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이명은 박경래(朴慶來). 자는 경화(京化)·화옥(化玉). 전라북도 고창 출신. 박준식(朴準植)의 아들이다. 한미한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며, 언변과 기개가 뛰어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고 기삼연(奇參衍)이 거의하자 무기를 수집하여 제공하고, 전수용(全垂鏞) 등과 종사로서 활약하였다.
1907년 9월 모양(牟陽: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 무기고의 무기를 탈취할 계획으로 습격하였으나 패전하여 의병은 무기를 버리고 흩어졌다. 이에 그 무기를 수람하였다가 의진에 다시 제공하였다. 그뒤 포대(砲隊)에서 천자포(千字砲)를 휴대하고 광주·담양·순창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1월 기삼연의 순국 후 격문을 지어 돌려서 의병활동을 독려하였으며, 포사장(砲士將)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의병대토벌작전의 전개로 의병활동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장성(長城)으로 돌아가 군사훈련과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였고, 1909년초 전수용 의진과 연합하여 남포(藍浦)·부안(扶安)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같은 해 4월 부안 상서면에서 일본 기병대와 교전하였으나 패하여 가협(加峽) 산중으로 피신하였다. 그뒤 은신처가 드러나 붙잡혀 1909년 12월 광주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다음 해 2월 옥중에서 음독자결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