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1479년(성종 10)에 처음 돌로 쌓았는데 둘레 4,670자, 높이 9자, 우물 4개와 못이 1개소가 있었다고 하였다(石築周四千六百七十尺 高九尺 內有四井一池 成化十五年築)’.
1590년(선조 23) 부사(府使) 신잡(申磼)이 성 둘레에 물을 끌어 들여 해자(垓字)를 파고 물로서 성을 지키려 하였다. 뒤에 못 1, 우물 8, 동서야문을 늘려서 못 3개, 우물 8개, 4대문, 야문이 되었다. 동문은 1칸, 서문은 2층 3칸, 북문은 1칸이며 남문은 공해루라고 하였는데 3층 3칸이었다.
그리고 성안에서 죽은 상여나 시신은 모두 동서야문을 통과하게 하였다. 한편 이 읍성이 파괴된 것은 1902년 경부철도가 통과하게 되던 때와 1934년밀양에 교량이 놓여질 때이며 아동산과 아북산 주능선을 감아 돌던 성돌은 6·25동란 때 방어진지(方魚津址) 구축으로 모두 쓰였다.
성의 해자(垓字)는 ‘해천’이란 이름으로 내일동과 내이동을 경계짓는 하수도로 변하였고 지금은 무봉사(無鳳寺) 뒤에서 아동산 정상까지 성의 흔적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