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치교(穉敎), 호는 사애(沙厓). 참판 민백의(閔百燨)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울산김씨(蔚山金氏)로 승지 김상동(金相東)의 손녀이다.
학문은 주로 아버지로부터 배웠으며, 송치규(宋穉圭)·안수록(安壽祿)·장헌주(張憲周)·기정진(奇正鎭)·홍직필(洪直弼) 등에게 두루 사사받았다. 1836년(헌종 2) 향시(鄕試)에 합격한 뒤, 44세로 경과정시(慶科庭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52년(철종 3)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로 벼슬생활을 시작하였고, 1853년 겸춘추관기사관(兼春秋館記事官), 1854년 조경묘별검(肇慶廟別檢)을 지냈다. 그 뒤 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형조좌랑·사간원헌납·사헌부집의·봉상시정(奉常寺正)·병조정랑·사간 등을 거쳤다.
64세 때 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병조참판, 67세에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여러 스승에게 사사받았으며 66세에 다시 임헌회(任憲晦)의 제자가 되기도 하였다.
재직 시 국방과 교화에 대한 정책을 주장하였고, 만년에는 학문을 강론하면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저서로 『사애문집(沙厓文集)』 6권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