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차정

정치
인물
일제강점기 때,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근우회, 의열단 등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910년
사망 연도
1944년
출생지
부산
관련 사건
광주학생운동
정의
일제강점기 때,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근우회, 의열단 등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부산 동래 출신으로, 일제 식민체제에 강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 박용한과 신간회에서 활동한 오빠 박문희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강한 민족의식을 형성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1924년 조선소녀동맹 동래지부에서 활동하였다.

동래여고의 전신인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 재학시절, 수차례 항일학생운동을 주도하여 그때마다 거듭해 감옥살이를 하였고, 이때 일신여학교의 교지인 『일신』 2집에 발표한 「철야(徹夜)」라는 소설은 이 시기 박차정의 항일의식을 잘 나타낸 글로 호평을 받았다. 사회에 진출하자 동래청년회 부녀부장을 2년 동안 지낸 뒤, 1927년 근우회(槿友會) 동래지회 결성에 참여하고 민족독립에 관한 글을 발표하여 독립의지를 표출하였다.

이후 상경하여 여성의 좌우합작 민족운동단체인 근우회에 참여하면서 지도층으로 부상하였다. 1929년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선전조직과 출판부문을 담당하였고, 1930년 1월, 서울의 11개 여자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광주학생운동 때의 막후활동 관련자로 일경에 체포된 후, 서대문형무소에서 3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1930년 중국에 망명하여 북경 화북대학(華北大學)을 졸업하고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레닌주의 정치학교의 운영에도 참여하였고, 1931년 의열단을 주도하는 김원봉(金元鳳)과 결혼했다.

1932년에는 남경으로 옮겨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여자부 교관으로 교양교육과 훈련을 담당하였고, 1935년 민족혁명당의 지원단체인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여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하였다.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 창설에 관여하고 1938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으로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여성의 몸으로 일제와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그는 1939년 강서성 곤륜산(崑崙山)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였고, 이때의 후유증으로 1944년 35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였다.

상훈과 추모

중국의 주2과 임시정부의 조소앙(趙素昻)은 의열단의 내조자이자 항일전사로 순국한 그녀의 추도사를 중국의 신문에 기고하였다. 유해는 김원봉의 선영이 있는 밀양에 안장되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주1되었다.

참고문헌

『여성조선의용군 박차정 의사』(강대민, 2004)
『조국(祖國)을 찾기까지』상(최은희, 1973)
「여성독립운동가 박차정」(박철규, 『문화전통논집』14,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7)
「박차정의 생애와 민족해방운동」(강대민, 『한일연구』12, 한국일본문제연구학회, 2001)
「박차정 여사의 삶과 투쟁」(이송희, 『지역과 역사』1, 부산경남역사연구소, 1996)
「누님 박차정(朴次貞)」(박문하, 『팔십년지』, 동래학원팔십년지편찬위원회, 1975)
주석
주1

죽은 뒤에 관등을 올리거나 훈장 따위를 줌. 우리나라의 경우 긴급 상황에서 살신성인의 정신을 실천하다가 사망하거나 위급한 상황에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여 사회 전체의 본받을 만한 모범이 된 사람, 생전에 큰 공을 세워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덕망을 갖춘 사람에게 준다.    우리말샘

주2

중국의 정치가(1891~1969). 자는 더린(德隣). 1926년에 제3로군 총지휘관, 1945년에 제5전구(戰區) 총사령관을 역임하고, 1948년에 부총통, 1949~1950년에 총통 대리였으나, 장제스(蔣介石)와의 알력으로 미국으로 망명하여 16년간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65년 중국 본토로 귀국하였다. ⇒규범 표기는 ‘리쭝런’이다.    우리말샘

집필자
서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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