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등광(燈光)이나 형상·음향·전파 등의 수단에 의하여 항만·해협 등 연안수역을 항행하는 선박의 지표로 하기 위하여 설치하는 각종의 항로표지 중 광파표지(光波標識)로 분류되는 대표적인 구조물의 일종이다.
굴뚝 모양의 구조물상에 등롱(燈籠)을 얹고 내부에는 등명기(燈明器)를 설치하여 등광을 발함으로써 항행선박의 위치결정이나 선위측정(船位測定) 등에 이용되는 등대는 크게 유인등대와 무인등대로 분류된다.
유인등대는 등대원이 등대에 상주하면서 각종 항로표지(안개신호소, 선표지소 병설) 및 기기의 관리와 운영을 도맡아 하는 곳이며, 무인등대는 독자적인 자동설비에 의하여 관리인 없이 운영되는 곳이다.
청일전쟁(1894∼1895)에 즈음하여 작전의 필요상 일본의 참모총장은 체신대신과 상의하여 체신기사 이시바시(石橋絢彦)로 하여금 1895년 6월부터 같은 해 9월까지 4개월에 걸쳐 우리나라 전 연안의 등대건설 위치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 뒤 1901년 당시의 주한국일본공사는 1883년 7월에 한말 정부와 일본 간에 체결된 일본인민무역규칙(日本人民貿易規則) 중의 “한국 정부는 후래 통상 각항을 수리하고 등대 초표(礁標)를 설치한다”라는 조항을 들어 등대건설을 해야 한다고 우리 정부를 압박하였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계획의 일환으로서 우리 나라 연안의 등대건설을 서두르게 되었다. 1902년에 해관등대국(海關燈臺局)을 설치하여 탁지부(度支部) 관리하에 같은 해 5월 소월미도, 팔미도, 북장자서 및 백암에 등대건설을 착수하고, 1903년 4월에는 부도등대 건설도 착수했는데, 그 중 팔미도 외 3개 등대는 1903년 6월에 점등을 개시하고 부도는 1904년 4월에 완성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등대건설의 효시이기는 하나 이는 우리 정부의 독자적인 필요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1904년에 발발한 러시아와의 전쟁에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1904년 개전 직후인 4월부터 압록강에 다수의 부표(浮標)와 대화도등대를 건설하였으며 서해안에 또 등대를 건설하였다. 또 일본해군은 남해안 및 동해안에 등간(燈竿) 4개 소를 설치하였다.
그 결과 1905년 말 우리나라의 등대는 일본해군이 급히 설치한 것을 포함하여 야표(夜標: 주로 밤에만 이용되는 등광이 있는 등대) 15기, 주표(晝標: 낮에만 이용되며, 형상·채색에 의하여 지표가 됨) 37기, 합계 52기가 되었다. 당시 항로표지의 소관은 등대국(燈臺局)에 속하는 것, 해관(海關)에 속하는 것, 일본해군에 속하는 것 등으로 대단히 복잡하였다.
1905년 10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우리나라의 관세권을 장악하게 됨에 따라 일본인 총세무사의 취임을 계기로 1906년 4월 모든 등대시설은 한말 총세무사가 인수, 세관·공사부·등대국 소관으로 통합되었다.
한말 정부는 1906년 이후 5년간 계속 공사하여 우리나라의 전 연안에 등대를 증설하는 데 착수하였고, 1907년 6월에는 기선 녹천환(綠川丸, 31t) 및 기선 압천환(鴨川丸, 32t)을 건조하여 압록강 동·서 수로의 부표정리 및 대화도등대의 운영 업무를 수행시켰다.
경술국치 후 1912년까지 등대 37기, 기타표지 133기를 증설하였고, 8기를 개축하여 전체 등대 수는 총 207기가 되었다.
태평양전쟁 중 일본은 등대를 군사시설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국제적 공기(公器)였음에도 폭파를 면치 못하였다. 그 중에는 광복 후 철수하는 일본인이 파손한 것도 있어 기존시설의 80%가 파손상태로 있었다.
이러던 중 연합군 최고사령관측에서 일본정부에 대하여 우리나라 연안 각 등대를 광복 이전의 원상태로 복구하라는 전령을 내리게 되었다.
일본정부는 당황하여 이른바 조선총독부 교통국장에게 급명하였으나, 예비자재의 결핍으로 인천항 근해에 겨우 미국 함정이 출입할 정도의 가등(假燈: 등대 개축 또는 소등할 때 긴급조처로서 가설되는 등대)을 설치하고 일본인 간수를 재배치한 바 있으나, 1945년 12월 26일에는 등대업무가 전반적으로 우리 직원에게 인계되었다.
한편, 이를 계승한 등대업무는 광복 직후 혼란으로 등대 수를 돌볼 여유가 없었고, 또한 미군정청으로부터 체계 있는 세출영달을 받기에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된 관계로 많은 용품이 도난당하는 등 등대시설이 재기불능의 상태에 있는 실정이었으며, 할 수 없이 일부는 항 단위로 미군측의 해무관에 의하여 직접 관리한 바도 있다.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하여 시설의 45% 이상이 상실됨으로써 그 동안의 복구와 재건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 다시 광복 직후와 같은 상태로 후퇴하게 되어 할 수 없이 기존시설의 약 50%를 가지고 다시 새출발하지 않으면 안 될 실정이었다.
그러나 등대시설의 기능저하는 전쟁 뿐만 아니라 광원장치(光源裝置) 등 특수기재의 입수가 곤란하고, 기술자의 부족 및 종업원의 기술미숙 등으로 오히려 광복 이전보다 광달거리(光達距離)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모든 시설은 광복 직전의 상태로서 복구와 기술의 확보에 목표를 두고,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매년 평균 15%의 복구공사를 진행하는 동시에 요원양성과 등대원의 가족후생 등 등대운영 대책에 주력하게 되었다.
또한, 1954년 및 1955년의 계획은 국제연합한국부흥위원단(UNKRA) 원조복구계획에 전입되어 등대영조물 2,035㎡와 등대지기 18기 및 등대선 5척에 대한 복구계획을 추진하였으며, 그 뒤 다시 국제협조기구(FOA) 자금에 의하여 추진되는 등 1960년까지 총 보유기 수는 254기로 가시거리는 38.5해리당 1기에 해당하게 되었다.
1962년부터 실시된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힘입어 등대 건설도 점점 전후 복구식의 차원을 벗어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하에 급변하는 해상교통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등대건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1998년 9월말 당시 우리나라의 등대시설은 양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 양질의 등대시설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등대의 발전과정을 전시하여 국민들에게 해양활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고 자라나는 세대에게 개척정신을 함양할 목적으로 포항항 입구 호미곶에 등대박물관을 건립하였다.
이 박물관은 건축양식이 독특하며 160여 종에 720여 점의 귀중한 자료가 전시되었고, 1982년에 장기곶등대(지금의 호미곶등대)가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1986년에는 당시 문화공보부로부터 전문박물관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의 박물관 이관요청에 박물관운영권이 1995년 포항시에서 장기곶등대박물관으로 이관 확정되었다. 이후 부족한 전시면적 확장을 위한 제2전시관이 건립되었으며, 2002년 장기곶등대박물관이 해양수산부 산하로 이관되면서 2002년 국립등대박물관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