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이명은 박연백(朴淵白). 자는 응구(應九). 호는 암재(巖齋). 경상북도 의성 출신. 박광호(朴光鎬)의 아들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사방에 격문을 보내 동지를 규합, 공산(孔山)에서 거의하였다. 1906년 7월 죽창과 나무막대기 등 낙후한 무기로 무장하고 일본군과 접전하여 적 수십명을 도륙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 뒤 의성·의흥·영천·청송 등지를 전전하면서 야간기습 및 화공의 수법으로 일본군을 토벌하였다.
1907년 10월 영천 의병장 정관여(鄭寬汝) 의진과 합세하여, 경주 죽지면 입암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던 중 정관여가 전사하였다. 전세가 약화되어 후퇴하였으나 의병의 피해가 컸다. 그 해 11월 25일 부하 100여 명을 이끌고 일경분견소를 습격하였고, 12월 23일에는 청송군 송정리와 의성군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였다.
그러나 1908년에 이르러 일본의 의병대토벌전의 전개로 효과적인 항일투쟁이 곤란해지자 의진을 해산하고, 1909년 11월 이후 은둔생활을 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