2만 2569명이다.

사회교육

학교교육 외에 평생교육의 이념에 입각하여 전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하고 있는 사회교육은 1970년대의 산업화추세에 따라 급속히 확장되었다. 사회교육은 그 성격 및 형태에 따라서 ① 준학교교육, ② 직업기술교육, ③ 정신 및 직무교육, ④ 일반교양교육 등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교육법」에 정해진 학교로서 사회교육의 성격을 가진 준학교교육기관으로는 공민학교와 고등공민학교, 기술학교와 고등기술학교, 산업체특별학급 및 산업체부설학교, 방송통신고등학교와 방송통신대학, 각종학교, 개방대학 등이 있다. 특히, 방송통신교육기관 · 개방학교 · 산업체부설교육기관 등은 교육방식과 입학조건에 있어 전통적인 형식을 벗어난 탈전통적 학교로서, 급속한 산업화에 따라 증가된 근로청소년들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하여 고안된 교육기관이다.

직업기술교육 역시 산업화시대의 요구에 따라 그 수요가 격증되었다. 이는 기업체와 공공단체의 기술훈련과 연수, 사설강습소와 영농훈련 등의 다양한 형태로 실시되고 있다. 체계적인 기술훈련은 1967년 「직업훈련법」이 제정되면서 정착되었다. 이에 따라 국가 · 지방자치단체 또는 공공직업훈련법인이 실시하는 공공직업훈련, 비영리법인이 노동부의 인가를 받아 실시하는 인정훈련(認定訓鍊) 등이 실시되고 있다.

사설강습소는 광복 이후부터 학원이라는 명칭으로 발전해 왔으며, 1970년대 이후 그 수가 급증하여 직업기술교육의 커다란 몫을 차지하고 있다. 영농훈련은 농촌진흥청과 각도 농민교육원을 중심으로 영농기술교육 · 농기계교육 · 청소년지도자훈련 · 사회지도자훈련 등을 실시하고 있다.

정신 및 직무교육은 1970년대 전반을 통하여 사회운동의 이념으로 발전한 새마을운동과 함께 전국민을 대상으로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체계적인 조직을 통하여 도시와 농촌 구별 없이 새마을교육이 실시되었는데, 이는 1960년대 초의 재건국민운동이 발전된 것으로 정부 주도의 사회개발지향적 사회교육의 전형적인 예가 되고 있다.

일반교양교육은 경제수준이 향상되고 생활양식이 변화하면서 새로운 교육적 요구로 등장하게 되었다. 즉, 주부를 중심으로 한 일반인들이 여가를 활용하면서 생활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교육을 찾게 되었으며, 이에 부응하여 민간사회단체 · 언론기관 등에서 각종 교육프로그램으로 강좌를 개설하였다. 기존의 도서관 · 박물관 · 미술관 등도 단순한 전시에서 벗어나 체계적인 교육활동을 벌이게 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앞으로도 더욱 증가, 발전될 전망이다.

종교

오늘날 대한민국은 ‘세계 종교의 용광로’라고 불릴 만큼 동서양의 종교들이 한데 모여 있으며, 그러한 신앙의 자유는 「헌법」에 의하여 보장되어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는 외래종교의 전래 이전인 선사시대부터 애니미즘 또는 자연숭배의 한 형태인 고유종교가 있었다. 상고시대는 이 종교가 주민결속 · 사회통합 · 예술창출 · 인간심성순화 등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애니미즘은 체계적인 교리가 의식의 발전을 이루지 못한 채 그 뒤 전래된 외래종교에 의하여 대치되는 한편, 외래종교와 융합, 변용되기도 하였으며,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하여 무당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기복적 의식에 의존하는 서민층에 잔존하고 있다.

이러한 민간신앙은 오늘날 다분히 주술적 · 기복적이며 윤리성이 적고, 관념적인 내세관이나 까다로운 철학성과는 거리를 멀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민간신앙은 일부 서민층의 종교적 욕구에 의하여 가식 없는 소박한 신앙으로서 유구한 민족생활의 전통 위에 서서 고유성을 보존, 전승하고 있는 하나의 맥박으로 남아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크게 불교 · 유교 · 기독교 및 신흥종교의 네 조류가 있다. 이 가운데 불교와 유교는 긴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토착화된 우리의 전통종교이며, 기독교는 18, 19세기 무렵 서양문물의 영향 아래에서 이식, 성장해 온 종교로서 이는 다시 천주교와 개신교로 구분된다.

신흥종교는 불교 · 기독교 · 이슬람교 등의 기성세계종교와는 달리 비록 연원은 멀다 하더라도 그 성립이 최근세이며 아직 세계성이 희박한 종교를 말하는데, 천도교 · 대종교 · 원불교 · 통일교 등이 이에 속한다.

1980년대 전반기 이전 대한민국의 종교인구는 전인구의 약 40%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그 수는 계속 증가하여 1994년 현재 대한민국의 종교인구는 전인구의 약 49.9%로 두 명 가운데 한 명은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980년대 말까지 우리 종교계에서 가장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불교이었다. 1983년 10월 불교인구는 750만 명으로 계속 감소추세에 있었지만 여전히 전체 종교인구의 약 48% 이상을, 그리고 전체인구의 약 19%를 차지하고 있었다. 불교계는 광복 후 40여 년을 지나오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시련을 겪어오면서 근래 자체의 노력으로 부흥기를 맞고자 힘쓰고 있다.

대한민국 불교 최대의 종단으로는 조계종(曹溪宗)과 태고종(太古宗)이 있고, 그 밖에 법화종(法華宗)이 두 파, 총화종(總和宗) · 천태종(天台宗) · 진각종(眞覺宗) · 일승종(一乘宗) · 불입종(佛入宗) · 정토종(淨土宗) · 화엄종(華嚴宗) · 보문종(普門宗) · 법상종(法相宗) · 용화종(龍華宗) · 원효종(元曉宗) · 진언종(眞言宗) · 천화불교(天華佛敎) · 미륵종(彌勒宗) 등 18개 종파가 있으며, 1983년 말 5,680개 사원과 1만 2693명의 남녀 승려가 있었다.

유교의 경우는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 그 영향력을 크게 상실하고는 있으나 우리 사회의 기본질서를 이루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매우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아직도 우리의 생활규범으로 남아 있다. 유교인구는 1983년 말 전체 종교인구의 약 5.04% 정도였다.

기독교의 경우 종교계에서 가장 왕성한 세력신장을 보이고 있는데, 특히 개신교가 그러하다. 광복 후 유럽 여러 나라, 특히 미국과의 긴밀한 국제관계가 성립된 이래 종교면에서의 영향은 괄목할 정도이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의 종교문화, 그 중 특히 기독교교회들은 크게 성장하였다. 그 동안 한국천주교회는 착실히 신장하여 1981년 9월 조선교구설정 150돌을 맞이하였으며, 1983년 말 160만 명의 신자를 확보하여 전체 종교인구의 약 10%를 차지하였으며, 2,300여 개의 성당, 5,100여 명의 교직자가 있었다.

개신교의 경우 이보다 훨씬 더 급성장하여 1983년 말 약 530만 명의 신자, 즉 전체 종교인구의 약 34%를 차지하였으며, 2만 6000여 개의 교회, 4,000여 명의 교직자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개신교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로는 ① 교회의 분열현상(한국 개신교의 최대교단인 장로교회 안에는 25개나 되는 분파가 갈라져 있다), ② 농촌교회의 영세성과 도시교회의 경제적 비대화로 인한 양극화현상, ③ 교회 내 청소년교육의 부진과 신도 수 감소, ④ 교회의 샤머니즘화현상 등이 있다.

이 밖에 천도교 · 원불교 · 대종교 등 민간신앙에 바탕을 둔 신흥종교와 외래의 바하이 · 천리교(天理敎) · 이슬람교 등이 그 기반을 굳혀가고 있다. 특히, 이슬람교는 6 · 25전쟁 당시 UN군의 일원으로 터키군이 참전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는데, 1970년대 초 우리나라의 건설업체가 중동에 진출한 이래 회교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1995년 11월 1일 당시 종교를 가지고 있는 인구는 2259만 8000명으로 총인구의 50.7%를 차지하고 있으며, 종교인구 비율은 1985년 42.6%에 비해 8.1%가 증가하였다. 종교유형별 분포를 보면 1995년 11월 1일 당시 총인구 중 불교인구가 23.2%로 여전히 가장 많고, 개신교 19.7%, 천주교 6.6% 등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성과 연령별 종교인구를 보면 남자 인구의 47.3%가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여자는 54.2%가 종교를 가지고 있어 여자가 6.9% 정도 높게 나타나고 있다.

연령별로는 종교인구비율이 가장 높은 연령층인 45∼49세 가운데 61.1%가 종교를 가지고 있다. 특히 40대 여자의 종교인구비율(40∼44세:66.2%, 45∼49세:66.0%)이 가장 높게 나타나 괄목할 만한데, 여자들이 40대로 들어서면서 자녀들 육아문제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되는 시기라는 점이 이러한 현상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10세 미만 인구를 제외하고 종교인구비율이 가장 낮은 연령층은 25∼29세로 43.6%가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남자의 경우 40.1%로 가장 낮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 한편, 4대 종교의 연령별 구성비를 보면 4대 종교(불교 · 개신교 · 천주교 · 유교)인구는 2224만 3000명(98.4%)으로 우리나라 종교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985년 4대 종교 구성비 98.2%보다 0.2% 증가되었다.

종교 유형별로 종교인구의 연령분포를 비교하면, 불교와 천주교는 30대, 개신교는 10대, 유교는 60세 이상 신자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경우는 30대를 정점으로 하여 각 연령층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으며, 개신교와 천주교는 30대 이하의 젊은 층의 구성비가 각각 72.0%, 67.5%로 높게 나타나고 있다. 한편, 유교의 경우 젊은 연령층보다는 연령이 높을수록 신자 수가 많아 반 수 이상(53.2%)이 50세 이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한국갤럽연구소가 1997년 현재 한국의 종교실태와 한국인의 종교의식을 조사한 결과, “한국 기독교는 이제 그 성장을 멈추었는가?”라는 성장정체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전에 없이 높아진 시점에 개신교 인구가 불교 인구를 앞섰다는 결과가 나와 주목되고 있다.

1997년 현재 개신교 인구는 18세 이상 인구의 20.3%인 646만 3000명인데, 통계청이 1995년 인구 · 주택총조사에서 밝힌 개신교 인구 876만 336명에서 0세에서 17세까지를 뺀 18세 이상 개신교 인구는 611만 3422명이다.

이 연구소의 조사에 의한 추계를 보면 전체적으로 모든 종교에서 그 비율이 감소하였으나, 특히 개신교의 경우 그 감소율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장기적인 전망은 개신교의 성장 둔화나 정체, 감소까지도 예측할 수 있다. 특히 개신교의 경우 초기 선교과정에서 젊은 층을 집중적으로 선교, ‘선택에 의한’ 개신교 인구의 증가율이 타종교에 비하여 월등히 높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선교에 의한 증가보다는 인구의 자연증가율에 의존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 점은 가족 내 구성원과 응답자의 종교일치도가 개신교의 경우 현저히 증가하고 있는 것과도 일치된다는 추계이다. 또한 세대간 신앙계승에 의한 개신교 인구 비율도 높아지고 있다는 추계이다.

1997년 갤럽연구소의 종교실태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종교인보다 비종교인이 많으며, 그 비율은 1989년보다 증가하였다.

② 개신교인이 불교인을 앞섰다.

③ 비종교인의 49.7%는 과거에 종교를 믿었던 ‘종교이탈자’이고, 종교이탈율은 3.2% 증가하였다.

④ 타종교에서 개종한 기독교인 수는 줄고, 다른 종교로 개종한 전(前) 개신교 수는 늘었다.

⑤ 비종교인은 ‘종교에 대한 무관심’(26.4%)과 ‘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22.8%), ‘정신적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18.9%) 종교를 믿지 않는다.

⑥ 남성보다는 여성 종교인이 월등히 많으며, 그 간격이 1989년보다 더욱 벌어졌다.

⑦ 25∼29세의 연령층에서 종교인이 1989년보다 큰 폭으로 감소하였다.

⑧ 가족 구성원(아버지나 어머니나 배우자)과 응답자의 종교일치도가 개신교와 천주교의 경우 뚜렷하게 증가하고 있다.

⑨ 종교인의 신앙기간이 평균적으로 증가하였다.

⑩ 신앙심의 자기평가에서 개신교인의 53.4%가 “신앙심이 매우 깊다.” 또는 “깊은 편이다.”라고 응답하여 불교나 천주교의 감소 추세와 대조적이다.

⑪ 일주일에 1회 이상 예배에 참석하고, 하루에 한 번 이상 기도하는 개신교인이 줄었다.

⑫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성경을 읽는 개신교인은 약간 늘어났다.

⑬ 개신교인의 57.7%가 십일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체육

정책

대한민국의 체육정책은 1982년 3월 체육부가 정부의 한 부처로 발족하기 전까지는 문교부가 맡아왔으며 체육정책에 따른 실질적인 관장은 대한체육회가 담당하였다.

대한체육회는 1948년 9월 3일 조선체육회가 헌장을 개정, 새로운 출범을 하였으며, 조선체육회는 1920년 7월 13일 창립되어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을 함양하여 민족정기를 살리자는 취지로 창설되었다가 1938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해산된 것을 광복되던 해 11월 26일 재건한 것이다.

1983년 대한체육회는 산하에 38개 경기단체와 6개 준회원단체를 가지고 있었으며, 체육부의 체육정책에 따라 아마추어스포츠를 종합적으로 통할하였다. 1993년 현재 대한체육회는 47개 가맹경기단체, 16개의 시 · 도지부와 13개 해외지부와 함께 국민에게 스포츠를 통한 밝고 명랑한 21세기를 열어주며 아울러 한국 스포츠의 세계화에 주력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체육정책은 1948년 제14회 런던올림픽대회에 첫 출전한 이래, 1986년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와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를 개최하기까지 학교체육 · 사회체육의 발전 강조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국가대표급 선수들의 기량을 향상시키는 이른바 엘리트스포츠에 힘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양대 국제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계기로 체육정책은 장기적이고 범국민적인 정책방향으로 수정하게 되었다.

체육부의 1989년도 계획은 이를 잘 보여주었는데, 이에 따르면 체육의 생활화, 지속적인 경기력향상, 청소년건전육성을 목표로 ① 국민생활체육의 육성, ② 우수선수 양성과 지속적 국위선양, ③ 국제체육협력의 증진, ④ 서울올림픽대회 성과의 확산, ⑤ 청소년 건전육성에 대한 범국민적 참여분위기 확산 등을 당면과제로 설정하였다.

이 가운데서 특히 국제체육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북방체육외교의 강화, 세계 한민족체육대회 개최, 남북체육교류의 실현 등을 추진하고 있다.

1999년 현재 대한민국의 체육정책은 일반 대중의 건강과 여가활동에 대한 관심과 수요 증대에 부응하여 다양한 체육활동의 여건을 조성하고, 국제경기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도록 하는 데 있다.

전자는 첫째, 생활체육 활성화에 대한 지원책이다. 즉 국민 ‘1인 1스포츠’ 생활화를 추진(생활체육 한마음리그 등)과 초보자를 위한 각종 스포츠교실의 확대(현재 5,000개→2002년 1만 개), 그리고 생활체육동호인활동 지원(현재 3만 4000클럽→2002년 5만 클럽) 등이 그것이다.

둘째, 지역단위 체육활동 공간의 확충에 있다. 읍 · 면 · 동 단위에 동네체육시설 100개 소를 설치(1998년까지 3,313개 소)하고, 청소년을 위한 거리농구대 600대를 보급(1998년까지 1,955대)하며, 시 · 군 단위에 운동장 4개, 체육관 3개, 실내빙상장 3개를 각각 건립할 예정이다.

한편 후자는 첫째 엘리트 체육의 지속적인 육성에 두고 있다. 2000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개최된 시드니올림픽에 대비하여 대표선수의 훈련을 강화하여 10위권 이내를 목표로 양궁 · 유도 · 레슬링 등 전략종목 위주로 중점적인 육성을 하였으며, 기본종목의 꿈나무 조기 발굴 및 과학적 선수관리(육상 · 수영 100명)를 통한 정예 선수의 세계적 수준의 달성에 있다.

둘째로 스포츠산업의 체계적인 육성에 있다. 이를 위해 스포츠시설업의 활성화 지원기금으로 230억 원을 조성하여 저리로 융자할 예정에 있고, 체육용기구 우수생산업체의 육성을 위하여 20억 원의 기금을 조성하여 지원 · 확대할 예정이다.

또한 프로경기 운영방식을 개선하는 등 서비스를 다양화하여 프로경기를 활성화시키는 데 주력할 예정이다. 한편으로는 경마 · 경륜 · 경정을 건전한 여가스포츠로 육성하여 국민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 주력할 것이다.

실태

1948년의 제14회 런던올림픽대회 참가 당시 국제무대에서의 경기수준을 가늠해 보았던 대한민국의 스포츠는 그 뒤 수많은 각종 국제경기 참가와 개최 등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왔으며, 서울올림픽대회를 계기로 그 경기력은 급격히 향상되었다. 이를 종목별로 보면 여자 양궁과 여자 핸드볼이 세계정상급이며, 탁구도 중국과 함께 세계정상의 자리를 다투고 있다.

복싱 · 레슬링 · 유도 등 격투기종목에 있어서도 경량급에서는 한국선수들의 수준이 세계정상에 육박하고 있지만, 체급이 무거운 중량급에서는 여전히 열세에 놓여 있다. 서울올림픽대회에서 참패를 당한 축구 · 농구 · 배구 등 구기종목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인기종목들인데, 국제무대에서는 전혀 성적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특히, 축구는 야구와 함께 본격적인 프로시대에 들어갔건만 세계정상급 수준과는 아직도 일정한 격차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배구의 경우 한국선수들의 신장이 유럽선수들보다 작기 때문에 불가항력이라는 변명을 하고 있지만, 같은 아시아권 국가인 일본과 중국이 신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몇 차례씩 세계정상을 차지하였던 실적이 있는 만큼, 한국인의 체질에 맞는 새로운 기술개발이 요구되고 있다.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종목은 육상과 수영이다. 서울올림픽대회에서 종합 4위를 차지하기는 하였지만, 스포츠의 기본 종목인 육상과 수영에서 메달은 고사하고 6위 이내의 입상권에 든 선수가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은 크나큰 부끄러움이라고 할 수 있다. 육상 · 수영과 함께 이른바 정책종목이라고 할 수 있는 체조의 개발육성을 위한 문화관광부와 대한체육회의 집중적인 진흥책이 기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전반적으로 체육진흥을 위한 투자나 과학적인 선수관리를 위해 1980년 이전보다는 상당히 치중하고 있지만 체육 선진국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축구의 경우 국민적인 관심이 대단히 높은 데도 불구하고 월드컵대회에서 번번히 16강 진입에 실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단 1승도 올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결국 선진국 수준의 과학적인 선수 육성과 관리, 그리고 그만큼의 시설투자가 미흡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1999년 현재 아직도 축구전용구장 하나 없는 현실은 이러한 측면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만 다행인 것은 2002년 한 · 일 공동주체의 월드컵이 개최되고, 전용구장이 10여 개나 건설된다는 점이다. 아울러 이와 동시에 문화관광부에서 추진하려는 21세기 엘리트 체육인 육성책이 계획대로 시행된다면 우리나라도 세계적인 스포츠강국의 대열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보건

8 · 15광복은 보건의료정책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일제하에서의 의료정책의 주요 대상은 식민통치자와 그들의 거류민이었기 때문에, 대다수 농어촌 주민, 도시의 저소득층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자선적 의료조차 실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직 전염병 예방 정도의 정책이 시행될 뿐이었다.

정책

광복과 동시에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일제시대의 관료주의적 의사경찰제(醫事警察制, medical police)는 우리에게 생소하였던 사회복지 및 후생개념이라는 의료제도로 전환되었다. 1946년 중앙행정조직에 보건의료를 전담하는 미국식 보건행정의 모형인 보건후생부가 설치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중앙정부의 조직에 사회부가 설치되고, 보건의료업무가 이에 속하게 되자 국가의 보건의료 기능은 크게 축소되었다.

이와 같은 기구 축소에 대한 의료계의 반대가 거세어지자 1949년 보건부가 독립되었다. 그러나 1955년 보건부와 사회부는 다시 보건사회부로 통합되었고, 이 행정조직이 1994년까지 지속되다가 같은 해에 그 명칭을 보건복지부로 변경하여 1999년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다. 8 · 15광복 당시 부족하였던 의료시설과 의료인력은 6 · 25전쟁 기간에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며, 전쟁 및 전후라는 특수정황 속에서 보건의료는 전염병 예방과 구료(救療)에만 치중하게 되었다.

1954∼1960년 사이에는 전화의 복구 및 경제기반의 구축, 그리고 민생고의 해결이라는 경제적 문제가 대두되었고, 따라서 보건의료에 대한 정책적 관심은 낮을 수밖에 없었다. 이 기간에 정부 재정은 외원의존도(外援依存度)가 높았는데, 특히 보건사회부의 보건예산 중 외원구성비는 1954년 68%, 1960년 52%였다. 예산면에서 보건사업의 우선순위는 나병사업이 연평균 30%, 결핵사업 18%, 급성전염병관리 3%였다.

보건의료 분야의 획기적 발전은 5 · 16군사정변 이후 본격화된 근대화과정에서 이룩되었다. 1962년부터 착수된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보건사업이 포함되어 국가계획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이로써 의료의 목적이나 철학은 환자 중심에서 지역사회 중심으로, 의료의 책임도 개인과 의료인 간의 개별적 책임에서 공공의 책임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66)의 주요 정책과제는 600여 개의 무의면(無醫面) 해소, 예방약품의 대량생산, 의약품의 국내생산 장려, 각종 전염병 예방, 결핵 및 나병 관리, 가족계획의 장려 등이었다. 특히, 이 기간에 시 · 구 · 군 행정단위로 보건소가 1개 소씩 설치 완료되었고, 인구증가억제책의 일환으로 가족계획사업이 정책적으로 채택되어 전국 보건소망을 통해 광범하게 체계적으로 실시되었다.

이어 제2차 경제개발계획기간(1967∼1971) 동안에는 보건정책의 중점을 질병의 예방 및 관리, 가족계획사업 강화, 보건의료망의 확대 등에 두었다. 가족계획과 결핵관리가 강화되고, 읍 · 면 단위에 보건지소가 확충되었다.

제3차 경제개발계획기간(1972∼1976)에는 보건의료시설의 확대와 의료인력 확보, 질병예방 및 관리 강화, 가족계획사업의 계속추진 등에 정책적 관심이 주어졌다. 이 기간에 투자면에서 농촌지역 안전수(安全水) 공급을 위한 간이상수도와 위생적 우물 설치에 높은 우선순위가 주어졌고, 정신질환자를 위한 병상이 증설되었다.

이와 같이, 1∼3차 경제개발계획기간(1962∼1976) 동안 의료자원시설과 인력이 증가하고, 각종 질병 이환율과 사망률이 저하함으로써 보건상태가 현저히 향상된 것으로 평가되었으나, 의료비의 급격한 상승, 의료자원의 도시 편중, 의료서비스의 불균형적 이용, 각종 공해 및 환경오염 등이 정책적 관심으로 대두되었다.

제4차 경제개발계획기간(1977∼1981)에는 농어촌주민을 위한 의료공급체계 구축, 주민의 생활권을 고려한 진료권(診療圈) 개념의 도입, 민간의료기관의 지방 유치, 의료인력 공급 확대, 사회보험 형태의 의료보험의 점진적 확대 등이 실시되었다. 이 기간에 농어촌 의료취약지역에 많은 병원이 건설되고, 공공 부문에서 모자보건센터가 설치되었다.

그러므로 1∼3차 경제개발계획기간에는 선언적인 정책이 제시된 데 반하여, 제4차 경제개발계획기간에는 실제적 정책이 구체화되어 시행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1978년 ‘알마아타선언’에 의한 1차보건의료의 철학과 접근방법, 그리고 2000년까지 모든 인류의 건강 달성이라는 목표는 보건정책의 주요 과제가 되었다.

제5차 경제사회발전계획(1982∼1986)에서는 그 명칭 자체의 변경에서 나타나듯 사회 부문에 대한 정책적 관심이 높아졌다. 이 기간에는 의료자원의 적정확보 및 효율성 증대, 전국보건의료망 편성, 의료전달체계 확립 등이 시도되었으며, 농어촌에 보건진료원 2,000명의 훈련 · 배치가 완료되고, 공중보건의가 읍 · 면 보건지소에 배치되어 역사상 처음으로 무의면이 완전 해소되었다.

한편, 의료의 공익성 제고가 강조되고 의료인력의 공급이 증대되며 공공보건의 기능이 강화되는 한편, 성인병에 대한 예방책이 강구되기 시작하였다.

제6차 경제사회발전계획기간(1987∼1991)에는 특히 전국민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되었고, 국민의 의료이용 및 의료자원의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현실적인 전국보건의료망 편성과 의료전달체계가 확립되었다. 또한, 농어촌 공공의료기관의 확충과 기능 강화, 민간의료기관의 지역별 균형적 분포 유도, 그리고 공중보건의의 자질향상이 시도되었다.

1990년대 말 보건복지부의 사회보장 장기발전계획안에 따르면 ① 전국민 사회보험시대의 정착, ② 국민기초생활의 보장, ③ 보편적 · 예방적 복지 서비스의 확충, ④ 사회보장 발전기반의 조성 등에 역점을 둔다고 밝히고 있다.

실태

1945∼1955년의 정치 및 경제적 혼란 속에서 대한민국의 보건정책은 전염병 예방과 구료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1961년부터 시행된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보건의료분야도 발전하게 되었다.

이 기간에 의사의 수는 13.6배, 간호사 수는 82.1배, 병상 수는 14.0배로 각각 증가하였다. 사망률은 눈에 띄게 감소되었으며 평균수명은 크게 연장되었다. 1940년 인구 1,000명당 사망률은 20.7명, 평균수명은 남자 38.4세, 여자 46.7세였다. 1985년의 사망률은 6.2%로 감소하고, 평균수명은 남자 64.9세, 여자 71.3세로 연장되었다. 그러던 것이 1995년 현재 사망률은 6.0%로 감소하고, 평균수명도 남자 69.5세, 여자 77.4세로 점점 연장되고 있다.

1960년대까지는 전염성질환이 가장 높은 사망원인이었으나, 1985년에 만성퇴행성질환과 각종 사고가 전체 사망의 3분의 2가 넘는 선진국형으로 변화한 뒤 1995년 현재는 여기에다가 각종 암이나 심혈관 질환으로 사망하는 비율이 더욱 높아져가고 있다.

그 동안 정부예산 가운데 보건비는 1% 내외로 낮았고 이에 따라 공공 부문(국 · 공립)에서의 병원투자도 몹시 낮았다. 1945년 광복 당시 전체 병상의 70%가 공공부문이었으나, 1960년에 들어와서는 전체 병상의 6.7%로 공공 부문이 낮아졌으며, 1987년에는 이 구성비가 21.2%로 낮아지더니 1996년 현재는 이 구성비도 13%로 더욱 낮아졌다. 결국, 증가하는 의료수요를 충족시키는 부담이 점차 민간 부문으로 전가되어 간 것이다.

한편, 1977년부터는 사회보험 형태의 의료보험이 실시되고 의료의 평등실현을 위한 농어촌지역에의 의료투자가 확대됨으로써 국민의 보건향상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더욱이, 1989년 7월부터 도시지역 자영업자(自營業者)를 대상으로 하는 의료보험이 실시됨으로써 전국민의료보험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의료이용 수준이 현저히 증가하였으며, 외래이용수준도 선진국에 도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소득계층간 차이도 거의 없게 되었다. 또한 21세기는 의료보험도 전국민 통합시대로 접어들어 직업 · 소득 계층간의 간극을 없앰으로써 명실공히 더불어 건강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노동

8 · 15광복 후 민주적인 노동시책이 실시되면서부터 우리나라의 노동정책이 형성, 발전되어 우여곡절을 거치기는 하였지만, 오늘날 산업경제정책의 일환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미군정은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약하는 「치안유지법」 · 「정치범처벌법」 · 「예비검속법」 등의 악법을 폐지하는 한편, 1946년 7월 23일 노동부를 설치하였다.

그 밖에도 1946년 10월 10일 ‘일반노동임금’, 1946년 10월 30일 ‘노무보호’, 1946년 12월 8일 ‘노동조정위원회설치’, 1946년 9월 18일 ‘아동노동법규’, 1946년 11월 7일 ‘최고노동시간에 대한 법령’ 등 노동관계법규를 제정하여 민주적인 노동시책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 법령은 단편성을 면하기 어려웠고 전후 혼란과 좌우투쟁 속에서 민주적 노동정책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1948년 정부수립과 더불어 노동정책의 기본방향이 정립되었다. 1948년 7월 17일 제정, 공포된 「대한민국헌법」 제17조에는 국민의 근로권을 보장하고 이와 함께 근로조건의 기준을 법률로 정할 것과 여자와 소년근로자의 특별보호를 규정하였으며, 제18조에는 근로자의 단결권 ·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과 이익균점권을 규정하여 적극적인 노동보호시책과 아울러 민주적 노동운동을 보장할 것을 국가기본시책으로 채택하였다.

또한, 「근로기준법」 · 「노동조합법」 · 「노동쟁의조정법」 · 「노동위원회법」 등 노동관계법이 1953년에 제정, 공포되어 선진국 못지않은 노동관계법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노동행정기구로는 1948년 11월 4일 대통령령으로 사회부 직제를 개정하여 노동국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법적 규정에도 불구하고 노동정책은 소극적인 사회정책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정부수립 후의 혼돈, 6 · 25전쟁, 전후경제복구 등의 과정에서 제대로 입안, 실시된 바도 없으므로, 노사관계는 전근대적인 일방적 · 타율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1961년 5 · 16군사정변 후 경제개발계획의 실시와 더불어 노동정책에는 일대전환이 왔으니, 권위주의체제하의 공업화를 추진하기 위하여 비민주적인 노동시책과 비민주적 노사관계가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노동정책은 종전의 소극적인 노동보호에서 벗어나 공업화에 필요한 인재를 기르는 적극적인 인력개발의 방향으로 정책전환을 하였다.

기업별 노조형태를 산업별로 바꾸고 1963년 8월 31일로서 보건사회부 노동국을 노동청으로 개편, 승격시켰다. 그리고 1967년 1월 16일 「직업훈련법」을 제정하여 조직적인 직업훈련의 길을 열었다. 그 밖에 직업안정조직과 그 기능강화,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의 신설, 인력의 해외진출을 적극 도모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는 신발 · 합판 · 가발 등 저임금의존적 · 단순노동집약적 공업화의 시기였으므로, 임금억제, 노동운동규제, 타율적 노사관계형성이 불가피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 조선 · 자동차 · 전자 등 숙련노동집약적 또는 중화학공업화가 추진되는 가운데 내외정세와 관련하여 경직적인 정치체제가 마련되면서 노동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1971년 12월 6일 국가안보 우선을 내세운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그 해 12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공포되었으며, 1972년 12월 17일 ‘10월유신’의 단행에 이어 유신헌법이 제정, 공포됨에 따라 노동권이 제약되었다.

이에 따라 노동관계법이 1973년 3월에 개악되었고, 특히 10 · 26사태 후인 1980년 12월 31일 더욱 개악되었다. 1970년대에 노동조건이 악화되고 노동운동이 탄압되는 가운데서 현장노동자의 쟁의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지하운동을 통한 재야노동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81년 5월 노동청이 노동부로 승격되었지만 직접개입을 주로 하는 비민주적인 노동정책에는 변함이 없었다.

노동집약적 공업화는 1970년대 후반부터 임금의 가격경쟁력 저하, 저임금개발도상국의 공업화에 의한 추격, 선진국의 보호무역주의 압력 등으로 그 한계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에 한국경제는 자본 · 기술집약적인 산업고도화단계로 전환하게 되었으며, 이 점은 국민들의 경제민주화 · 사회민주화 · 문화민주화 요구를 일으켜 ‘1987년 6 · 29선언’이라는 정치민주화선언이 나오게 하였다.

따라서 노동정책과 노사관계도 민주화 방향으로 전환되면서 무지와 통제에서 벗어난 노동자들의 각성과 노동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들의 참여 등으로 노사간의 갈등과 대립이 노정되면서 많은 노동쟁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1990년대 초기에 들어와서 우리 사회는 6 · 29선언 이후 정치 · 경제 · 사회 전반에 걸친 민주화의 추진으로 국민의 기본권이 더욱 신장되고 계층간의 격차가 줄어들고 있으나, 경제는 부동산 등 물가상승과 제조업에의 투자기피, 대외경쟁력 약화 등으로 계속 어려운 실정이었다.

1990년도의 경우 노사관계의 측면에서는 일부 대기업의 노사분규 발생에도 불구하고 노사분규 건수가 1989년 1,616건의 5분의 1 수준인 322건으로 크게 줄어들었고, 불법쟁의도 1989년 1,017건(68.5%)에서 162건(50.3%)로 감소하여 1989년 하반기부터 조성된 노사관계 안정분위기가 지속되었다.

임금인상 수준은 1989년 명목임금 인상률 21.1%(실질임금 14.5%)에서 명목임금 18.8%(실질임금 11.5%)라는 비교적 적정수준에서 타결되어 전반적인 안정화 추세를 보였다. 1991년에도 노사관계는 안정적인 국면이 지속되어 1987년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었으며, 분규양태도 온건합법화 경향을 보여주었다.

한편 3∼4년 동안 지속된 고율의 임금인상은 국가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에 부담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으며, 1988년 이후 실업률이 거의 완전고용상태인 2%대를 유지함에 따라 노동시장의 인력수급사정이 빡빡해지면서 중소제조업을 중심으로 심한 인력난을 겪었다.

또한 그 해에 발생한 원진레이온 근로자 사망사건은 직업병문제가 사회문제로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명목임금상승을 통한 근로자의 실질생활수준 향상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근로복지정책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해에는 152번째로 국제노동기구(ILO)에 가입함으로써 우리의 노동행정의 장이 국제화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국제노동기구협약 비준과 관련한 노동관계법 개정문제가 제기되었고, 이 문제는 1987년에 대폭 개정된 노동관계법 전반에 대한 개정이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발전되었다.

1992년 중 우리 경제는 점차 성장이 둔화되면서 설비투자의 위축과 중소기업의 도산이 급증하는 등 어려움을 겪은 해로서 경제성장률이 전년의 8.4%보다 크게 하락한 4.7%에 머물렀다. 다른 한편으로는 물가상승 둔화와 국제수지 적자가 점차 호전되면서 1990년∼1991년 중 크게 확대되었던 대내외 불균형이 현저히 완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고용면에서는 경제활동인구가 1991년도에 비해 2.0% 증가하고 취업자는 1.9% 증가하여 예년보다 1% 정도 낮은 수준의 증가율을 나타낸 반면, 실업률은 2.4%로서 계속 낮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노사관계는 현대자동차 분규가 마산 · 창원 지역으로 확대되는 등 다소 불안한 모습을 보였으나 1991년도에 이어 비교적 안정세를 보인 가운데, 특히 대통령선거라는 정치적 파란을 겪으면서도 산업현장은 커다란 소요 없이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분규건수도 1991년과 같은 수준을 유지하고 쟁의행위 양상도 온건합법화 추세로 나타났다.

이는 그 동안 민주화의 진전에 따라 노동운동의 기조가 투쟁적 · 이념적 노선에 대한 회의감으로 노동운동이 합리적 · 실리적 방향으로 바뀌면서 정부의 적극적인 행정지도와 경제안정을 희구하는 전국민적 공감대 형성 등이 노사관계 안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1993년도는 문민정부 출범 후 1년으로 신경제계획과 그에 따른 산업 전반의 경기 부양과 활성화로 산업현장도 이에 걸맞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노동운동의 기조가 투쟁적 · 이념적 노선에 대한 회의감으로 합리적 · 실리적 방향으로 바뀌고 고통분담을 통하여 경제를 회복해야 한다는 전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노사관계 안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이와 같은 1990년대 전반기의 노동 전반의 안정화는 기존의 노동정책방향을 문민정부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전환, 노(勞) · 사(使) · 정(政)이 함께 고통을 분담하는 가운데 노사화합과 임금안정을 기하고자 한 지속적인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였고, 또한 상당수의 근로자가 경제적인 성과에 상응하거나 그 이상의 임금이나 복지를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이르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선진국 문턱으로 들어가는 위치에 있었던 우리나라는 1990년대 중반부터 선진국가들이 대부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는 등 우리 경제전망에 대한 지나친 낙관으로 내실을 다지는 경제정책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였다.

그에 따라 수십 년 동안 정부의 보호정책으로 커온 많은 대기업들은 세계무대의 금융의 흐름에 철저한 관심을 가지지 못하였고, 자기자본비율(CIS)이 낮은 대부분의 우리 기업들은 금융의 흐름이 막힐 경우 도산이 우려되고 있었으며, 더욱이 문어발식로 엮어진 대기업과 하청업체들은 대기업이 무너질 경우 연쇄적으로 도산할 운명에 있었다. 이러한 우려가 한보사건 등으로 터져나왔고, 금융의 부실화를 미리 예견한 채권 선진국들은 서둘러 금융자본을 자국으로 회수하였다.

이러한 국제 금융자본의 해외로의 누출로 결국 우리나라는 1997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이라는 치욕적인 금융식민기간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IMF의 구제금융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온 국민의 의식으로 확산되면서 광복 이래 처음으로 노사정위원회가 결성되었다. 1999년 현재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대타협 도출과 구조조정 과정의 노사갈등 해소에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앞으로는 종합적인 실업대책의 추진이 요구되며, 여성 · 장애인 · 고령자의 고용활성화와 노사안정을 토대로 새로운 노사문화의 정착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하겠다. 한편으로는 근로자의 권익 증진과 산업재해 예방, 그리고 다각적인 노동외교 활동의 전개가 필요하며, 노동행정의 지속적인 개혁도 함께 추진될 전망이다.

대한민국의 문화

언어 · 문자

언어

우리말은 일제식민지하에서의 어문말살정책으로 한때 수난을 겪기도 하였으나 광복과 더불어 제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공용어로 쓰였던 일본어로부터 받은 영향은 이후 상당한 기간이 흐른 뒤에야 청산될 수 있었다. 이 일본어 잔재의 청산작업은 광복 이후 전개된 ‘우리말 도로찾기운동’에서 비롯되어 최근까지 줄기차게 진행되고 있다.

그리하여 광복 이후 상당한 기간에 이르기까지 널리 쓰이던 일본어 계통의 어휘가 이제는 고유어로 대체되어 쓰이고 있다. ‘벤토 · 우동 · 야키만두’ 등이 한때 널리 쓰였으나 이제는 ‘도시락 · 가락국수 · 군만두’ 등으로 바뀌어 쓰이는 것이 그 예이다. 이러한 ‘우리말 도로찾기운동’은 한자어계 어휘에까지 파급되었는데, ‘전염병 · 성대 · 삼각형’ 등이 각기 ‘돌림병 · 목청 · 세모꼴’ 등으로 쓰임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는 반대로 영어를 중심으로 한 서구어의 차용은 1960년대 이후의 급격한 산업화 · 근대화와 더불어 날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새로운 문물 · 기술 · 제도 등의 도입과 유관된 것으로서, 현재 우리말에는 ‘호텔 · 텔레비전 · 프로그램 · 밀크 · 햄 · 스토리 · 플롯’ 등 수많은 서구어 계통의 차용어가 들어와 있다.

한편, 8 · 15광복 이후 뜻하지 않았던 남북분단과 뒤이어 발발한 6 · 25전쟁을 전후로 하여 각지의 사람들이 피난 이동을 하게 된 결과, 언어의 대이동 · 대교류가 초래되어 ‘서울표준말’이 그 세력을 잃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1960년대 이후 근대화정책의 추진으로 많은 농촌인구가 대도시인 서울로 흘러들어옴에 따라 더욱 심각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초 · 중 · 고등의 각급 교육기관에서의 표준어 교육, 그리고 각종 공공기관의 표준어 사용 등이 확산됨에 따라 표준어의 영향이 각 지역방언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각 지방방언의 고유한 특성이 점차 퇴색해 가는, 즉 각 지방방언 사이의 혼효현상(混淆現象)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광복 이후의 언어상황을 기술하면서 특히 강조되어야 할 사항은 50여 년에 이르는 한반도의 남북분단에 의하여 남북한의 언어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최대의 비극인 분단상황이 고착화되면 될수록 남북한 언어간의 이질성은 심화되고 말 것인즉, 민족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언어의 이질화를 막기 위해서라도 분단상황의 극복은 우리 시대의 막중한 과제가 된다.

문자

우리 민족은 고유의 문자가 없이 중국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사용하는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러나 15세기 중반 세종의 명에 의하여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음소문자인 훈민정음이 창제됨에 따라 우리의 말을 우리글로 표기할 수 있게 되었다. 한글은 배우고 쓰기에 편한 음소문자로서 오늘날 이 한글의 사용과 함께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문맹률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도 우리의 문자생활은 여전히 한문에 의지하여 왔고, 한글은 부녀자나 서리 계층에서 주로 사용되어 겨우 명맥을 이어왔다. 그러다가 대한제국 때 민족의식의 대두와 함께 점차 한자 · 한문 중심의 표기생활에서 벗어나 한글과 국문 중심의 표기생활로 바꿀 것이 강조되었으나, 일제식민지하에서 한글 사용은 커녕 우리말조차 사용하지 못하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정부의 주요 어문정책 중 하나로서 한글 중심의 표기생활이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글전용정책은 민간 및 학술단체 등의 끈질긴 반대에 부닥쳐 철저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으나,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한글세대’가 증가되었고, 그리하여 오늘날은 각종 공문서, 서적, 문학작품, 신문 등에서 점차 한글전용의 표기가 확산되어 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종전의 문어체 문장들이 구어체 문장으로 바뀌게 되는 변화를 보인 것도 문자생활에서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한편, 우리말의 정서법은 1933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한 이래 몇 차례의 부분적인 개정을 거쳐 오늘날까지 그 맥락이 이어지고, 1988년 「한글맞춤법」 및 「표준어규정」을 개정하였으며, 1990년 「표준어모음」을 마련하였다. 이 개정의 특색이 ‘현실음 치중’이라 하지만 어법 · 형태주의로 정돈된 부분이 많음을 볼 수 있다.

최근 타자기 · 컴퓨터 등을 통한 한글 표기의 기계화작업이 이루어져 신속한 정보교환에 이바지하고 있다. 한편, 「외래어표기법」은 1986년에 개정되었으며, 1992년과 1995년에 동유럽권개 군및 북유럽권의 외래어표기법이 추가로 발표되었다.

학술 · 사상

광복은 학문과 사상활동에서 두 가지 과제를 제기하였다. 그 하나는 일제가 남긴 고등교육시설을 어떻게 재건, 발전시키느냐 하는 문제였으며, 다른 하나는 조국이 분단되어 가는 현실에서 어떻게 해서 정치가치를 확립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대학교육제도의 확립이라는 문교행정정책으로 급속도로 양적 성장을 함으로써 해결하였다.

하지만 두 번째는 미소 양 초강국의 이데올로기 갈등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38선 이남에서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주도적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동시에 이북에서는 소련식 공산주의가 그대로 이식됨으로써 정치가치와 이념은 남북한 다 같이 종속성을 면하지 못하는 형태로 정착되었다. 이른바 좌우대립이라는 광복 후의 현상도 미소대립을 배경에 깔고 있었던 것이다.

6 · 25전쟁을 통해서 좌우대립이 청산되고 일방적으로 반공이데올로기가 성장하는 조건이 전개됨으로써 학문세계에서도 구미학문이 일방적으로 학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북한에서도 제도적으로 사회주의 일색의 학문과 사상만을 허용하였다. 이리하여 한반도에서는 학문과 사상도 완전히 두 개의 세계로 분열,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학문과 사상은 국가체제를 부정하지 않는 한 원칙적으로 지원을 받고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유세계의 여러 나라들과의 학문 및 사상의 교류가 6 · 25전쟁 이후 본격화됨으로써 대한민국의 학문과 사상은 국제적 맥락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때로는 국제조류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는다는 의견까지 등장하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에 접어들면서 학문과 사상에 있어서의 자기발견시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우선, 학계에서 학문연구에 있어서의 특수성과 보편성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논쟁은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의 현실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과거지향적 민족주의와 구미의 학문논리를 추종하는 보편주의 논리 사이의 논쟁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여운만을 남긴 채 끝났다.

그러나 유신체제가 끝난 뒤 1980년대에는 젊은 세대가 등장하고 학문과 사상적 분위기에 일대변화가 발생하였다. 그 특징은 한마디로 말해서 학문과 사상세계에 있어서 제도권 학문사상세계와 체제비판운동의 학문 · 사상 운동권이 형성되어 한국의 지식인 세계는 유래 없는 격동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대립은 냉전의 몰락으로 인하여 상호 지양되었다.

각 분야별 학문연구 성향이나 수준은 구체적으로 언급되기 어렵지만, 학문연구 동향을 반영하는 최근의 학회활동을 보면 아주 활발하다. 1988년 12월 말까지 대한민국의 학회는 총 513개이었고, 이 513개 학회는 인문 분야 133개, 사회과학 112개, 의약학 108개, 공학 53개, 이학 51개, 농수산 43개, 예체능 13개이었는데, 1996년 말 현재는 821개이다. 이 821개 학회는 인문 분야 229개, 사회과학 224개, 의약학 93개, 공학 93개, 이학 59개, 농수해 60개, 예체능 43개인데, 각각 1980 · 1990년대에 들어와서 대폭 증가되었다.

특히, 학회발족 경향이 각 학문영역별 또는 연구관심별로 세분화되고 있는 특색을 보이고 있다. 가령, 인사법학회(人事法學會) · 정치외교사학회(政治外交史學會) · 잡지학회 · 농기계학회 · 태평양지역학회 · 국토계획학회 · 굿학회 · 분석심리학회 · 외상학회(外傷學會) · 생산성학회 등이다. 그런데 학회의 75%가 서울에 집중되어 있으며 학회활동의 기초가 되는 연구기금은 대부분 취약한 편이다.

한편, 외국학계와의 교류를 보면 1980년대는 181개 학회가 일본과 교류하고 있었고, 100개 학회가 미국과 교류를 하였을 뿐 외국과의 교류가 없었던 학회도 절반 이상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외국학계와의 교류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과학기술

1945년 광복 당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의 수준은 의학을 제외하고는 1910년대에 비해서 본질적으로 나아진 것이 없는 형편이었다. 거기다가 국토분단, 훈련된 과학기술자의 부족과 시설의 미비 등으로 실험 및 연구활동은 부진을 거듭할 뿐이었으며 과학기술교육도 심한 침체를 보였다. 그나마의 과학기술능력도 남북분단의 현실 속에서 양분되고 뒤이어 일어난 6 · 25전쟁은 또다시 과학기술의 발달을 정체시켰다.

그러나 1953년 휴전 이후 점차 복구되어 1950년대 후반부터는 그 동안 관계기관에서 양성된 많은 과학기술자의 등장과 함께 외국원조에 의한 기재의 도입 · 이용으로 연구활동이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특히, 의학이나 화학 등 몇몇 분야에서는 주목할 만한 연구활동이 진행되었고,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세계적 추세에 발맞추어 초보적이나마 원자력사업도 진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959년 원자력연구소가 발족함으로써 대한민국은 근대과학이 시작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무렵 국립연구소는 원자력연구소를 비롯하여 23개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 중 대부분이 생산품 시험에 그쳤을 뿐, 연구 · 실험 분야에는 손대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 국가적 차원에서 그 개발계획을 세워 조직적으로 밀고 나가게 된 때는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된 1962년부터였다. 즉, 공업화가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국가발전계획의 일부로서 과학기술이 조직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과학기술연구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는데, 과학기술발전의 기본법이라고 할 수 있는 「과학기술진흥법」이 제정되는 한편, 이 법에 따라 1967년 과학기술정책수립 및 조정지원 담당 중앙관서로서 ‘과학기술처’가 발족되었다.

또한, 이보다 앞서 1966년 산업기술개발의 핵심체로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종래의 국립연구소들의 단점을 개선한 새로운 운영방식의 종합연구기관으로 발족되었다. 이와 더불어 1960년을 전후한 10년 동안 약 200여 명이 구미유학을 떠남으로써 수십 년 동안 계속된 과학기술의 간접학습단계를 넘어섰고, 1970년대 이후 이들이 귀국하여 대한민국의 과학기술계를 급속히 성장시키면서 이끌어왔다.

한편,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과학기술 개발방향을 ① 과학기술 발전의 기반 구축, ② 산업기술의 전략적 개발, ③ 과학기술 풍토조성을 위한 종합적인 실천방안을 설정하고, 발전 기반의 구축을 위하여 「기술개발촉진법」(1972) · 「기술용역육성법」(1972) · 「특정연구기관육성법」(1973) · 「국가기술자격법」(1973) 등 각종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또한, 공업화과정에서 수요가 급증하는 과학자 · 기술자 · 기능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정부는 장기적인 인력수급계획의 수립, 해외두뇌 유치, 특수 이공계대학원인 한국과학원(韓國科學院)의 설립, 이공계 대학교육의 강화, 실업교육과 직업훈련의 확충, 기능대학의 설립 등 다각적인 인력양성과 활용시책을 펼쳐왔다.

1960년대 이후 공업화의 추진에 의한 경제발전에 따라, 오늘날 그와 관련한 기계 · 조선 · 자동차 · 화학 · 전자 · 섬유 · 건설 · 농업 등 일반 산업기술이 크게 향상되었다.

또한, 최근들어 컴퓨터 · 반도체 · 통신 등 정보산업기술과 정밀화학 · 생명공학 · 신소재 등 재료관련기술, 설계 · 기계자동화 등 산업요소기술, 그리고 원자력 등의 에너지 · 자원기술 등 각 분야에서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 나아가서는 해양 · 우주 · 항공 등 대형복합기술도 부분적으로 보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이러한 과학기술들이 모방의 단계를 크게 벗어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과학기술계는 그 동안의 공업화과정에서 선진기술의 도입 · 소화 · 개량에만 주력함에 따라 기초연구의 발전에 큰 비중을 두지 못하였다. 또한,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 대한민국의 산업발전상을 전망할 때 아직도 국제수준급의 고급 과학두뇌와 숙련된 기능인력의 대량확보는 긴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과학기술처는 1997년 ‘과학기술 혁신에 관한 특별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으며, 1997년을 ‘과학대중화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과학기술에 대한 범국민적 이해 확산과 사회적 수용을 통하여 과학기술 혁신의 체계적인 기반 조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과학기술처는 또한 연구기반 및 과학기술 경쟁력을 강화하고 21세기 고도지식 · 정보사회를 선도하기 위하여 1998년도 과학기술정보화 촉진 시행계획을 추진하였다.

과학기술 데이터베이스(DB)를 1998년 500만 건, 2002년까지 1000만 건을 구축하고 연구전산망을 고도화(45Mbps∼155Mbps)하여 연구기관 및 연구인력이 필요한 정보를 시 · 공간의 제약 없이 제공하며, 고가의 첨단장비를 공동 활용할 수 있는 원격공동연구 및 실험시스템을 개발하여 1998년 시험적으로 서비스하였다.

언론 · 출판

광복 이후 지금까지 언론이 걸어온 길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언론이 통치행위의 한 방식으로서 정책화되어 온 경우 그것은 강한 정치적 성격을 띠어 정체(政體)의 변천과 깊은 관련을 맺게 마련이다.

정책

언론이 제반 법률에 의거하여 규제되었던 정책내용을 시기별로 살펴보기로 한다. ① 제1기(미군정기, 1945.8.∼1948.8.):광복을 맞이하여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 당국이 언론자유를 선포하고 「출판법」 등의 언론단속법령을 즉시로 철폐함에 따라 우리 언론은 사상 처음으로 최대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특히, 군정법령 제19호(1945.10.30.)에 따라 정기간행물 및 출판의 등록제가 이루어지면서 언론은 더더욱 법적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무질서한 각종 정기간행물의 범람과 신문용지난, 특히 좌익언론의 발호에 대한 조치로 군정법령 제88호(1946.5.29.)가 공포되면서 등록제가 다시 허가제로 바뀜에 따라 모처럼 꽃을 피웠던 언론자유는 위축되었다.

② 제2기(제1공화국기, 1948.8.∼1960.4.):건국 이후부터 1960년 4 · 19혁명 이전까지의 언론정책은 반공이라는 국시(國是) 밑에서 이루어졌다. 「국가보안법」(1948.11.)과 이어 시달된 언론에 관한 7개 항의 단속방침에 따라 좌익언론은 완전히 봉쇄되었다.

그러나 이 법제들은 단순히 좌익언론뿐만 아니라 정치적 반대자나 비판자에 대해서도 적용되어 언론의 자유는 위축되었다. 더욱이, 이미 그 효력을 상실한 것으로 알려졌던 일제의 「광무신문지법」과 미군정법령 제88호가 정부측의 자의적인 운용에 따라 통제의 근거로 이용되었으며, 또한 신국가보안법(1958.12.24.)에 따라 언론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화되었다.

③ 제3기(제2공화국기, 1960.4.∼1961.5.):4 · 19혁명에 의하여 얻어진 자유의 물결이 언론 분야에도 밀려와 언론의 자유방임정책이 초래되었다. 특히, 「신문 등 정당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1960.7.1.)의 공포에 따라 정기간행물의 등록제가 실시되면서 무제한적인 발행의 자유가 이루어졌다. 또한, 앞서 제정된 헌법(1960.6.15.)에서도 언론자유에 대한 법률유보조항을 삭제함으로써 언론의 절대적 자유를 명시하였다.

④ 제4기(제3공화국기, 1961.5.∼1972.10.):5 · 16군사정변으로 등장한 혁명위원회는 곧 군사계엄령 포고 제1호를 통하여 사전검열제를 실시하였으며, 포고 제11호와 공보부령 제1호를 공포하여 언론기관의 대폭적인 정비를 단행하였다. 새 헌법(1962.12.26.)에는 언론의 책임조항이 새롭게 삽입되었으며, 「반공법」에도 언론관계조항을 두어 언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제3공화국에 들어와서도 언론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면서 언론통제정책이 계속되어 제3공화국 전후 시기에 이에 대한 제반 법률이 제정되었다. 「신문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1963.12.12.)을 통하여 신문 · 통신 등의 등록요건을 엄격히 제한하였으며, 방송에 대해서는 「전파관리법」(1961.12.30.)과 「방송법」(1963.12.16.)을 제정함으로써 허가와 신고의 이중적인 통제를 가하였다. 또한, 「출판사 및 인쇄소의 등록에 관한 법률」(1961.12.30.)을 제정하여 그 등록요건을 강력히 규제하였다.

⑤ 제5기(제4공화국기, 1972.10.∼1981.2.):1972년 10월 17일 전국에 걸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개막된 유신시대에 와서는 언론에 대한 통제가 더욱 강화되어 언론이 체제에 편입해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유신헌법(1972.12.27.)에서는 그 전에 명문화되어 있던 언론의 허가제불인정이라는 표현이 삭제되었고,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는 조항도 없어졌다.

또한, 필요한 경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의 제정도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언론의 자유가 실질적으로 크게 위축되는 암흑기를 맞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엄격한 언론통제를 위하여 수많은 법률안이 제정, 이용되었는데, 그 중 특히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1974.1.8.)와 제9호(1975.5.13.)는 일체의 반정부적인 비판과 보도, 출판을 금지하는 내용으로 언론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⑥ 제6기(제5공화국기, 1981.2.∼1988.2.):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뒤 각 언론기관별로 단행된 언론인 정리작업에 따라 수많은 언론인들이 언론계를 떠났으며, 시설미비와 부실경영이라는 이유로 172종의 정기간행물과 617개의 출판사의 등록이 취소되는 등 실제적인 언론통제가 이루어졌다.

더욱이, 같은 해 12월 통신사의 통합과 단일화, 지방지의 1도 1사 원칙, 신문과 방송의 공영화, 중앙 일간지의 정비 및 재편 등을 골자로 한 대폭적인 언론통폐합이 단행됨에 따라 언론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의 법적 근거로 언론에 관한 종래의 제반 법률들을 단일체제로 개편한 「언론기본법」(1980.12.31.)이 제정되었다. 이러한 제반 조치들은 언론의 자유보장보다는 공공적 책임성을 강조한 것으로, 다양성이 배제된 하나의 유기적인 틀 속에서 운용되는 언론현상을 낳아 결과적으로 일원화된 언론통제라는 악영향을 초래하였다.

⑦ 제7기(제6공화국기, 1988.2.∼1997.12.31. 현재):제5공화국 말 민주화의 열풍이 거세게 불면서 기존의 언론구조 및 「언론기본법」의 해악적 요소에 대한 비판이 강해짐에 따라 1987년 11월 제137회 정기국회는 「언론기본법」을 폐지하고 「정기간행물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 「방송법」 · 「한국방송공사개정법률안」 등 4개 언론관계법을 통과시킴으로써 새로운 언론정책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폐지된 「언론기본법」은 신문 · 통신 · 방송 등의 모든 언론매체를 대상으로 하는 언론에 관한 단일법이었으나 새로 제정된 법은 인쇄매체(정기간행물의 등록에 관한 법)와 전파매체(방송법)를 분리하고 언론기본법 가운데 독소조항으로 비판받았던 정기간행물의 등록이나 취소에 관한 규정을 크게 완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반 법률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여전히 부당한 언론통제가 허용되고 있으며, 공공성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또한, 기존의 「출판사 및 인쇄소의 등록에 관한 법률」에 대해서도 등록 및 등록취소의 엄격성과 임의성에 대한 비판이 가해지면서 그 개정이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다.

실태

언론매체는 인쇄와 전파라는 양대 매체로 구분할 수 있다. 오랜 전통을 지닌 인쇄매체는 신문을 비롯하여 잡지 출판 등이 있고, 전파매체는 라디오와 TV가 있는데 기술의 발달로 기존의 지상파 방송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나 새로운 방식의 유선방송과 위성방송도 실시되고 있다. 이들 매체는 밤낮으로 활발히 언론활동을 전개함으로써 범세계적인 소식과 정보를 수집하고 편집하여 전국민에게 제공하고 있다. 광복 후 현재까지의 주요 언론 매체의 실태를 앞에서 논의한 시기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문

8 · 15광복 후 최초로 『조선인민보(朝鮮人民報)』가 창간된 뒤 건국 전까지 약 200여 종의 신문이 생겼으며, 이 중 좌익지는 40여 종 남짓으로 주로 광복 직후에 나타났다. 제1공화국 기간에는 엄격한 언론통제 때문에 많은 신문이 등장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4 · 19혁명 직전까지 등록된 신문을 보면 일간지 41종, 주간지 136종에 불과하였으나, 제2공화국기에 들어와 급증, 5 · 16군사정변 직전 무렵에는 일간지 115종, 주간지 487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5 · 16군사정변 직후 언론정비작업에 따라 일간지 9종, 주간지 32종으로 대폭 감소하였으며, 그 뒤 1962년을 최저선으로 몇 개의 새로운 신문이 늘어나 1971년 말 일간지 44종, 주간지 100종으로 되었다. 1972년과 1973년 1도 1사 주의에 따라 통폐합과 자진폐간한 신문들이 나타나 1973년 말 일간지 37종, 주간지 112종으로 되었다. 그 뒤 1980년 대폭적인 언론통폐합을 맞이하면서 36종의 일간지는 29종으로, 121종의 주간지는 97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1988년에 들어오면서 언론통폐합 당시 사라진 신문의 복간과 새로운 창간작업이 일어나 1988년에 일간신문은개 군28개가 되어 새로운 자유경쟁시대를 맞았다.

그 뒤 꾸준히 늘어나 1997년 현재 전국에서 발간되는 일간신문은 60여 개나 된다. 이 가운데 중앙에서 발간되는 것이 21개이고, 지방에서 발간되는 것이 39개이다. 중앙지 중에서 10개가 종합지이고, 경제지 또는 특수지 6, 스포츠신문 3, 영어신문이 2개이다. 지방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39개는 모두 종합지 성격을 띤다.

통신

광복 후 최초로 해방통신사(解放通信社)가 생긴 뒤 많은 통신사들이 생기고 폐쇄되어 오다가 4 · 19혁명 이후 언론을 통제하던 많은 법령이 폐지되자, 그 전까지 14개이던 통신사가 1년 사이에 무려 308개로 급증하였다.

그러나 5 · 16군사정변 이후 시설기준령이 내려지자 305개 사가 정리되어 11개 사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 뒤 1971년 말 8개 사로 줄어들었다가 1980년 말 언론통폐합이 이루어지면서 종합통신사인 연합통신(聯合通信)과 전문특수통신사인 내외통신(內外通信) 등의 2개 사로 운영되었다. 이 체제는 1997년 현재까지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방송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우리나라의 유일한 방송국이었던 경성중앙방송국이 미군정청 공보부에 예속되어 운영되어 오다가 건국이 되면서 KBS방송국은 공보처 산하의 독립기관이 되었다.

1954년까지 우리나라의 모든 방송은 국영으로 운영되다가 1954년 12월 민간방송인 기독교중앙방송국(CBS)이 개국되면서 민간방송시대가 열리고 1959년 4월 부산문화방송국이 창설되면서 본격적인 상업방송시대가 개막되었다. 그 뒤 1961년 12월 한국문화방송(MBC), 1963년 4월 동아방송국(DBS), 1964년 5월 라디오서울(RSB)이 등장함에 따라 상업방송의 열기는 더해갔다.

한편 텔레비전의 경우, 최초의 방송국은 1956년 5월에 개국된 HLKZ―TV였으나 화재로 인하여 방송이 중단되고 말았다. 본격적인 텔레비전방송시대는 1961년 12월 서울텔레비전방송국(KBS · TV)의 개국과 함께 시작되어, 1964년 동양텔레비전방송주식회사(TBC · TV), 1966년 한국문화방송주식회사(MBC · TV)가 개국되며 3대 텔레비전방송시대로 돌입하였다.

그러나 1980년 12월 언론통폐합에 따라 종래의 공영방송과 상업방송으로 이원화되었던 방송구조가 공익 우선의 공영방송체제로 전환되어 KBS와 MBC의 2대 방송망으로 재편성되었다. 그 밖에 특수라디오방송으로 기독교방송국 등 3개 방송만 남게 되었다.

1988년이 되면서 언론의 새로운 부흥시대를 맞게 되어 중파방송국으로 천주교의 평화방송국, 불교의 불교방송국 등 종교방송이, FM방송으로 기상방송국(중앙기상대) · 교통방송국(서울시) 등의 공공정보서비스방송국이 설립되었다.

방송사는 전국에 네트워크를 가진 공영방송인 한국방송공사(KBS)와 문화방송(MBC)의 양사가 있고, 지역 민영방송으로 SBS를 비롯하여 광주방송(KBC) · TBC · 대전방송(TJB) · KNN · 인천방송(ITV) · 울산방송(UBC) · 전주방송(JTV) · 청주방송(CJB)의 9개 국이며, 1개의 교육방송(EBS)과 특수방송으로 기독교방송(CBS) · 극동방송(FEB) · 아세아방송 · 평화방송(PBC) · 불교방송(BBS) · 교통방송(TBS) 등이 있다.

1994년부터 방송이 시작된 종합유선방송은 1997년 말 가입자가 200만을 넘었으며 프로그램 공급사(PP)가 28개, 전국에 지역방송국(SO)이 77개 운영되고 있다. 위성방송은 현재 KBS에 2개 채널을 시험방송하고 있으며, 교육방송도 2개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잡지

광복 후 최초로 『조선주보(朝鮮週報)』가 나온 이후 잡지의 홍수시대를 이루어 곧 200여 종의 잡지가 간행되었다. 그 뒤 6 · 25전쟁중 잠시 주춤하다가 다시 꾸준히 그 수가 증가하여 1960년 4 · 19혁명 직전 월간 400종, 기타간 118종, 1961년 5 · 16군사정변 직전 월간 464종, 기타간 193종이 되었다. 그러나 5 · 16군사정변 직후 정비작업을 통하여 대폭 감소되어 1961년 말 월간 178종, 기타간 83종으로 되었다.

그 뒤 점차 증가하여 1979년 말 월간 768종, 기타간 544종으로 늘어났지만 1980년 7월 정기간행물 정비작업을 통하여 1980년 말 월간 659종, 기타간 428종으로 줄어들었다. 1987년 11월 말 당시 주간 212종, 월간 1,259종, 기타간 746종을 기록하였는데, 1988년 한 해 동안에 등록된 잡지만도 무려 987종이었다.

1989년 2월 말까지 대한민국의 정기간행물은 3,520종이었다. 잡지의 경우 1997년 12월 공보처에 등록된 숫자는 주간이 698종, 월간 1,452종, 격월간 145종, 계간 322종으로 집계되는데 등록만 해두고 실제 발행되지 않는 것들도 많으며, 서울특별시를 비롯하여 각 시도에 등록된 간행물도 많아서 실질적으로 발행되고 있는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지적소유권 문제가 점차 널리 인식되고 있으며, 잡지 · 출판 · 인쇄업에 대한 시장개방 압력도 늘어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국제화 추세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도 1992년 5월부터는 국제표준연속간행물제도(ISSN)을 도입하였고, 외국의 지명도 높은 잡지들과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한 잡지들도 늘어나고 있다. 라이선스 잡지들은 외국 제명잡지의 제호와 편집기법을 도입하고 기사의 많은 분량을 전재하고 있다.

라이선스 잡지가 성공을 거둔 것은 1978년 11월부터 한국어판을 내기 시작한 『리더스 다이제스트』였다. 이 잡지는 창간호 5만7000부를 발행한 이래 매월 15%의 신장률을 보여 1년 만에 17만 부 발행에 15만 부가 판매되는 기록을 올렸다. 중앙일보는 1991년 10월에 한국판 『 뉴스위크』를 창간하였는데 1994년 5월에 15만 부를 돌파하였다.

그 뒤에 발간된 라이선스 잡지는 1987년에 창간된 『행복이 가득한 집』(미국의 Better Homes and Gardens), 1992년 8월에 창간된 『지오(GEO)』(1976년 독일에서 창간)를 비롯하여 프랑스의 패션전문지 『엘르(ELLE)』 · 『마리 끌레르(marie claire)』 · 『레이디 피가로』(경향신문사에서 발간) 등으로 점차 늘어나고 있어 잡지 시장의 국제화를 열고 있다.

출판

광복을 맞이하면서 출판계도 활기를 띠어 1946년 150여 개의 출판사가 1,000여 종에 달하는 500만 부의 도서를 출간하였다. 그러나 용지난과 좌우익의 충돌로 주춤하다가 건국 후 다시 활발해져서 1949년 847개의 출판사가 1,700여 종의 도서를 발간하였다.

6 · 25전쟁 이후 다시 공백기에 들어가 어려움을 겪다가 1958년경에 와서 전집 및 문고본과 같은 기획출판물이 등장함에 따라 소생하였으나, 5 · 16군사정변 직후 무실적 출판사에 대한 정비작업이 단행되어 그 해 연말까지 800여 개의 출판사가 등록취소를 당하였다.

그 뒤 침체와 재기의 우여곡절을 겪다가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1972년과 1980년에도 다시 한번 출판사 정비작업이 이루어져 각기 1,000여 개, 600여 개의 출판사가 등록취소를 당하였다.

1980년 2,088개의 출판사가 2만 985종 6460만 부 이상(초판 · 중판 포함)의 도서를 출간하였다. 1980년 이후 사실상 허가제로 운영된 까닭에 신규출판사의 등록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가, 1987년 10월 출판사등록 자율화조치 이후 활성화되어 1988년 4,397개의 출판사가 3만 8454종 1억 6725만 부 이상의 도서를 출간하였다.

1970년대까지만 하여도 언론의 주류는 일간신문이었으나 전파매체의 기술이 크게 발달되고 전국의 각 가정에 수신기가 거의 빠짐 없이 보급되면서 전파매체의 영향력이 급격히 증대하였다.

1997년의 대통령 선거에는 사상 처음으로 선거방송토론위원회가 구성되어 후보자들이 방송을 통하여 유권자들에게 자신의 능력과 정책을 제시하였다. 방송은 정치발전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방송매체는 국경를 뛰어넘어 시청권을 넓혀 가고 있으므로 이미 외국 위성방송이 국내에 침투하고 있어서 이에 대응할 필요성이 시급하여졌다. 또한 지상파 방송이 주류를 이루던 방송매체가 종합유선방송과 위성방송이 널리 보급되고 있어서 새로운 통합방송법의 제정이 국민 전체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기술발달로 기존의 인쇄매체와 전파매체의 장벽을 허물고 이를 통합하는 기능을 지닌 뉴미디어 또는 멀티미디어라 부르는 새로운 매체도 등장하고 있다.

언론산업의 발달에 따라 다양한 언론단체가 언론 발전을 위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언론기관단체로는 경영주들의 단체인 한국신문협회를 비롯하여 편집 · 제작 간부들로 구성된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와 일선 기자들의 한국기자협회가 있고,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은 신문 · 통신 · 방송사 종업원들의 사별 단위노조가 연합체를 구성한 기구이다.

그 밖에도 방송위원회, 종합유선방송위원회, 언론피해를 구제하는 법정 정치기구인 언론중재위원회를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언론전문단체 또는 친목단체와 언론재단이 있다.

전국의 60여 개 대학에 신문방송학과 또는 광고홍보, 출판 등의 언론 관련학과가 설치되어 있고, 언론관련 전문대학원을 설치한 대학도 7개나 된다.

예술

문학

1945년 8 · 15광복은 잃었던 모국어를 되찾게 해주고 자유의 지평을 열어 아무런 제약 없이 우리의 글과 말로써 표현하고 제시할 수 있는 자유를 확보해 주었다. 바야흐로 우리나라의 문학은 ‘해방문학’의 시기를 맞아 민족적 자각과 함께 우리의 문학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문인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이 시기에는 각종 문예지와 종합지 등이 쏟아져 나왔는데, 『백민(白民)』 · 『신문예(新文藝)』 · 『대조(大潮)』 · 『문예(文藝)』 · 『예술조선(藝術朝鮮)』 · 『신세대(新世代)』 · 『새한민보』 · 『신문학(新文學)』 · 『우리문학』 · 『인민』 · 『대중』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38선을 경계로 한 남북분단은 광복과 건국기의 문학마저 이념적으로 대립시켜 우리 문단은 좌익문학과 우익문학으로 분열되었다. 1946년 좌익계열이 ‘조선문학가동맹’을 발족시킨 데 대하여 우익계열에서는 ‘조선문필가협회’ 및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여 좌우익 문학단체가 양립하였고, 이념의 갈등이 문학논쟁으로 나타나서 김동리(金東里) · 조연현(趙演鉉) 등 순수문학파와 김동석(金東錫) 등 프로문학파와의 논쟁이 매우 치열하였다.

그 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의식에 입각하였던 좌익문인은 사라지고 순수문학이 한국문학의 주류를 형성하였으나 곧 세력다툼으로 분열, 조선중앙문화협회와 청년문학가협회가 대립하였다. 이는 1920년대 등장한 선배들과 일제 말에 신인으로 등장한 청년문인들과의 세대적인 문단대립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유치환(柳致環) · 서정주(徐廷柱) · 박두진(朴斗鎭) · 조지훈(趙芝薰) · 박목월(朴木月) 등이 시의 순수성을 고수하면서 광복 후의 시단을 다졌으며, 채만식(蔡萬植) · 김동리 · 황순원(黃順元) · 염상섭(廉想涉) · 계용묵(桂鎔默) 등이 특히 많은 활동을 하였다. 몇몇 순수작가를 제외한 이들의 작품에는 당시의 사회적 혼란, 남북분단의 현실, 그리고 가난한 생활의 모습을 표현되고 있었다.

이 밖에 이병기(李秉岐) · 이은상(李殷相)을 필두로 한 현대시조문학과 유치진(柳致眞) · 오영진(吳泳鎭) 등의 희곡문학이 정립기를 맞았으나 수필 · 아동 · 번역문학 등은 대체로 부진하였다.

그 뒤 6 · 25전쟁을 거치면서 1950년대의 문학은 이러한 민족의 비극을 반영하면서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때부터 1950년대 말까지의 문학은 주로 ‘전쟁문학’에 포함되며, 특히 1953년 휴전 후의 문학을 ‘전후문학’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문학은 주로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를 비롯한 종군문인들에 의하여 주도된 전쟁참여문학의 형태로 전개되었는데, 이것이 전쟁 전의 순수문학과 다른 점은 해방문단에 있어서의 좌우익의 문제가 주로 이념적 논쟁형식으로만 나타난 데 대하여, 전쟁 당시와 그 뒤의 문학은 실제로 전쟁의 비참한 양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나타난 점이다.

장용학(張龍鶴)의 「요한시집」 · 「상립신화(喪笠新話)」 · 「현대의 야(野)」, 이범선(李範宣)의 「학마을 사람들」, 하근찬(河瑾燦)의 「수난이대(受難二代)」, 조지훈의 시 「풍류병영(風流兵營)」, 김동리의 「밀다원시대(密茶苑時代)」 및 「흥남철수」, 강용준(姜龍俊)의 「철조망」, 황순원의 「학」, 안수길(安壽吉)의 「제3인간형」 등은 모두 동족상잔의 참상을 표출한 작품들이다.

한편, 1954년 예술원(藝術院)이 발족하여 광복 후의 혼란과 6 · 25전쟁의 비극을 딛고 문학은 새출발을 하게 되었으며, 『문예(文藝)』를 비롯하여 『현대문학』 · 『자유문학』 · 『사상계』 · 『문학예술』 등 각종 문예지가 출현하여 신인들을 많이 배출하였고, 그 결과 문단은 양적으로 풍요로워졌으며 작품에 있어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이게 되었다. 또한, 시조문학 · 평론문학 · 희곡문학 및 수필문학 등이 부흥기를 맞이하여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4 · 19혁명이라는 정치적 상황을 겪으면서 현실참여의 문제가 문단에 대두되어, 현실참여문학론이 소설이나 비평문학 분야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시에 있어서는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순수론과 참여론이 심각하게 논의되었다. 비록, 이 두 논의가 어떤 결말을 보여준 것은 아니지만, 당시 대한민국 문학에 대한 반성과 자각의 계기를 형성하게 되어 중요한 시대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또한, 1962년 『사상계』는 ‘전통논의’를 전개하여 반성 없이 흘러온 우리 문학의 전통문제를 근본적으로 논의할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1960년대 말부터는 전통적 서정과 현실참여의 방향이 전환기적 요소를 이루면서 범문단적 양상으로 확대되었고, 특히 현실참여문학운동은 반체제사상과 결탁되어 강력한 세력으로 번져갔다.

이 같은 조류는 백낙청(白樂晴) · 염무웅(廉武雄) · 구중서(具仲書) 등에 의하여 그 운동이 확대되고, 시인 김수영(金洙暎) · 신동엽(申東曄)에서 김규동(金奎東) · 신경림(申庚林) 등으로 이어지면서 1970년대 이후까지 각계로 확산되었다. 그러므로 1960년대 및 1970년대까지의 문학의 주류는 참여문학이 되면서 계속 순수문학과의 논쟁이 거듭된 셈이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각 문예지의 추천제와 신문의 신춘문예를 통하여 유능한 신인들이 배출되어 문학의 황금기를 연상할 만큼 활발한 작품활동이 이루어졌다. 시에 있어서는 『60년대사화집』 · 『현대시』 · 『현실』 · 『시단』 · 『여류시』 · 『시와 시론』 · 『신춘시』 등 많은 동인지가 쏟아져 나와 시작활동이 활발하였고, 시의 난해성문제와 더불어 시론(詩論)이 비판적으로 대두되었다.

또한,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토착어의 구사가 현저해졌으며, 김종문(金宗文)의 「서울 · 베트남의 시초(詩抄)」, 김해성(金海星)의 「영산강」, 신동엽의 「금강」 등 장시(長詩)가 등장하였고, 시집 출판붐이 일어났다.

1980년대에는 사회상황을 반영하는 민중시 · 해체시도 등장하고 있다. 1990년대에는 1960년 이후 출생한 ‘신세대’가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우리 문학사에서 중산층적 감각과 교양으로 자라난 첫 세대로서 이전의 궁핍을 체험한 세대와는 확연한 차별성을 지닌다.

한편, 소설에 있어서는 과거와는 달리 뚜렷한 흐름이 드러나지 않고 주제와 표현이 다양성을 보이는 등 극도의 개별화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또 하나의 특징으로는, 장편소설이 양적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김의정(金義貞)의 「인간에의 길」, 김용성(金容誠)의 「잃은 자와 찾은 자」, 강석근(姜錫根)의 「한국인」 등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1960년대 이후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한 작가들로는 남정현(南廷賢) · 천승세(千勝世) · 박용숙(朴容淑) · 송상옥(宋相玉) · 강용준(姜龍俊) · 김의정 · 김용성 · 유현종(劉賢鍾) · 김승옥(金承鈺) · 정을병(鄭乙炳) · 서정인(徐廷仁) 등이 있으며, 이 밖에도 이청준(李淸俊) · 이문구(李文求) · 신상웅(辛相雄) · 최인호(崔仁浩) · 황석영(黃晳暎) · 오찬식(吳贊植) · 박완서(朴婉緖) · 조해일(趙海一) 등이 1980년대에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박경리(朴景利)의 「토지」와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趙廷來)의 「태백산맥」 등 대하소설이 출간되어 문학의 대중화에 기여하였으나 1990년대에는 신세대적인 감수성이 번득이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통하여 세대교체가 논의될 뿐 대작은 나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1960년대 이후는 시조문학 · 수필문학 · 희곡문학 등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향상되었으며, 아동문학과 번역문학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문인들은 공식적으로는 약 2,000여 명에 달하는데, 문단에 등록되지 않은 문인들을 더할 경우 그 총수는 더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미술

광복 후 미술계는 일제하 식민지잔재의 불식과 독립국으로서의 민족미술의 재건이라는 커다란 쟁점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군정 3년 동안 좌 · 우세력의 격렬한 대립으로 미술계도 1945년 10월의 ‘해방기념전’ 이후 좌 · 우익의 미술단체로 갈려 치열한 이데올로기논쟁으로 혼란을 거듭하였다.

정부수립 전인 1947년 이봉상(李鳳商) · 장발(張勃) · 김인승(金仁承) 등 온건한 사실파의 미술문화협회를 비롯하여 새로운 조형미술을 지향하는 신사실파(新寫實派)의 미술단체 등 여러 조직이 발족하였으나, 정부수립 후인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國展)가 창설되어 사실파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으며, 조선미술전람회(약칭 鮮展) 이후 전국적 규모의 전시체제가 마련되었다.

1950년 6 · 25전쟁은 납북 · 월북 또는 월남으로 인해 남북작가의 인적 구성에 변화를 야기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국제적인 현대미술과의 접촉이 활발해져 추상미술이 급속하게 보급되었다. 또한, 국제적인 미술정보가 일본을 거치지 않고 직접 들어오게 되어 새로운 조형이념의 수용이 가능해졌다.

한편, 대한미술협회와 한국미술협회로 양분된 세력권 형성에 초연하려는 일부 중견작가들에 의한 순수한 조형이념의 결속과, 광복 후 성장한 신진작가들에 의한 기성 미학에의 도전의식이 1950년대 후반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모던아트협회 · 창작미협 · 현대미협 · 신조형파 등이 1957년 분명한 조형이념 아래 결성되었다.

각 유파의 단체전 · 그룹전 · 개인전 등이 활발해졌으며, 프랑스 · 미국 등지로 건너가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하는 것이 하나의 풍조처럼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각 대학의 미술교육도 궤도에 올라 더욱 활기를 띠게 되는 한편, 신진작가에 의하여 세력화된 국전 반대의 움직임은 이른바 ‘현대미술운동’으로 확대, 심화되어 갔다.

이 시기의 주요 그룹전으로는 ‘모던아트전’ · ‘창작미술전’ · ‘신조형파전’ 등을 꼽을 수 있고 , ‘현대작가초대전(조선일보사 주최)’은 개별적인 그룹활동과 개인활동을 하나의 공동의식으로 묶어주는 추진체로서 차차 현대미술운동의 주축을 형성하였다.

그 결과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비정형의 추상미술이 현대미술의 주류로 부상하여, ‘현대작가초대전’을 비롯하여 ‘문화자유초대전’ · ‘신인예술상미술전’ · ‘액추얼전’ 등이 성행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비정형이라는 특정 경향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형식을 이루게 되었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극복방법이 1967년과 1968년을 통하여 모색되었으니, ‘청년작가연립전’이 그것이었다. 또한, 1968년부터 국전이 미술계의 전체적인 경향을 참작하여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구상과 비구상의 두 경향으로 분리되어 실시된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1970년대 후반 전시대적인 정신을 청산하고 회화를 평면으로 되돌려보려는 논리의 추구가 주요 관심사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한편,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전이 폐지되었는데, 이는 상업화랑의 증가, 민전(民展)의 대두, 그룹의 난립 등으로 발표기회와 무대 및 방식이 다원화되고 미술개념이 변화하여 창작내용이 다양화되는 등, 1970년대의 미술환경이 크게 변화함으로써 그 목적과 기능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대한민국 화단에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였던 작가로는 서양화 부문에서 유영국(劉永國) · 김영주(金永周) · 권옥연(權玉淵) · 변종하(卞鍾夏) · 박석호(朴錫鎬) · 전성우(全盛雨) · 박서보(朴栖甫) · 김서봉(金瑞鳳) · 윤명로(尹明老) 등이 있으며, 전통적 동양화를 지향하는 이상범(李象範) · 장우성(張遇聖) · 배렴(裵濂) · 노수현(盧壽鉉), 그리고 동양화에 새로운 재료나 표현기법으로 현대적인 조형을 받아들여 구미의 미술계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는 이응로(李應魯) · 김기창(金基昶) · 서세옥(徐世鈺) · 박노수(朴魯壽) · 천경자(千鏡子) 등이 있다.

1990년대 후반에는 한국미술의 세계화를 구현하기 위하여 광주비엔날레 등이 개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어 1997년 강익중은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상을 수상하였는데, 그는 백남준에 이어 세계무대에서 가장 주목받는 한국 미술인으로 떠올랐다.

조각에 있어서는 1950년대에 순수창작조각 외 모뉴망조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양자가 큰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 미술계의 전반적인 흐름에 따라 추상적 조형의 추구가 크게 대두되었고,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금속재가 조각에 이용되어 조각개념을 혁신시켰다. 1960년대 후반 장르개념을 초월한 대담한 실험들이 추진되었고, 또한 조각가그룹이 잇따라 등장하고 신진조각가들이 대거 진출하였다.

한편, 각 분야에서 민족주의운동의 발흥과 함께, ‘민속공예전’ · ‘이조백자전’ · ‘조선문방구 · 목공예전’ · ‘조선민화전(朝鮮民畫展)’ 등을 통하여 전통미를 재발견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1970년대의 조각은 미니멀리즘적 추상조각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1980년대의 것은 새로운 형상조각이 주류를 이루었다. 1990년대의 조각은 이러한 분류조차 무의미할개 군정도로 그 영역이 확장되었다.

음악

국악

국악은 궁중음악과 민속음악으로 대별할 수 있다. 궁중음악은 중국 계통의 아악(雅樂)과 당악(唐樂), 그리고 우리나라 고유의 향악(鄕樂)으로 구분할 수 있고, 민속음악은 대부분 조선왕조 후기에 발달한 민간음악이다. 아악은 오늘날 봄 · 가을로 거행되는 석전(釋奠) 제향에서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고, 당악은 완전히 한국음악으로 동화되었다.

향악은 지난 날의 우리나라 전통을 이어온 궁중음악이 그 주류를 이루는데, 현재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 가곡(歌曲) · 가사(歌詞) · 대취타(大吹打) 등이 있다. 민속음악으로는 예술적 가치가 높은 판소리와 시나위 · 산조 · 농악 등을 비롯하여, 서민들이 불러오던 잡가와 각 지방의 고유한 민요를 들 수 있는데, 판소리, 거문고산조 · 가야금산조 및 병창, 서도소리 · 경기민요 등이 있고, 이 밖에 불교음악으로서 범패(梵唄)가 있다.

광복 이후 외래음악의 범람 속에서 국악은 그저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으나, 1951년 국립국악원이 정식으로 발족함으로써, 연구와 연주활동의 태동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학교에서의 국악교육은 1954년에 설치한 덕성여자대학 국악과가 처음이나, 1956년에 곧 폐과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는 서서히 전통음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하여 국악교육이 확산되어, 현재는 서울대학교 대학원, 서울대학교, 한양대학교, 전주 비사벌국악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추계예술대학, 국악고등학교 등에서 국악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연주활동이 활발해진 것은 물론, 창작에 있어서 외래음악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려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현재 국립국악원을 비롯하여 국악단체로서 국립창극단 ·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등이 있고, 학술단체로서 한국국악학회가 있다.

서양음악

서양음악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13세기경으로 추정되나, 본격적인 서양음악이론은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를 통해서 소개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양악은 1885년 아펜젤러(Appenzeller, A.) 등 선교사의 기독교 선교에 따라 찬송가가 소개되면서, 그리고 1900년 군악대가 창설되면서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서양음악인 창가(唱歌)를 학교교육에서 가르친 것은 1909년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에 의해서였다. 양악의 선구자들로서 김인식(金仁湜) · 이상준(李尙俊) · 김영환(金永煥) · 홍영후(洪永厚) · 현제명(玄濟明) · 채동선(蔡東鮮) · 안익태(安益泰) · 이인선(李寅善)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이 밖에 독일인 에케르트(Eckert, F.)는 우리나라 양악의 기초를 세우는 데 공헌하였다.

광복 이후 서양음악이 널리 대중화되어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고, 1962년 ‘서울국제음악제’가 개최됨으로써 대한민국의 서양음악이 현대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편, 고려교향악단 · 서울교향악단 · 해군정훈악대 · 방송교향악단 · 국립교향악단 · 국제오페라사 · 국립오페라단 · 김자경(金慈璟)오페라단 등과 이화여자대학교 · 서울대학교 · 연세대학교 · 한양대학교 · 경희대학교 등의 음악대학을 통하여 서양음악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또한 안익태 · 윤이상(尹伊桑) · 김영욱(金永旭) · 정명훈(鄭明勳) · 정경화(鄭京和) 등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음악가들이 계속 배출되고 있다. 또한, 레코드와 라디오 · 텔레비전 등 대중전달매체의 보급과 함께 대중가요도 크게 성장하였다.

연극

광복과 함께 연극계는 다시 소생하여 역사상 처음 누리는 자유로운 활동기를 맞아 우후죽순처럼 수많은 극단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상황과 마찬가지로 연극계도 좌 · 우익으로 양분되는 시련을 치른 끝에, 1948년 정부수립 후 민족극 수립을 표방한 극예술협회, 민족진영의 총집결체인 한국무대예술원이 발족되었고, 1950년 대초 국립극장이 설립되어 그 전속극단으로 신협(新協)이 등장, 「원술랑(元述郎)」 · 「뇌우(雷雨)」 등을 공연하였다.

6 · 25전쟁 이후 유치진 · 김영수(金永壽) · 오영진 등의 희곡이 많이 공연되었고, 신협을 중심으로 미국 현대극이 점차 활기차게 수입되었다. 또한, 대학생이 중심이 된 제작극회(制作劇會)는 오스본(Osborne, J.)의 ‘앵그리 영맨’ 계통의 작품을 소개하는 한편, 창작극을 통하여 본격적인 소극장운동을 꾀하였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실험극장(實驗劇場)에 이어 산하(山河) · 민중극장 · 자유극장 · 광장(廣場) · 가교(架橋) 등 동인제 극단시대가 전개되었고, 까페 떼아트르는 전위극과 창작극 · 전통극을 배합하여 소극장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60년대에는 극단뿐만 아니라 오태석(吳泰錫) · 차범석(車凡錫) · 임희재(任熙宰) · 이용찬(李容燦) · 하유상(河有祥) · 이근삼(李根三) 등의 극작가와 이진순(李眞淳) · 오사량(吳史良) · 허규(許圭) · 김정옥(金正鈺) · 이승규(李昇珪) 등 연출가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1970년대에는 실험극장의 「에쿠우스」와 추송웅(秋松雄)의 모노드라마 「빨간 피터의 고백」을 계기로 연극관객은 크게 증가하였다.

한편, 연극이 다양화되어 전통극의 현대적 계승을 통한 민족극이 모색되고, 동양적인 차원에서의 아르토류의 실험극이 시도되기도 하였다. 거기에는 오태석의 「초분(草墳)」 · 「태(胎)」 같은 작품들도 기여하였다. 이 시기에는 공연극장의 확대와 극단 · 관객 · 공연횟수의 증가 등 연극 영역이 크게 확대되었고, 해외교류 또한 빈번하였다.

현재 서울에만도 대소 극단의 수가 50여 개를 넘으며, 1970년 중반부터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한 탈춤(가면극) · 꼭두각시놀음(인형극) 등 우리 고유의 전통적인 민속가면극운동도 주목할 만하다.

1990년대의 연극은 젊은 연극인들이 약진하는 가운데 기업형 대형연극이 관객 몰이에 나섰고, ‘저질연극’의 시비도 있었다. 1997년에는 우리 나라 연극계가 세계화를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 뮤지컬 「명성황후」가 미국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었으며, 세계연극제가 26개 국 47개 팀의 참여 아래 1997년 9월 1일부터 45일 동안 113편의 작품으로 개최되었던 것이다.

영화

광복 직후 광복영화들이 많이 나왔고 당시 좌 · 우익의 사상적 혼란과 분단의 고착이라는 사회적 상황과 관련, 반공영화가 나오기도 하였다. 정부수립 이후 「파시(波市)」 · 「마음의 고향」 등 비교적 예술성이 높은 본격적인 작품이 나왔으며, 6 · 25전쟁의 와중에서도 영화인들은 「태양의 거리」 · 「낙동강」 · 「고향의 등불」 등을 제작하였고, 신상옥(申相玉)은 「출격명령」 등의 전쟁영화를 만들어내었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관객층의 대폭적인 증가, 제작편수의 증가, 작품수준의 향상, 경향의 다양화, 영화인의 세대교체 등의 현상을 보이면서 중흥기를 맞게 되었다. 이규환(李圭煥)의 「춘향전」은 이러한 현상의 출발점이었으며, 이병일(李炳逸)의 풍자희극 「시집가는 날」은 한국영화로서는 최초로 국제영화제라고 할 수 있는 제3회 아시아영화제에서 희극상을 받기도 하였다.

문제성이 강한 예술작품에의 의욕은 이 무렵의 또 하나의 특징이었다. 유현목(兪賢穆)의 「오발탄」, 김기영(金綺泳)의 「10대의 반항」, 신상옥의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등이 그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이 밖에도 멜로드라마 경향의 작품, 스릴러 · 액션영화 등 여러 가지 영화형식에서 문제성을 띤 작품들이 나왔다.

한편, 1950년대에 와서 대한민국에도 시네마스코프에 의한 영화가 출현하였으니 이강천(李康天)의 「생명」이 그것이다. 1960년대 들어 5 · 16군사정변 이후 정부의 강력한 검열이 시작되면서 1950년대와 같은 문제작은 퇴색되어 갔지만, 그래도 주제의식이나 영상미학을 담으려는 일련의 작품이 1960년대 전반까지는 제작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는 1950년대의 리얼리즘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문제의식이나 인간적 · 사회적 진실감 같은 것은 퇴색하고, 그 대신 무난한 주제에 기교주의로 흐르는 경향을 보였다. 1970년대의 한국영화는 경제성장과 함께 텔레비전시대가 본격화되고 각종 레저가 보급됨으로써 사양화하였다.

또, 등록에서 허가제로의 영화법 개정과 유신체제하의 강화된 검열 속에서 영화사는 정비되었으나, 한국영화의 고유한 정신(esprit)은 고갈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김수용(金洙容) · 이장호(李長鎬) · 김호선(金鎬善) 등 전후 감독들이 활약을 보여주었다.

1980년대 초에 접어들면서 영화계는 영화정책의 지양과 함께 질적인 변모를 보여 강렬한 작가의식의 회복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해외영화제에 활발하게 참여하기 시작하여 점차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1987년에는 임권택(林權澤)의 「씨받이」가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국제무대에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1990년대 후반에는 IMF 구제금융 한파와 스크린쿼터제 폐지논쟁, 직배사의 독점가속화 등으로 한국영화계가 꽁꽁 얼어붙었다. 1997년 한국영화의 제작편수는 60편을 밑돌아 침체를 면치 못하였으나, 흥행기록면에서는 관객동원 10만 명을 넘긴 작품 수가 14편에 이르러 비교적 선전하기도 하였다.

무용

무용은 우리의 전통적인 개념에서 독립하여 존재한 것이 아니고, 항상 음악과 함께 존재하여 음악의 곡명이 곧 무용의 명칭인 것이 우리 무용의 특색이었다. 무용에 있어서도 음악에서와 같이 궁중무용인 정재(呈才)와 민속무용, 불교의식무용인 작법(作法)으로 대별된다.

정재에는 당악정재와 향악정재가 있는데, 당악정재는 현재 포구락(抛毬樂)만이 전해지고 있으며, 향악정재도 처용무 · 무고(舞鼓) · 검무 · 학무 등 몇 편만이 전하고 있다. 민속무용은 흔히 고전무용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현재 승무와 각 지방의 검무 · 무무(巫舞) · 소고춤 · 장구춤 · 한량무 · 강강술래 · 살풀이 등 여러 종류가 있다.

궁중무용이 구성의 규모가 크고 형식미를 갖추어 화려한 의상에 아름다운 노래를 수반하고 우아한 데 비하여 민속춤은 소박하고 약동미가 있다. 이 밖에 불교의식무로서 나비춤 · 바라춤 · 법고춤 등이 있다.

한편, 20세기초 서양무용이 도입되면서 무대상연을 위한 활동이 본격화되고, 새로운 형태로 창안된 한국무용이 서서히 선보이기 시작했다. 광복 이후 남북분단과 관련하여 무용계에도 무용의 해석방법 · 표현방법을 둘러싸고 커다란 대립이 나타났다. 그 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립무용단이 발족되어 1962년 국립극장에서 제1회공연을 하였고 1969년까지 11회에 걸친 무용공연을 하였다.

1973년 국립극장 준공기념공연을 계기로 국립무용단과 국립발레단이 분리, 발족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각 30여 회의 공연을 가졌으며, 오늘날 대한민국 무용계의 양대 지주로서 무용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또한, 1960년대 이후 ‘리틀엔젤스’의 활동과 1961년 창립된 한국무용협회의 활동도 주목할 만하다.

한편, 1970년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용공연과 무용이론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어, 앞으로 대한민국 무용의 부흥기를 맞이할 전망이다. 1990년대에는 30대 젊은 안무가들을 중심으로 한 왕성한 창작 활동이 무대를 주도하였으며, 직업발레단의 외국무대 진출도 이루어졌다.

문화보존

오랜 역사를 통하여 계승, 발전하여 온 독창적이고 고유한 우리 문화는 일제침략으로 역사적 자존심을 손상당하고 민족문화유산이 일제식민지통치와 6 · 25전쟁으로 인하여 수없이 파괴, 훼손되었다. 또한, 1960년대 이후 공업화 · 서구화의 급격한 진전으로 인한 외래 서구문화에의 경도는 일시적이나마 우리 문화의 전통을 무시, 파기하게 하였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의 고조와 더불어 경제적 성장을 기반으로 문화 · 예술 활동이 더욱 활발해지고 그 보존에 보다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형 · 무형을 막론하고 민족이 남긴 역사 · 학술 · 예술 · 국민생활 등의 분야에서 가치가 있는 것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국가적으로 보호조처를 취하고 있다. 여기에는 국가에서 지정하는 국가문화재와 지방행정관청에서 지정하는 지방문화재의 구분이 있으며, 국가문화재는 다시 국보 · 보물 · 중요무형문화재 · 사적 · 명승 · 천연기념물 · 중요민속자료로 분류된다.

1988년 말에는 국가지정문화재 2,133개, 지방문화재 2,374개였는데, 1995년 3월 1일에는개 군국가지정문화재가 2,491개, 지방문화재가 2,935개가 되었다. 그 뒤 1996년에는 국가지정문화재가 2,544개나 되었다.

국가지정문화재는 국가의 이름으로 국가의 책임 아래 보호를 받으며, 국가소유는 물론 개인소유일지라도 엄격한 감독을 받게 된다. 지방문화재는 「문화재보호법」에 의하여 지정된 문화재 가운데 향토문화 보존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것을 각 시 · 도에서 지방문화재로 지정한 것으로서, 그 보호관리는 각 시 · 도의 책임 아래 행하고, 지방문화재 가운데서 국유 또는 공유재산인 것은 국고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경비로 보호된다. 이러한 지정문화재 이외의 문화재도 현상변경 또는 국외수출이 금지되는 것이 있다.

유형문화재는 선인들이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제작물이어서 그들의 얼과 정성, 그리고 우수한 예술성과 기술, 당시의 신앙적 배경 등까지도 직접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즉 문화사를 물적 증거로 알게 해주는 문화사료이다.

이 가운데 1988년에는 국보 246개, 보물 974개, 사적 322개가 지정, 보호되고 있었으며, 1995년 3월 1일 현재 국보는 282개, 보물은 1,210개, 사적은 386개가 지정, 보호되고 있다.

무형문화재는 연극 · 음악 · 무용 · 공예기술과 그 밖의 신앙의례 · 민속놀이 · 음식요리 등에서 1988년 총 89가지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 보호되고 있었고, 1995년에는 총 94가지가 지정, 보호되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는 그 자체가 무형이므로 그 기능보유자를 보호하는 한편, 그 기능을 다른 사람에게 전승시키도록 하는데,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는 1988년 12월 지정 178명이며, 중요무형문화재의 전승현황을 보면 총 76개 종목에 전수자 1,536명이 있었다.

또한, 의례자료 · 신앙자료 · 생업자료 · 의식주자료 · 예능오락자료 · 교통운반자료 가운데 1988년 218종류가 중요민속자료로 되어 있었으나, 1995년 현재는 225종류가 중요민속자료로 되어 있다.

그리고 각종 유적으로부터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은 갑작스러운 환경변화에 접하면 화학적 · 물리적 · 생물학적 손상을 받아 쉽게 변형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것의 보존에 관련된 학문으로 이른바 문화재보존과학이 대두되고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또한, 1980년 말에는 경복궁 · 창경궁 등 조선시대 왕궁의 복원 · 정비에 이어 한강 유역에 있는 신석기시대 취락주거지유적과 백제 도읍지 등의 사적공원화를 추진하였다. 한편,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 확장되고, 경기도 과천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신축되어 문화예술의 보존에 더욱 이바지하였다. 1990년대 말 현재 국립박물관 7개, 공립박물관 7개, 대학박물관 63개, 그 밖에 사설박물관 13개 등이 있다.

대한민국의 전망

광복 후 5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대한민국은 우선 일제 지배가 남긴 사회구조 · 제도 · 의식 등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다 38선에 의한 민족생활공간의 분단은 사회의 변화 방향과 구조에 대하여 원천적인 작용을 함으로써 한국사회는 건국의 이념에 따라 민주주의에로의 발전이라는 궤도 위에서 변화해 왔다고 포괄적으로 말할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가 민주주의적 제도화와 생활양식화로서 정착되는 과정을 밟아 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과정은 특히 정치 분야에서 시행착오가 많았다 할지라도 그 시행착오의 한 단계마다가 결과적으로 민주주의를 점진적으로 실현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사회적 차원에서 시민생활의 자유가 보장되는 조건들이 하나하나 정착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생활양식으로서의 자유의 신장과정을 민주주의화의 실질적 내용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특징은 북한에 있어서의 ‘인민생활’의 변화와는 원리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1948년 대한민국이 민주공화제 헌법 밑에서 국가로서 출발하였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입헌민주국가 형성이라는 과제는 그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근대화작업의 성공 여부에서 평가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광복 후 가장 큰 사회변화의 요인은 196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공업화를 통하여 국민경제의 기반이 마련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며, 이것이 실질적으로 사회구조 변화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 양적 팽창의 결과 눈에 보이는 변화는 물론이고, 그와 더불어 사회구조도 변화해 가고 사람들의 행동을 유발시키는 이유와 동기의 폭도 변화하고 있다. 19세기 중엽 이후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도모해 왔지만, 실질적으로 사회적 차원에서 생활구조와 생활양식이 변화한 것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이후의 일이다. 한국인들은 이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공업화로 인한 발전의 가능성과 그 부담을 실감하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이 정부 주도하에 진행된 면이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공업화 반세기의 역사가 지난 현재, 경제의 전반적인 발전방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통제경제의 형태로 발전하기보다는 자유 · 경쟁경제의 내용을 더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1990년 말 대한민국의 경제위기는 세계화 · 지구화(globalization)의 시대에 겪는 어쩔 수 없는 고통이며 그럴수록 개방화 · 규제완화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이제 한국사회도 구조개혁을 통하여 경쟁의 자유를 그 속에서 감당하게 되었고, 점차로 이해관계의 대립구조를 제도적으로 포괄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1980년대 · 199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노사관계 · 여야관계 등에 있어서 대화와 타협으로 갈등을 해결하려는 제도가 사회통합의 원리로서 정립되어 가고 있다. 이 문제가 앞으로 더욱 민주적인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들이 착실하게 형성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문제점도 있다. 민주주의의 이름 밑에서 상업주의와 이기주의가 공동체적 유대를 이완, 파괴시킬 수 있는 가능성도 있으며, 낡은 권위주의와 새로운 관료주의가 국가행정에서 어느 정도까지 개선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들은 기본적으로 정치 · 경제 · 사회의 제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방법이 관료적 · 권위주의적 방법에서부터 민주적 방법에로 전환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대한민국 사회의 시민사회화의 정도에서 결정될 문제이다.

끝으로, 정치공동체로서의 대한민국의 장래문제는 민족의 통일문제와 본질적으로 관계된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통일문제에 있어서는 통일된 민족사회의 미래상을 대한민국의 현실의 연장으로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력통일이 아닌 평화적 · 민주적 통일은 사회발전을 통한 통일이라는 것이 민족적 당위성으로서도 당연히 제기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민족발전의 한 양상일 뿐만 아니라, 민족성원으로서도 개인의 자유와 민족의 통일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 것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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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연감, 연합연감, 한국외교연표』(국회도서관 입법조사국, 1974)
『문화예술자료집』(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84)
『문화예술진흥백서』1981∼1985(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85)
『보건복지통계연보』(보건복지부, 1997)
『북한의 군사력과 군사전략』(백종천, 통일연수원, 1990)
『북한핵의 문제』(이춘근, 세종연구소, 1995)
『분단사회의 평가적인식』(황성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신편한국지리』(정장호, 우성문화사, 1980)
『여성관련 사회통계 및 지표』(한국여성개발원, 1986)
『우리나라의 문화재』(문화재관리국, 1970)
『주요경제지표』(한국은행, 1986)
『지정문화재목록』(문화재관리국, 1995)
『학회총람』(학술진흥재단, 1996)
『한국경제백년사』(경제평론사, 1982)
『한국경제연감』(전국경제인연합회, 1998)
『한국경제의 이해』(임원택 외, 비봉출판사, 1987)
『한국과학사』(박문옥, 한국방송사업단, 1982)
『한국교육개관』(중앙교육연수원, 1982)
『한국도시연감』(내무부, 1986)
『한국문학사』(예술원, 1984)
『한국문학의 현단계』(김윤수 외, 창작과 비평사, 1982)
『한국문화사대계』5(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67)
『한국문화사대계』4(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0)
『한국미술사』(예술원, 1984)
『한국민속대관』 2(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0)
『한국민속학개설』(이두현 외, 민중서관, 1977)
『한국복식문화사』(유희경, 교문사, 1982)
『한국복식사론』(이경자, 일지사, 1983)
『한국사연구입문』(한국사연구회, 지식산업사, 1981)
『한국사총론』(이현희, 일신사, 1980)
『한국사통론』(조좌호, 박영사, 1981)
『한국사회』1(이해영 외, 서울대학교 인구 및 발전문제연구소, 1978)
『한국어의 계통』(김방한, 민음사, 1983)
『한국어의 기원』(김승곤, 건국대학교 출판부, 1984)
『한국연극·무용·영화사』(예술원, 1985)
『한국영화60년』(교육과학사, 1980)
『한국음악사』(예술원, 1985)
『한국의 경제지표』(경제기획원, 1986)
『한국의 국민소득』(한국은행, 1982)
『한국의 기후와 문화』(김연옥,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85)
『한국의 민속』(김성배, 집문당, 1980)
『한국의 복식』(한국문화재보호협회, 1982)
『한국의 사상』(尹絲淳 外, 열음사, 1984)
『한국의 사상』(전신용, 국제문화재단, 1979)
「한국의 사회변동과 계층구조」(김영모, 『사상과 정책』1―2, 1984)
『한국의 사회지표』(경제기획원, 1986)
『한국의 사회지표』(통계청, 1995)
「한국인의 여가라이프스타일에 관한 연구」(김은한, 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6)
『한국정부론』(박문옥, 신천사, 1982)
『한국주택건축』(주남철, 일지사, 1980)
『한국통계연감』(경제기획원, 1983·1986)
『한국통계연감』(경제기획원, 1992·1997)
『한국학입문』(학술원, 1983)
『한국행정제도사』(정시채, 법문사, 1985)
『한국헌법개정사』(송우, 집문당, 1980)
『한국현대문화사대계』 1(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5)
『한국현대미술사』(오광수, 열화당, 1979)
『한국현대비평문학론』(윤병로, 청록출판사, 1982)
『한글과 민족문화』(허웅,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4)
「한미군사관계: 지속과 변화」(하영선·구영록 편, 『한국과 미국』, 박영사, 1983)
『현대가족연구』(최재석, 일지사, 1982)
『현대한국경제사』(유광호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현대한국문학사개설』(정태영, 대흥문화사, 1985)
Unification Policies of South and North Korea(Kim ㏊k Jun, Seoul National University Press,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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